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있는 명소] 부소산성--'백제멸망의 진실' 의자왕은 알고있다

2013. 1. 3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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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부여]서기 660년 7월 13일 몹시 무더웠던 밤, 백제 마지막 국왕은 야반도주하듯 전 도읍지 웅진성으로 몸을 피했다.

18만 나당연합군이 자신의 사비도성을 포위, 함락되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였다. 마침 의자왕이 피신하자 마자 왕자가 지키던 왕궁은 접수됐다.

그리고 꼭 닷새 후 7월18일, 의자왕은 사비로 돌아와 나당연합군 사령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700년 백제 사직, 마침내 그 '간판'을 내린 암울했던 그 현장, 135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자리에 섰다. 부여 부소산성이다.

독야청청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그리 높지도 않은 부소산은 그냥 공기좋고 인심 넉넉한 고장의 뒷산 처럼 보였다. 주민들은 새벽, 낮, 저녁 할 것 없이 산책으로 자주 찾지만, 여행자들에게 이곳은 슬픈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나도 한 국가 패망의 오욕을 집어삼킨 그 현장임을 염두에 뒀기에 달려올 수 있었다.

백마강 건너서 바라본 부소산. 강 바로 위 고란사와 오른쪽으로 낙화암이 보인다.

부소산성, 이 네 글자에는 항상 의자왕, 삼천궁녀, 낙화암이 따라다닌다.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솔깃한' 이야깃거리라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라도 기억해주는게 고마운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백제는 패망 직전까지 무릇 100년간 신라를 공격해 괴롭히다 결국 신라(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했기 때문에 당시 동북아 최강의 국가다운 찬란한 문화와 역사가 모두 가려져 왔다. 파괴되고 땅에 묻혔다. 그래서 지금도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올 만큼 백제의 역사는 자고나면 달라지고 있다.

부여를 처음 방문했던 지난해 말 이곳 시인 윤순정 선생님은 필자에게 백제역사는 10년 마다 바뀐다고 했다. 나는 무슨 역사가 10년 마다 바뀌냐고 반문했더니 지금까지는 승자 입장에서 기록됐지만, 잠자던 역사가 깨어나면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해가 갔다. 어느게 좋고 나쁘고를 떠나 역사는 바르게 인식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패망의 군주 의자왕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무한책임은 져야겠지만 한편으론 그도 억울한 누명을 많이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미화하고자 함은 전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의자왕 뒤엔 무려 3000명의 궁녀가 있고 그는 호색가로 대변되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의 이와 관련된 부분이 딱 한 줄 나온다. 의자왕 15년 8월 고구려ㆍ말갈과 연합해 신라 북부 성 30여개를 함락한 후 반년이 지난 무렵 "왕이 궁인들과 음황ㆍ탐락하여 술 마시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전부다. 어느 국왕이든 했을 법한 일, 그들에겐 로맨스였고 패망군주에겐 호색한으로 낙인 찍혀버렸다.

의자왕 하면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심과 형제애가 따라올 자 없었던 해동증자였다. 해동증자로 칭송받던 그가 승리의 자신감에서 긴장감이 풀렸던지 술자리를 즐긴 일이 신하에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다. 이 때 최고 충신 좌평(최고 벼슬) 성충(成忠)이 극간하자 옥에 가두고 굶어죽게 한 것은 의자왕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였다.

부소산 정상의 사자루, 삼충사, 군창지, 궁녀사(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삼천궁녀는 실제 '3000명의 궁녀'가 아니다. 1은 적고 2도 그저그런 수치지만 좀 많으면 3이란 숫자를 쓴다. 거기에 또 '수없이 많다'는 뜻인 '수 천(數千)을 중복으로 붙인 수가 3000인 것. 수도가 함락되면서 적군에게 쫓긴 부여의 남은 '수많은' 여인들이 모욕을 피해 부소산 정상으로 도망쳐 급경사 바위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그 바위는 타사암인데 후에 이 희화한 표현 낙화암으로 변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落花巖(낙화암)'이라고 새긴 붉은 글씨가 전해오고 있다.

나는 '백제금동대향로의 스승' 차선미 선생님과 함께 '백제의 마지막 순간'의 흔적을 느껴보러 부여를 2차 방문, 부소산에 올랐다. 이날도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김선화님께서는 필자에게 줄 '숙제'를 잔뜩 안고 휴일임에도 달려나왔다. 나는 김선화님에게 많은 짐이 됐는데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김선화님에게 의자왕에 대한 최신 재해석 자료(책)를 별도로 어렵사리 구해 탐독하고서야 부소산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다. 이 빚을 뭘로 갚아야 할 지 모르겠다.

부소산, 역사 얘기 빼면 딱 산책하기 좋은 그런 산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차 선생님의 설명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시대 때 솔뫼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아서인데 지금도 오래된 소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물론 이 나무는 백제시대의 나무가 아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 부여는 무릇 이레 간 화염에 휩싸였는데 이 부소산 소나무도 모두 탔다고 한다.

부소산의 소나무 숲길

이후에도 한때 민둥산이던 것을 아랫쪽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리기다소나무(pitch pineㆍ북미 원산)를, 위쪽은 한국 소나무를 심어서 이렇게 자랐다고 한다. 나는 왜 리기다소나무를 심었는지를 따지듯 물었다. 리기다소나무는 빨리 자라기 때문에 민둥산을 얼른 가리려 그랬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그럼 지금이라도 조금씩 교체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마 예산문제가 쉽지 않을거라고 했다.

부소산에 오르다 보니 군데군데 흙더미가 길게 이어진게 보였는데 토성(土城)이라고 했다. 백제의 수도는 외곽의 나성(羅城)과 궁궐의 성 그리고 또 이런 토성까지 겹겹이 방어용으로 갖춘 철옹성이었다.

부여읍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반월루(半月樓)에 올랐다. 반달 모양이란 뜻으로 백제시대 사비도성이 둥글게 휘어진 반달 모양이라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날이 흐릿해서 조망은 좋지 않았다.

부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부여군청 김선화님(왼쪽)과 차선미 선생님(오른쪽)은 백마강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백마강 너머 멀리 부소산이 보인다. 눈 덮인 이 날도 몹시 추운 날씨였다.

우리는 다시 걸어서 정상 사자루(泗泚樓)에 도착했다. 원래 달맞이하던 송월대(送月臺) 터인데 임천군 관아 정문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때 사자루는 사비루(泗沘樓)를 잘못 쓴 글자라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백제의 수도 사비, '비(沘)'로 쓸 것을 '자(泚)'로 잘못 썼다는 얘기다. 한말(1919년) 의친왕 이강(李堈)이 쓴 글인데, 부여문화원에 따르면 삼국사기에는 사비성, 삼국유사에는 사자성이란 기록이 존재해 왔기 때문에 지금 처럼 사자루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낙화암으로 가는 길목 백화정(百花亭)으로 향했다. 이 육각정자는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1929년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세웠다. 바로 아랫쪽이 절벽으로 돼 있고 절벽 아래가 낙화암인데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고 배를 타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대신 백화정 바로 아래에는 백마강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난간이 설치돼 있어 일종의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날도 관광객들이 많이 붐볐다.

낙화암 위쪽 절벽 봉우리에 있는 백화정.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기리기 위한 정자다.

필자가 군데군데 열심히 촬영을 하는 사이 차 선생님도 숨을 고르며 느긋이 지켜봐 주셨다. 다시 걸음을 고란사로 향했다. 고란사(皐蘭寺)는 이 백화정에서 백마강 쪽 경사를 내려가면 강가에 북쪽으로 면하고 있다. 차 선생님은 이 절이 백제시대 때 절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고 했다. 오히려 고려시대의 흔적이 약간 보인다고 했다. 역시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한 절이다.

관심있게 봐야 할 것은 백의불상(白衣佛像)이다. 세 부처님 중 맨 오른쪽 한 분은 하얀 부처님이다. 차 선생님은 백의보살은 자기 몸을 태워서 일반인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고 했다. 궁녀(백제여인)들의 한을 대변하는 것으로 들렸다. 백의보살은 국내에선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란사를 찾은 나는 이윽고 기대했던 고란초를 볼 기대감에 부풀어있을 즈음, 차 선생님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차 선생님은 고란정 앞으로 나를 안내하더니 일단 약수 딱 한 바가지만 마시고 오라고 했다. 한 바가지에 3년 젊어진다는 약수다. 많이 마시면 할아버지도 어린아이로 돌변한단다.

부소산 북쪽 백마강 변에 있는 고란사와 고란약수. 세 분의 부처님 중 맨오른쪽 부처님은 백의보살님이다.

마시고 차 선생님 앞으로 몸을 돌리니 우물을 덮은 지붕을 가리키며 3년전 쯤에 이 지붕을 설치한 후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란초가 전멸했다고 했다. 이럴 수가…예민한 고란초가 우물 절벽 위 바위틈에서 수천년 자라왔는데 지붕이 설치되면서 미세한 환경변화를 못견뎠을거라는 설명이다.

이 지붕은 겨울철 바닥이 얼어 여행객이 약수를 마시고 나오다 넘어진 일이 있어서 설치했다고 한다. 나는 차 선생님을 향해 지붕을 헐고 바닥을 정비해서 고란초를 살릴 수 없냐고 물었더니 민원이라는게 그리 만만치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정확한 원인은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님께서는 바위 틈이 벌어져 고란초와 이끼가 살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국장님은 또 우물지붕은 낙석 때문이라고 했다. 얘기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고란초는 사라졌다.

나는 차 선생님을 향해 그럼 다시는 볼 수 없냐고 목청을 높이니 강 건너 식물원 백제원에 가야 옮겨서 보존하고 있는 고란초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스스로 자라야 진짜 고란초인 것을.

지붕 하나로 수천년 식물 고란초가 멸했다면 정말 재고해 봐야 할 것 같다. 의자왕이 이 약숫물에 바로 이 고란초 잎을 띄워 마셨다는데 이제 고란사엔 고란초가 없다. 어찌됐건 우리 다음세대들은 여기 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옛날 이 곳에 고란초란 식물이 있어서 절 이름도 고란사라고 했단다" 후손들에겐 고란초가 '전설 속의 식물'로 들리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강가로 내려와 배를 탔다. 강이 절반쯤 얼어 황포돛배는 운행을 않아 그냥 통통배를 탔다. 배에는 아직도 녹음기 테이프를 잔뜩 담은 바구니가 시간을 20~30년이나마 과거로 돌려주는 듯 했다.

낙화암 바위 앞을 지날 땐 기분이 씁쓸했다. 저기서 어떻게 뛰어내렸을까. 높은 급경사에 뒤에선 쫓기던 사람들이 밀치기도 했을테지만 달려내려와 그대로 뛰어내리며 목숨은 버리고서라도 정조를 지켜야겠다고 했을 것이다.

백마강과 낙화암. 통통배 수직으로 위쪽의 절벽바위가 낙화암이다. 오른쪽 위 사진은 백화정과 낙화암 사이에 만든 전망대. 오른쪽 아래 사진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는 '낙화암'의 한자다. 낙화암 바로 옆에 새겨져 있다.

곧 이어 도착한 곳이 구드래나루터. 여기서 하선했다. 구드래라는 말은 백제 왕이 강 건너 왕흥사 왕래할 때 망배드리기 위해 올라갔던 구들돌이 있던 마을이라서 생겼다고 한다. 차 선생님은 또 옛날 이곳에서 방바닥에 깔던 구들돌이 많이 나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과 함께 일본이 백제를 부르는 말 '구다라(百済)'의 발음이 변했다는 설도 있다고 했다.

이 곳에는 막국수와 구드래정식 등 부여를 대표하는 음식점과 카페들이 즐비한데 우리는 따뜻한 카페에 들러 몸을 녹이며 하루 일정을 정리했다.

부소산성은 이렇게 한바퀴 돌아오면 처음 차를 세운 주차장으로 연결돼 여행하기에도 편리했다.

눈이 제법 쌓여있는 오솔길을 따라 삼충사, 군창지, 궁녀사, 태자골 숲길도 걸었는데 험하거나 너무 심심하지도 않아 사색하기에 딱 좋은 산이었다.………………………………………………………… ■ 못다한 의자왕 이야기: 백제 제 31대 의자왕(義慈王: ? ~ 660)은 서동이 왕이 된 30대 무왕과 신라에서 온 선화공주 사이의 원자라는게 정설이다.

어려서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해 '해동증자' '해동증민'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증자와 증민은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들이다. 의자왕은 어려서부터 용맹과 결단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아버지 무왕도 그랬듯이 의자왕도 외가인 신라를 수시로 공격했고 잇따라 성을 함락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즉위 직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 서부 40여 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한달 후 신라의 상징 성이라 할 수 있는 대야성(합천)도 함락하면서 그의 정치적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 성의 함락이 결국 백제의 패망을 부른 씨앗이 되기도 했다. 신라가 존립의 위협을 느껴 당과 절체절명의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의자왕은 자신감에 바다 건너 있는 당나라를 멀리하고 고구려ㆍ말갈ㆍ왜와 남북 외교망을 구축해 신라를 압박했다. 고립무원 신라의 유일한 우방은 당나라였다.

그는 20년 집권기 동안 무려 100여개의 성을 빼앗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로 위세를 떨쳤다. 잘 알려진 광개토왕이 접수한 성은 불과 64개였다.

집권 15년 전반기까지 어디 하나 흠 잡을데 없던 의자왕도 그 해(655년) 정치개혁을 단행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의자왕의 마지막 5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왕비 은고는 왕의 권력을 남용하고 최측근 충신 좌평 성충(成忠)은 충언을 하다 감옥에 가서 죽고, 또다른 충신 좌평 흥수(興首)는 귀양가는 등 의자왕도 과거의 의자왕 답지않은 행동을 하게 됐다.

국태민안을 우려, 충언하는 충신을 쫓아내자 조정에는 일시에 간교한 신하들만 들끓었다. 그 틈에 좌평 임자는 신라 장수 김유신의 첩보자로 활동해 백제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쇠락의 길로 향했다.

집권 19년에 접어들면서는 갑자기 이상한 일들도 벌어진다. 마치 국운이 다했다는 징조라도 된 듯 사비궁내를 중심으로 온갖 불길한 재해와 징조가 만발한다.

소정방의 배 1900척 13만 병사가 진격해오는 것도 멸망 20여일 전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 후에야 알 정도로 조정엔 간신들로 눈과 귀가 막혀버렸다. 성충과 흥수가 신라는 탄현(금산), 당은 기벌포(금강 하구)에서 막으라고 했지만 간신들로 인해 왕은 믿지않았다. 의자왕은 뒤늦게야 충신 성충을 내친 것에 대해 후회했다. 결국 달솔(서열 2위 신분) 계백(階伯)을 급히 장군으로 임명, 5000명의 군사로 먼저 신라군을 막게 했지만 우왕좌왕하는 사이 요새를 놓치고 황산벌에서 10배나 많은 병사들에 패했다.

도성 함락 직전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이 나당군에게 돌아와 항복했는데 여기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의문점을 제기하기도 한다. 웅진성 장수에 잡혀왔다는 설도 있지만 스스로 투항했다는 쪽으로 보고 있다. 이때 아마 의자왕이 자신의 항복으로 백제 멸망 만큼은 막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잘 나가던 전반기 15년, 그리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던 후반기 5년, 사비성을 떠난 닷새 동안 만감이 교차했을 수도 있다. 그는 원래 영민했던 왕이었기에,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물어달라고 사정하고 백제사직을 보전해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신라왕 김춘추와 소정방, 김유신 앞에 무릎 꿇고 치욕의 '항복 술잔'을 올렸다. 온 백성이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마침내 의자왕은 자신과 왕자, 신하, 백성 등 1만2807명이 9월 3일 소정방을 따라 당나라 수도 낙양(洛陽) 압송길에 올랐다. 두달 걸린 압송길, 의자왕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지만 의자왕은 중국에서는 후한 대접받았고 수개월 후 사망해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나이가 60쯤으로 추정된다.

이 일 직후 당나라는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고 오히려 백제부흥운동을 돕는 등 국제관계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급류를 탔다. 어찌보면 당나라는 신라와 달리 백제의 멸망까지는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은 적대국인 고구려와 동맹맺은 백제가 미웠을 뿐이다. 13만을 이끈 소정방이 도성함락을 머뭇거리자 5만을 거느린 김유신이 소정방을 향해 "그럼 당부터 치고 백제 치겠다"고 협박한 사건도 있었다.

연이은 대 신라전 승리의 도취감, 정치개혁을 통한 왕권강화 자신감, 동북아 최강국이라는 자만심에 스스로 제어를 못한걸까. 15년 '대왕'의 길을 길어온 그가 말년 5년의 실정으로 패망에 이르렀다는 교훈을 새기게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상황을 보면 그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튼튼한 국방력과 정치인들의 충정, 귀를 여는 통치자, 국익 위한 외교관계 그 무엇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고 또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탐방은 나에게 늘 이런 교훈을 일깨워준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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