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있는 명소] 계백의 그곳② 황산벌㉮--김유신과 세기의 대결, 1400년 전 그 날

2013. 4. 18.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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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의 그곳① 고향마을'편에서 계속)

[헤럴드경제=논산]660년 7월9일, 혈혈단신 병사가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적진의 벌판 속으로 뛰어들었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병사 여러 명을 무찌르고 결국 에워싸여 붙잡혔다.

계백 장군 앞에 끌려온 이 병사는 신라 화랑 관창(官昌)이었다. 용맹스런 병사는 16살의 앳된 소년. 계백은 탄식했다. "신라에는 소년 조차 이러하거늘 장사들은 어떻겠는가"

계백은 죽음을 무릅쓰고 대치한 전장터에서 이 병사를 살려보냈다. 살아돌아온 관창은 화가 나 손으로 우물 물을 움켜마시고 다시 뛰쳐나가 싸웠다. 계백은 이번에는 목을 베 말 안장에 실어 보냈다. (삼국사기 열전 관창ㆍ계백 편)

백제 계백 장군의 신라 김유신(金庾信) 대장군과 국운을 건 일생일대 결전, 황산벌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황령산성에서 내려다 본 황산벌.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10일 백강(금강)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날짜에 맞추느라 갈 길이 급한 김유신은 산악지대가 끝나고 들판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황산벌에서 강력한 저지선 계백을 마주친 것이다.

황산벌전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두 영웅의 전술은 '3도(道) 3영(營)'으로 맞섰다. 김유신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눠 진격했다. 산악지대에서 벌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평지와 계곡길 이렇게 세갈래였다. 김유신이 이 길을 택한 건 소정방의 약속기일에 맞춰 갈 수 있는 최단코스이자 평지에 가까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대둔산의 북쪽 기슭인 지금의 논산시 벌곡면에서 세갈래로 나뉘었다. 먼저 도착한 계백은 이 길목 3곳에 미리 3영의 진을 치고 있었다.

계백 장군은 황산벌(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일대)을 등에 지고 황령산성에 좌군 진영, 산직리산성에 중군 진영, 모촌리산성에 우군 진영을 각각 배치했다.

필자가 현장을 두루 답사한 결과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진산의 탄현을 통해 황산벌로 진격하는 신라군은 논산 벌곡에 와서 세 갈래 길로 나누는데 이에 맞선 백제군은 산성에 진을 쳤다는 것이다. 약속시간이 촉박한 김유신이 굳이 산성에 올라가 백제군을 격퇴시킬 필요까지 있었을까. 평지를 따라 진격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일부 학자들도 산성이 아닌 벌판 내 지형지물을 이용해 3영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황산벌 내에서는 5천 병사가 5만을 막을 마땅한 지형지물이 없었다. 아마 산 위의 산성과 아래 진입로 입구를 아우르는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계백 장군은 그리고 자신의 지휘부는 황산벌을 가로질러 북쪽 황산(黃山)의 황산성에 두고 한 눈에 내려다 보며 총지휘를 했다. 계백이 마지노선으로 진을 친 이 3영(營)이 뚫리면 백제 수도 사비(부여)까지는 평지로 한걸음에 내달릴 수 있다.

황산벌전투 전개도.

백척간두의 백제, 전력은 김유신 5만 대 계백 5천 병사다.

말년에 무기력함을 보였던 의자왕은 당과 신라가 이미 백강과 탄현(금산 일대)을 지났다는 급보를 받고 장군 계백에게 5천의 군사를 내주며 황산으로 가서 신라군을 물리치게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

왕명을 받은 계백은 "당과 신라의 많은 병사를 당해내려니 나라의 존망을 알기 어렵다. 내 처자식이 붙잡혀 노비가 될까 두렵다. 살아서 치욕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마침내 가족의 목숨을 직접 거두고 전장으로 향했다. (삼국사기 열전 계백 편)

황산벌에 먼저 도착한 계백은 3개의 진영을 설치하고 병사들에게 용기를 심어줬다. "옛날 월나라 구천(句踐)은 5천의 군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물리쳤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분발, 승리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삼국사기 열전 계백 편)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전략적 요충지 탄현에서 길목을 차단했어야 했지만 백제 조정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신라군은 이미 통과해 숫적으로 적은 백제가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전황이었다.

백제땅으로의 진격 과정에서 김유신은 9일 처음으로 이 황산벌 앞에서 백제군의 강력한 방어망과 대치한 것이다. 내일이면 백강 어느 포구(강경 추정)에서 소정방과 합류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발목이 잡혔다.

백강 하구에서 사비를 향해 올라오는 소정방의 13만 당군에게 신라군이 식량 등 보급품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양국 간 전투 수행 약속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김유신은 3개의 길목에서 막히면서 초반 네 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 신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과거 100년 간 백제와의 수많은 전투에서 많이 패한데다 서라벌에서 남천정(南川停ㆍ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간 후 다시 내려와 황산벌까지 두 달 가까이 행군했으니 신발도 제대로 없던 당시 병사들의 피로는 극에 달했던 것.

신라군이 이천으로 간 이유로는 여러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6월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도착한 당나라군과 접선하기 위함과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이동임을 백제에 보여주는 전술이 함께 있었다.

무열왕 김춘추는 이천에 도착해 자신의 아들 법민(훗날 문무왕)을 덕물도로 보내 소정방과 전략을 논의케 했고 다시 남하, 금돌성(상주)에서 머물며 김유신과 법민에게 5만 병사로 백강으로 곧장 향하게 했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백제멸망의 시점을 기다렸다. 김춘추가 서라벌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사비성이 함락되면 곧장 합류할 계획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백제가 7월18일 항복한 후 김춘추는 사비로 가서 8월2일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의 술잔을 받았다.

상주 금돌성은 백제 사비성과 비교적 가까운데다 소정방의 13만 병사를 지원할 곡식이 풍부한 평야를 갖고 있는 지역이어서 본격 출정의 중요한 시발점으로 보인다. 이 전쟁의 성격이 신라로서는 이번 기회에 백제멸망이 목표였지만 주력 공격부대는 당나라군이었고 신라군은 당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멀리 벌판 뒤쪽 산이 계백의 지휘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황산성이 있는 황산.

초반 네 번 패배, 김유신은 획기적인 반전이 절박했다. 반굴과 관창 어린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이 신라군의 극적 전략전술이었던가. 반굴(盤屈)은 김유신의 조카다. 동생 흠춘 장군(欽春ㆍ흠순이라고도 함)의 아들이었다. 관창은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었다.

흠춘이 아들 반굴에게 말하기를 "신하에게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에게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두가지를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들었습니다" 하고 곧장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편)

품일이 아들 관창에게 말하기를 "네가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다. 오늘이야 말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쏘냐" 하자 관창은 "그렇습니다" 하고 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스듬히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관창 편)

'장군의 아들'을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게 한 것은 결국 '전쟁의 제물'이었던가.

대장군 김유신의 조카 반굴과 16살 소년 부장 관창의 베인 목을 본 신라군은 일시에 비분강개해 뜻을 다지고 북을 치며 함성으로 진격하자 백제가 크게 패했다.(삼국사기 열전 관창 편)

계백은 초반 네 번을 싸워 모두 이겼지만 병사가 적고 힘이 다해 마침내 패배했다. 계백은 그곳에서 전사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

계백은 전사했지만 동참한 고위관료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 등 20여명은 사로잡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편) 그런데 충상과 상영은 신라로부터 벼슬을 받아 후에 백제부흥운동군과 고구려군을 격퇴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을 투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목숨을 던진 계백과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황산벌전투, 역사의 기록(삼국사기)은 그러했다. 그런데 전투는 9일 시작됐고, 반굴과 관창 그리고 계백은 전사했다. 김유신은 소정방과 만나기로 한 날짜보다 하루 늦은 11일 합류해 소정방이 격노한 것으로 볼 때 황산벌전투는 결국 9~10일 이틀간 치뤄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 날의 전투상황을 상상하면서 '황산벌에서의 전투가 어떻게 전개됐을까'가 가장 궁금했다. 그 현장과 전황을 그려보고 싶어 논산 황산벌로 떠났다. 계백은 역사의 무대에 짧게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우리 역사상 충과 호국의 표상으로 길이길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 황산벌 근처에는 백제군사박물관도 있어 어느 정도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자는 출발하기 전 미리 훌륭한 스승 한 분을 찾았다. 휴일임에도 논산문화원의 류제협 원장(67)께서 기꺼이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아침 9시에 황산벌 근처 백제군사박물관에서 류 원장님을 만났다. "1400년 전 역사의 현장, 공부하러 왔습니다" 하고 인사드렸더니 인자하신 류 원장님은 새벽부터 서울서 내려온 필자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셨다.

논산시 부적면에 소재한 백제군사박물관. 황산벌 근처에 자리해 있다.

류 원장님과 답사스케줄을 논의했다. 우선 계백 장군의 동상과 묘소, 충장사를 둘러보고 3군 진영과 황산벌, 그리고 계백 장군의 사령부였던 황산성을 답사키로 했다.

황산벌 일대에는 피비린내 난 전장터였음을 상징하는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계백 장군 묘소 주변은 가장(假葬)골이다. 장군이 전사하자 유민들이 시신을 이곳에 가매장했다 해서 생긴 지명이다. 또 계백 장군의 목이 떨어진 산을 수락산(首落山)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웃에는 시장(屍葬)골도 있다. 넘쳐나는 병사들의 시신을 매장했다는 곳이다. 산직리산성 아랫동네에는 승적(勝敵)골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이는 적을 물리친 곳이라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아마 신라군이 백제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의미로 불러온 것 같다.

벌곡면 한삼천리 일대의 내천은 당시 세 골짜기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흘린 피와 땀이 냇물을 이뤘다 해서 한삼천이라 불렀다. 현장을 돌며 이러한 지명을 들으니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날의 아우성,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듯 했다.

(' 계백의 그곳② 황산벌

㉯'로 계속

)………………………… ■ 탄현은 어디?: 백제 말기 의자왕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귀양 간 충신 성충과 흥수는 장차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예견했고 그 최적 방어선을 신라군은 탄현, 당나라군은 기벌포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충신이 쫓겨난 조정엔 간신들이 득세했고 자신들의 입신양면에만 빠져있던 간신들은 귀양간 신하가 하는 말을 믿지 말 것을 의자왕에게 건의하면서 왕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충신들이 주장한 탄현은 어디일까. 탄현(炭峴)은 '숯고개'를 뜻하는 지명으로 충남, 전북 일대 여러곳에서 유사한 지명이 있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전, 옥천, 금산, 완주 일대에 무려 8곳 내외가 탄현으로 거론될 정도다.

황령산성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본 대둔산. 신라 김유신 장군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탄현이 이 근처에 있다.

하지만 서라벌(경주)→남천정(경기도 이천)→금돌성(경북 상주)을 거쳐온 신라군이 강경 부근에서 당나라군과 합류하기로 한 것으로 볼 때 그 이동경로 상 충남 금산군 진산을 탄현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는 주장이 많다. 이 험로는 대둔산의 북쪽 계곡을 통해 논산시 벌곡면에서 황산벌로 이어지는데 이 길로 부여의 남쪽 강가로 나아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 백제군사박물관

: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계백 장군 유적지 내에 2004년 설립한 것으로 백제시대의 유물은 물론 당시 군사문화도 체험할 수 있게 꾸며놓아 올바른 국가관 확립과 호국정신을 키우는 역사, 문화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백제군사박물관 공원. 논산시 부적면에 있다.

박물관 건물 주변에는 계백 장군의 묘소와 동상, 충장사, 황산루, 4D 영상관, 국궁체험장, 승마체험장, 자연생태 학습장 등이 있고 들어가서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잔디광장이 있어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다.

논산시 부적면 충곡로 311-54에 있다.

인근에는 국내 두번째로 큰 저수지 탑정호가 있고 관촉사, 개태사, 대둔산 등 명소들이 즐비하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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