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시대]상복 입고 나온 청와대, 33년만에 귀환

강세훈 2013. 2. 24.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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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강세훈 기자 = 1979년 11월 21일 오전 10시30분.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하늘은 잔뜩 흐려있었다. 검은 투피스 상의(喪衣)를 입은 두 영애는 본관 접견실에 마련된 아버지 상청(喪廳)에서 영정 봉안제례를 지냈다. 분향이 진행되는 동안 작은 영애는 언니의 등에 머리를 파묻고 흰 손수건으로 고이는 눈물을 닦아내기도 했다.

본관 문을 나선 두 영애는 뜰 앞에 모여선 비서실 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큰 영애는 16년 동안 정들었던 청와대 뜰을 한동안 바라본 후 발걸음을 옮겼다. 흐느끼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떠나던 큰 영애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작별의 목례를 보냈다. 끝내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 딸로 청와대를 나왔던 그가 33년 3개월 만에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 잔디를 다시 밟게 된다.

◇출생에서 학창 시절까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6·25 전쟁 중인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제1정보과장(소령)이었고, 어머니 육영수는 '옥천 부자'로 알려진 육종관씨의 둘째 딸이었다. 두 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란 박근혜 당선인은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다녔다. 박 당선인이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1년 아버지인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1963년 5대 대통령이 됐다. 박 당선인은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성심여중에 입학하면서 뒤늦게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고, 중2 때 실시한 지능지수(IQ) 검사에서는 127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어머니 육영수는 역사를 전공하길 희망했지만 "산업역군이 되어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이공계를 선택했다고 한다. 박 당선인은 서강대 이공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대학 4년 평균 평점은 4점 만점에 3.82로 알려졌다.

◇아버지 옆 지킨 퍼스트레이디

박 당선인은 1974년 대학을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길에 올랐다. 교수가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육영수 여사가 저격을 당해 숨지자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22살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돼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워야 했다. 박 당선인은 1979년까지 5년간 퍼스트레이디로서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외국사절을 맞이했다.

그는 이 당시를 "비록 제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때부터 저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18년간의 은둔생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지면서 박 당선인의 삶은 다시 한 번 큰 굴곡을 맞게 된다. 박 당선인은 10월 27일 새벽 1시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에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11월 21일 청와대 생활을 접고 동생들과 함께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에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300평 규모의 서울 성북동 주택을 받아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이후 사실상 은둔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절 그는 사람에 대한 실망감에 괴로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대외적으로 드러난 행적도 많지 않다. 주로 육영재단과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 정수장학회 운영에 몰두했다.

그러나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싸고 동생들과 치열한 다툼이 시작됐고 나중에는 폭력사태와 5촌 조카 살인사건 등까지 발생하면서 잡음이 일기도 했다.

◇IMF 계기로 1998년 정계입문

박 당선인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다.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후보 대선캠프 고문을 맡으며 정치계에 입문, 이듬해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지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는 2002년 정치·정당개혁 차원에서 총재직 폐지, 당권 분리 등을 요구하며 당시 당 총재이던 이회창과 마찰을 겪었다. 결국 그해 2월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2002년 5월12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1시간 동안 단독회담을 했다. 새누리당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정치인은 박 당선인이 유일하다.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뒤이어 차떼기 사건 수사에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까지 겹쳐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졌다.

박 당선인은 위기에 처한 당의 새 대표로 뽑혀 구원투수로 나섰다. 취임 직후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에 천막을 치고 당사로 삼은 이른바 '천막당사' 시대를 열고, 당 쇄신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4·15 총선에서 121석을 얻으며 당을 기사회생시켰다. 이때부터 박 당선인은 잠재적인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친이-친박 갈등 딛고 구원투수로

그러던 박 당선인은 또 한 번 정치인생에 큰 시련을 맞게된다. 2006년 5월 20일 서울 신촌로터리 지방선거 유세 도중 피습을 당해 커터칼에 오른쪽 빰이 11㎝나 찢어진 것. 큰 상처였지만 그는 병원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 지지층을 단결시켰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열세였던 선거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지만 치열한 당내 분위기 속에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석패했다. 그는 경선방식 등 논란에도 불구하고 깨끗이 승복하고 대선에서 이명박 지원유세에 나섰지만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정면출동했다.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가 대거 탈락하자 '친박연대'가 등장하며 친이-친박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박 당선인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친이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후 친박계 정치인들의 한나라당 복당을 꾸준히 요구, 친박계 60여명의 복당을 관철시켰다.

4년간 와신상담하던 박 당선인은 2011년 말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당이 어려움이 처하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다시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체질개선에 나섰고 4·11 총선에서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했다. 그의 별명대로 '선거의 여왕'임을 다시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당내 경선을 통해 84%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확정됐고,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는 25일 취임식을 통해 제18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면 박근혜 정부 시대가 마침내 열린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kangs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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