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맏형·반미의 선봉' 차베스는 누구

2013. 3. 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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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5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핍진한 현실에서도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투지와, 이를 막는 걸림돌엔 힘껏 싸워 저항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 격렬한 삶은 그에 대한 평가에서도 명암이 뚜렷했다. 베네수엘라의 빈민과 노동자 계층에 광범위한 복지혜택을 주는 사회민주주의적 이상은 중산층과 부유층의 반발에 부닥쳤고, 가난에 허덕이고 분열된 남아메리카를 정치적·경제적으로 한데 묶어 서구 자본주의 질서에 대항하자는 구상은 완성되지 못했다.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하나 한편으론 즉흥적인 정책결정 방식, 방만한 정부재정 운영, 인권과 언론탄압 등도 사후 재평가될 대목들이다.

 차베스는 평생 19세기 남미의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자신의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1954년 베네수엘라 바리나스주에서 가난한 교사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17살에 수도 카라카스의 군사학교에 입학한 뒤, 일찌감치 남미의 통합, 교육과 복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볼리바르의 철학에 심취했다. 임관 뒤엔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77년 군대 내에 혁명운동그룹을 창립한 뒤 5년 뒤엔 이를 좀더 체계화한 볼리바르혁명군(EBR-200)을 만들었다.

 1980년대 말 베네수엘라는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사회복지예산 삭감,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잔인한 탄압 등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중령 계급장을 단 야심가였던 차베스는 1992년 볼리바르 혁명군을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항복하면서도 "단지 지금 여기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며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는 차베스의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년 뒤 옥에서 나온 그는 쿠데타에서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방향을 돌리고, 1997년 정당 '제5공화국운동(MVR)'을 만들어 이듬해 대선에 출마했다. 기존의 정치를 뒤엎고 새 판을 짜자며 광범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그의 정열적인 모습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56.2%의 득표율로 승리한다.

 1999년 취임한 차베스는 파격적인 사회복지 정책을 펼쳤다. 식료품값을 낮추고 무상 의료, 무료 접종, 문맹 퇴치 정책을 실시했다. 국민들과의 대외접촉을 늘리기 위해 일요일마다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시민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슈를 토론하고 춤추고 노래했다. 1999년 헌법 개정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한 차베스는 2000년 재선에 성공한 뒤 외국자본이 소유한 석유회사를 국유화해 채굴·정유산업의 50%를 국영회사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2002년엔 반대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차베스 지지자들의 시위가 맞불을 놓으면서 회생했다.

 2005년 그는 중국·소련의 사회주의와 다른, '21세기 사회주의'를 새로운 이념으로 내세우고, 평등·정의·연대를 호소했다. 세계 최대 석유매장국이자 4위 석유수출국인 베네수엘라 정부는 쿠바,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가난한 중남미 국가들에 석유를 값싸게 공급하며 적극적인 '석유외교'를 펼쳤다. 2000년 무렵부터 남미 곳곳에서 좌파정부가 탄생하자, 차베스는 흐뭇해하며 '핑크 타이드'를 성원했다. 반면 미국과는 각을 세웠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에 대해 "또다른 테러로는 테러를 이길 수 없다"며 맹비난했고, 미국이 적대시하는 이란, 리비아 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난해 10월 네번째 대선에서 마흔살의 젊은 야당 후보 엔리케 카프릴레스와 맞붙어 승리했으나, 2011년 찾아온 암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쿠바에서 네번째 수술을 받은 이래 그는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고국 베네수엘라로 돌아온 지 보름만에 눈을 감았다.

 차베스가 사라짐으로써, 그가 꿈꿔온 볼리바르 혁명도 미완으로 그치게 됐다.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003년 62.1%에서 2011년 31.9%(세계은행)로 극적으로 낮아졌지만 인플레이션, 원유값 인상, 재정적자 급증, 통화정책 실패가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곤 선심성 정책을 남발해 정부 지출이 30%나 늘어났다. 베네수엘라는 부족한 재원을 중국은행들로부터 대출받으며 버티고 있다. 무엇보다 볼리바르혁명의 물적 토대인 석유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약속하지 못한다. 차베스가 눈앞의 인기와 성과에 급급해 지나친 석유의존도, 저성장, 비효율, 연구·개발의 저투자 등 중장기적인 과제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볼리바르혁명의 깃발아래 뭉쳤던 중남미 국가들도 차베스식의 과감한 석유 원조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결속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21세기 남미의 역사는 '차베스 이전'과 '차베스 이후'로 나뉘어 서술될 것이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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