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선 시와 그림도 서로 닮는다

2013. 4. 3. 17:1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인 이생진의 제주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술을 마실 때에도 바다에 가서 마신다/ 나는 내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1' 중에서)

이생진 시인만큼 제주도의 서귀포 바다를 사랑한 사람도 없다. 연작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비롯해 바다를 주제로 남긴 이생진의 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그는 '바다를 찾는 이유'에서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모두 버리러 왔다'고 고백했다. 나이와 이름조차 버리고 싶다는 시인의 바다는 제주도 동쪽에 위치한 성산포.

성산포는 바다 빛깔이 아름다운 항구로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그리고 노란 등대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시인이 무시로 올랐던 성산일출봉은 99개의 바위봉우리가 원형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분화구를 둘러싼 모습이 거대한 성과 같아 성산이라 하고 해돋이가 유명해 일출봉으로 불린다.

성산일출봉을 오르면서 보이는 우도는 섬 속의 섬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큰 부속섬. 시인은 이곳에서 본 우도를 보고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고 노래했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우도(牛島)는 성산포에서 3.8㎞ 거리. 가랑잎이 쪽빛 바다에 떠있는 가녀린 모습이지만 성산포항에서 배를 타고 우도항에 발을 디디면 섬 속의 섬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섬 둘레가 17㎞인 우도는 애써 비경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유채꽃 만발한 밭담 사이를 터벅터벅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다 만나는 그곳이 바로 한 달만 살고 싶도록 아름다운 시인의 섬이기 때문이다.

우도팔경 중 하나인 서빈백사(西濱白沙)는 동양에서 유일하게 백사장이 홍조단괴(紅藻團塊)로 이루어진 해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띠는 모래를 보고 시인은 '파도에 부서진 영혼의 분말'이라고 노래했다. 옥색에서 크리스털 블루색으로 짙어가는 물빛과 백사장을 걸으며 밀어를 나누는 연인들 모습은 한 폭의 그림.

우도를 한눈에 감상하려면 검멀래에서 우도등대가 있는 우도봉(132m)까지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섬에서 가장 높은 우도봉에 오르면 발 아래로 유채밭과 마늘밭을 둘러싼 밭담이 정겹게 펼쳐지고, 에메랄드색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과 한라산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우도를 응시한다.

우도봉 정상의 등대공원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1906년에 세워져 97년 동안 불을 밝힌 옛 등탑은 은퇴한 노인처럼 묵묵히 추억을 반추하고, 빨간색 지붕이 인상적인 16m 높이의 새 등탑은 홀로 멸치잡이 어선의 어화가 꽃처럼 피어나는 우도의 밤바다를 지키고 있다.

성산일출봉의 해돋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사실 성산일출봉이 아니라 광치기해변이다. 제주올레 1코스의 끝점이자 2코스의 시작점인 광치기해변은 썰물 때 광활하게 드러나는 암반지대에 이끼가 붙어 초록융단을 펼쳐놓은 듯 황홀하다.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광치기해변은 제주 말로 '넓은 바위'라는 뜻. 하지만 옛날에 거친 바다에서 조난당한 어부들의 시신과 부서진 뗏목 조각들이 해변으로 떠내려 오자 마을 사람들이 관을 가지고 와 시신을 수습하던 곳이라 해서 '관치기'라 부르다 제주도 사투리의 강한 억양 때문에에 '광치기'가 됐다는 말도 전해온다.

이른 아침 실루엣으로 가라앉은 성산일출봉과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물질하는 해녀는 한 편의 시이자 한 폭의 그림. 시인이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고 반문하면서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고 권한 곳은 바로 광치기해변이 아닐까.

화가 이중섭의 제주바다

'바람아 불어라/ 서귀포에는 바람이 없다/ 남쪽으로 쓸리는/ 끝없는 갈대밭과 강아지풀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아내가 두고 간/ 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가도 가도 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바람아 불어라'(김춘수의 '이중섭·3')

'흰소'로 유명한 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은 비록 짧지만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갔다. 캔버스와 붓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그림을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을 전전하며 지인들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생활고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다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홀로 숨을 거둔 후 무연고 시신으로 방치되기도 했다.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공부까지 했던 이중섭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문. 일본 유학 시절에 사귄 야마모토 마사코와 해방 직전 원산에서 결혼한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부산을 거쳐 1951년 1월에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피란생활을 시작한다.

손바닥만한 방을 빌려 네 식구가 살던 서귀포에서의 1년은 이중섭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섶섬을 비롯해 서귀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틈만 나면 아이들과 함께 자구리 포구에서 게를 잡으며 놀았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과 '서귀포의 환상' 등이다.

올레길 6코스에 위치한 이중섭의 거주지는 이 마을 반장 송태주의 작은 초가집.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부엌과 한 평 조금 넘는 단칸방에서 그는 서귀포의 바다를 은박지에 옮겼다. 손바닥만한 작은 솥 두 개가 살림의 전부였던 부엌 안 단칸방에는 이중섭의 사진과 그가 지은 유일한 시 '소의 말'이 한지에 적혀 붙어 있다.

이중섭 주거지 옆에 조성된 이중섭공원에는 '섶섬이 보이는 풍경'의 소재가 된 수령 200년 안팎의 팽나무 두 그루가 당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이중섭의 동상 옆에는 '서귀포의 환상' 모티브가 됐을 수령 100년 넘은 밀감나무 두 그루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중섭공원과 연결된 언덕 위의 건물은 이중섭미술관. 은지화로 그린 작품 '게와 가족' 등을 비롯해 '꽃과 아이들'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 등 모두 11점의 원화가 전시돼 있다. 작품들 사이에는 이중섭이 아내와 주고받은 일본어 편지 서너 점도 보관되어 있다.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를 '남덕'이라 칭하고, 그녀는 남편을 '아고리'(발가락이라는 뜻)로 불렀다. 일본과 한국에서 주고받은 편지에는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할 절절한 사연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중섭미술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해 11월에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93)씨가 현해탄을 건너와 기증한 팔레트 한 점.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색색의 물감이 생생한 이 팔레트는 이중섭이 1940년대 초 일본에서 활동할 때 연인이었던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증표로 맡겼던 것.

이중섭미술관과 이중섭 거주지 옆에는 작은 언덕을 따라 이중섭거리가 조성돼 있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까지 연결된 360m 길이의 거리에는 이중섭의 작품을 모티브로 공예품을 만드는 작은 공방, 아담한 카페와 꽃집 등이 이어져 마치 외국의 거리를 걷는 듯하다. 특히 전봇대처럼 길 양쪽에 세워진 이중섭 작품 수십점이 눈길을 끈다.

이중섭미술관에서 이중섭거리와 서귀포칠십리시공원, 자구리해안을 거쳐 소암기념관까지 4.9㎞ 구간은 서귀포에 둥지를 틀었던 작가들의 흔적을 더듬는 '작가의 산책길'.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자구리해안에는그가 가족을 그리워하며 종이에 '게와 아이들'을 그리는 거대한 설치미술품이 세워져 아내와 아들이 살고있는 일본땅을 바라보고 있다.

서귀포=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goodnews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