[테마있는 명소] 계백의 그곳② 황산벌㉯--초반 네 번 이기고 전사..계백 장군 마지막 한 말은?

2013. 4. 19.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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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논산]류 원장님과 계백 장군의 무덤 앞에 섰다. 커다란 묘가 소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잘 단장돼 있었다.

앞에는 큰 비석도 세워져 있었다. '백제계백장군지묘(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화려한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이 묘는 불과 40년 전 계백의 묘로 알려졌다고 했다.

국립부여박물관장이자 부여향토사학자였던 고(故) 홍사준 선생이 계백 장군 묘 찾기에 나섰다가 황산벌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보고 이 묘를 발견했는데 지역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장군 모이(묘)'로 전해왔다는 얘기를 듣고 여러 정황으로 견줘 계백의 묘로 인정(추정)하기에 이르렀다. 발견 당시엔 지금 만큼 크진 않았다고 했다. 이 묘에 대해 일각에서는 확실치 않다는 반론을 여전히 주장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어느 곳에서도 계백의 묘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곳이 현재로서는 없다.

계백 장군 묘. 류제협 논산문화장께서 계백 장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류 원장께 이러한 재밌는 설명을 듣고 아래쪽에 있는 충장사를 거쳐 인근 동네에 있는 충곡서원으로 향했다. 조선 숙종 6년(1680년) 세워진 이 서원은 사육신 등 문관들과 함께 무관으로는 유일하게 계백 장군이 모셔졌는데 계백의 위패가 제일 가운데 유일하게 크게 모셔져 그 의미를 새기게 했다.

계백 장군 묘 산 너머 동네에 있는 충곡서원. 조선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계백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필자는 황산벌의 전체적인 지형을 한 눈에 내려다 보고싶어 류 원장님과 황령산성으로 향했다. 이 산성은 백제군이 3개의 진영 중 좌군영으로 삼았다는 곳이다.

고갯마루 도로 옆 주차장에서 약 30분을 가파른 경사지로 올라 정상에 다달았다. 성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황산벌은 우리가 서 있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는 방향이 됐다.

처음 바라본 황산벌. 저 벌판에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말과 병사들이 달려 함성을 지르며 싸웠을테다. 그리고 이 전쟁은 한 나라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전투가 됐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의 주요 전투는 이 황산벌전투와 소정방의 당군이 기벌포(금강 하구)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싸움, 그리고 사비왕궁 외곽의 나성에서 궁성 진입을 앞둔 마지막 결전으로 백제군 1만명 가량의 전사자를 낸 게 전부로 알려졌다.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황산벌전투는 통한의 전투가 됐다. 머뭇거리지 않고 한 발 먼저 탄현에서 진을 쳤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방어하기 좋은 탄현에서 신라군의 발목을 잡았으면 13만 당군의 보급로도 차단됐다. 게다가 백제 왕자와 신하들이 음식을 준비, 소정방을 찾아가 공격하지 말아줄 것을 집요하게 요청해 나ㆍ당 분열까지 갈 수 있었던 정황이 보였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합류 날짜에 하루 늦은 신라군 김유신 휘하의 장수 독군 김문영의 목을 베려하자 김유신이 소정방에 격분, "당군을 먼저 치고 백제를 치겠다"고까지 협박했다. 의자왕은 사비왕궁 함락 직전에야 충신 성충과 흥수의 말을 듣지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관계는 동-서 축과 남-북 축의 열십자형 구도를 형성했다. 백제가 신라를 고립시키기 위해 북으로 고구려와 말갈, 남으로는 왜와 화친을 맺었고, 고립무원의 신라는 당과 필사적인 노력으로 생존의 길을 찾았다. 하지만 나당군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는 백제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놓고 볼 때 위기 상황에서의 국론분열, 지도자의 리더십, 실기(失機)가 한 국가를 패망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된다.

그 벌판, 지금은 연산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현대식 건물들이 띄엄띄엄 들어차 있었다. 남쪽 방향으로 고개 돌리니 대둔산이 버티고 섰다. 그 옆 협곡을 김유신의 5만 병사가 지나왔을테다. 류 원장님은 그렇게 온 신라군이 그 아래쪽 벌곡면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황산벌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신라군의 진격로, 그리고 이에 맞서 전진배치한 백제의 3영, 그 뒤쪽의 황산벌을 지나 오른쪽(북쪽) 황산에선 계백 장군이 지휘부를 두고 총지휘하는 전투가 여기서 벌어진 것이다.

황령산성에서 바라본 황산벌.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일대다.

그 날의 아픔은 1400년의 세월 속에 묻히고 지금은 평온한 시골의 모습이다. 그 벌판을 가로질러 지나봐도 숨 죽인 듯 조용했다.

이 산성에서 바라보니 이 3영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논산시내를 지나 부여로 향하는 길은 그냥 평지였다. 방어를 할 만한 지형이 없었다. 황산벌을 내려다 보며 잠시 서기 660년 7월 9일, 그날을 상상해 봤다. 저 벌판에 전투장면을 오버랩 시켜봤다. 양쪽 병사 5만5천이 뒤엉켜 싸웠을 테다. 살짝살짝 전율이 느껴졌다.

산을 내려와 다시 차를 타고 황산벌을 가로질러 중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산과 산 사이의 계곡길이 황산벌로 진입하는 지형이었다. 지금은 계곡 입구에 한민대학교가 있었다. 길 옆에는 '황산벌 계백 장군 최후 전적지'라고 새겨진 바위탑만이 전장터였음을 알려줬다. 벌판엔 농촌 마을과 농지만 펼쳐져 있었다.

황산벌에서 바라본 백제 중군영 산직리산성 협곡. 신라군은 가운데 산과 산 사이 협곡에서 이쪽 황산벌로 진격했다. 작은 사진은 '황산벌 계백장군 최후 전적지'라고 쓰인 바위석.

류 원장님께 "왜 황산벌엔 아무것도 없습니까"하고 여쭸더니 "전장터의 흔적들과 병사들의 위령탑 등을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 좀 더 고증을 거쳐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고 했다. 1400년 전 일인데 아직 그런 작업도 안돼 있었나 싶어 또 여쭸더니 "사실 패자로 인한 유물과 기록들이 없는데다 과거 먹고 살기도 바빴던 시절 감히 엄두도 못낸게 현실이었다"며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도 불과 30~40년 전부터 그나마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했다. 결전지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휑한 들판일 뿐이라는게 믿기지 않았다.

다시 발길을 돌려 모촌리산성 터 옆을 지나 좀 전에 들렀던 중군 진영의 건너편 마을 산직리로 향했다. 승적골이라는 곳이다. 몇몇 민가 뒤쪽 산비탈에는 산성터였음을 알려주는 석축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당시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우물 터도 있었다.

백제 중군영이 설치됐던 산직리산성의 석축 흔적들. 3개 영 중 가운데 진영이다.

우진영인 모촌리산성은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 류 원장님과 최전선 3영을 두루 돌고 계백 장군이 지휘했던 건너편 황산성(黃山城)으로 향했다. 이 산은 황산(黃山)인데 산 밑 마을이 관동리(官洞里)다. 이 관동리는 관창이 두 번이나 잡혀 목이 베인 동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계백 장군이 잡혀 온 관창의 투구를 벗겨보고 깜짝 놀랐다. 열여섯살 앳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계백은 탄식했다. "신라는 소년이 이러한데 장사들은 어떠할까" 계백 장군이 전장터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산기슭을 휘감아 오르는 길은 좁은 임도였다. 차 한 대 지날 수 있는 정도의 길로 중간중간 비포장길이었다. 중턱에 차를 세우고 이제 험한 경사를 걸어서 올라야 했다. 마른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원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숨을 헐떡이며 오르는 재미도 쏠쏠했다. 원장님은 논산과 논산사람들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언제 날 잡아 그런 이야기도 더 많이 듣고 싶습니다" 했더니 "그러자"고 하셨다.

한참 오르니 숙영지로 보이는 넓은 터와 산성의 석축이 있었고 가운데에는 동그랗게 패인 꽤 큰 우물도 남아있었다. 성의 석축은 많이 무너지기도 했다. 이 곳은 황산벌전투 이전부터 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계백 장군이 참전하면서 지휘부로 사용했다고 한다.

황산성의 이모저모. 황산성 비석, 계백의 지휘부였던 정상 장대지터, 우물, 황산성 석축(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좀 더 오르니 자그마한 정상이다. 여기가 계백 장군의 지휘부가 설치됐던 장대지다. 앞쪽을 내려다 보니 저 아래 황산벌과 그 앞에 좌군영, 중군영, 우군영이 나란히 배치돼 신라군의 진격을 한 눈에 볼 수 있었고, 그래서 계백은 여기서 각종 전술전략을 지휘했을터다.

이 산 뒤쪽으로는 능선을 타고 계룡산으로 이어진다. 이 장대지에 지금은 이름 모를 무덤이 하나 있다. 주변엔 석축이 남아있었다.

하산하면서 류 원장께서는 이 황산성도 아직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지표조사단계인데 장차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면 새로운 역사서에 오를 만한 소재가 있을 지 주목된다.

황산성에서 바라본 황산벌. 그 너머 산이 백제 좌-중-우 진영 산성이다. 가운데 멀리 높은 산이 대둔산이다.

류 원장께 여쭤봤다.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이런 곳에 저 처럼 찾아오는 사람 있습니까?" 류 원장께서는 역사에 관심있는 단체 등에서 가끔 답사온다고 했다. 그 말씀에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쓸모있는 곳'을 찾아왔구나 하는 안도 때문이었을까.

필자가 황산벌을 찾은 건 3월 초 꽤 추운 날이었다. 멋진 관광지나 번듯한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 역사현장도 아닌 황량한 산과 벌판만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단 한 사람, 계백의 흔적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두 마음 먹지 않은 장수, 오로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무사정신을 기리며 더듬어 가보는 여행이었다.

편한 관광지가 아닌 품을 팔아서 험한 길을 걷는 이런 '아날로그식 여행'이 때론 더 감성적일 때도 있다................................. ■ 계백 장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 어려운 여건의 전쟁에 임하면서 자신의 가족 목숨까지 직접 거두고 전장터로 향한 계백, 임금과 국가에 대한 그의 충혼이 후세에도 크게 귀감이 돼 왔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내린 계백 장군에 대한 평가를 보자.

최부(1454~1504)는 "백제가 망할 때 단 한사람의 충의가 없었는데 오직 계백만이 절개를 지켜 두 마음을 갖지 않았다" 고 극찬했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은 "강산이 무너져 의지할 곳 잃고 대군은 밀고 오는데 계공(階公)이 5천 약졸로 슬픈 마음으로 나아갈 때 먼저 처자를 죽이고 필사적으로 임할 것을 마음 먹었다" 며 "비록 옛 열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장할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이민성(1570~1629)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짧은 순간 그는 죽을 각오를 다했다" 이어 "비록 힘이 다해 죽었지만 그 뜻은 오로지 보국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조선초 성리학자 권근(1352~1409)은 '삼국사절요'에서 혹평했다. 그는 처자식을 먼저 죽인 것에 대해 "광패하고 잔인하다"고 한 뒤 "싸우기 전에 이미 패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관창을 살려보내고 패전했어도 항복하지 않고 순절한 것에 대해서는 무사정신을 드높였다고 칭찬했다.

이에 대해 안정복(1712~1791)은 권근을 직접 비판했다. 안정복은 "나라가 망할 형세에 있었고 자신의 몸은 반드시 죽을 결심에 있었다"며 "장수가 되는 도(道)는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라야 병사들의 죽을 각오를 얻을 수가 있는 법"이라며 권근이 계백을 모를 뿐 아니라 병법도 몰랐다고 몰아쳤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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