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김종훈, 대통령 만류까지 뿌리친 이유

남승모 기자 2013. 3. 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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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가 4일 내정자직을 전격 사퇴했다. 지난 달 17일 미래부 장관에 내정된지 보름만이었다. 미래부 기능 조정이 핵심인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간 줄다리기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가운데 나온 사퇴 선언이어서 파장은 더욱 컸다.

김 내정자는 가난한 이민 1.5세대 출신으로 획기적인 통신장비를 개발해 30대 때 미국 400대 부자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지난 1992년 벤처회사 유리 시스템즈를 세운 이후 IT 업계의 혁신가로 인정받았다. 또 지난 2005년에는 노벨상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한 벨 연구소의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새 정부의 핵심 조직으로 김 내정자 영입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았던 터라 김 내정자의 사퇴는 여야의 정부조직법 개정안 협상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불러왔다.

◈ "조국 헌신의 꿈 접으려 한다"

김종훈 내정자는 국회 기자회견장을 찾아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말문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창조경제에 달려 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 공감해 미국에서 일궈 온 모든 것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미래부를 둘러싼 정부조직 개편안 논란과 여러 혼란상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꿈도 산산조각나고 말았다고 밝혔다.

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고 일주일이 지나고 지난 3일에는 대통령이 제안한 여야 영수회담이 무산되는 걸 보면서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다며 대통령 면담조차 거부하는 야당과 정치권의 난맥상을 지켜보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던 마음을 지켜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김 내정자는 마지막으로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의 미래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꿈꾸는 창조경제가 절대적으로 이루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부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치권과 국민 여러분이 힘을 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 한국 정치의 벽? 현실 정치의 벽?김종훈 내정자의 사퇴는 일단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정치권의 공방 속에서도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정부조직법 개정안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본인도 사퇴를 결심한 배경으로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미래가 걸려 있는 중대한 시점에서 국회가 움직이지 않았다"며 정치권을 직접 겨냥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미국식 사고에 익숙한 그가 정부조직법 개편안 처리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적 정치 풍토'를 보면서 설사 자신이 미래부 장관에 취임한다해도 대결적 정치 구도를 뚫고 장관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을 것이란 해석도 제기됐다.

장관 인사 청문회라는 현실 정치의 벽이 김 내정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냐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김 내정자는 청문회 준비 과정에서 다른 장관 후보자들이 재산 문제 등에 해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쉽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청문회 준비팀에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내정자는 특히 사퇴 하루 발표 하루 전 무려 1시간에 걸친 박근혜 대통령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심을 돌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설득까지 뿌리친 걸 보면, 한국 정치의 벽이 됐든, 현실 정치의 벽이 됐든 효율성을 중시하는 IT 업계 출신의 김 내정자에게 '정치라는 벽'이 쉽지 않은 장애물이었던 걸로 보인다.

◈ 정치적 이유가 전부였을까김종훈 내정자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싼 혼란을 사퇴 이유로 들었지만 일각에서는 정치적 이유가 전부는 아닐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래부 장관 내정 이후 제기된 각종 의혹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김 내정자는 미국 중앙정보국, CIA 비상근 자문위원으로 재직한 전력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과거 미국 해군이 발행하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완전한 미국인이 됐다"라고 한 사실과 한국을 "닳아버린 국가"라고 언급했다는 의혹도 논란을 가중시켰다.

야당에서는 김 내정자와 배우자, 장인, 처남 등의 명의로 된 강남의 상가 빌딩에 대해 투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 시민권 포기에 따른 국적포기세 부과와 미국 내 막대한 재산 정리 등도 부담이 됐지 않았겠냐는 관측도 나왔다.

김종훈 내정자가 왜 사퇴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하지만 정부조직법 개정안 타결이 임박했던 점,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 설득에 나섰는데도 끝내 결심을 돌리지 않은 점 등을 볼 때 사퇴 이유가 전적으로 국내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힘든 측면이 있다.

또 하나, '조국을 위해 헌신'할 생각이었다고 몇 차례나 강조해놓고도 정작 장관직은 시작도 해보지 않은 채 대통령의 만류까지 뿌리치면서 사퇴한 것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면서 일할 여건이 되질 않아 떠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설사 김 내정자의 사퇴가 일부 개인적 사정에 기인했다 해도 타협을 모르는 국내 정치의 대결적 구도가 외국에서 활동하는 우수한 인재들의 귀국을 막는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 선진화가 못내 아쉬운 이유다.남승모 기자 smna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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