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행하다 들켜 연행되고, 신분 들통나고.. 국정원 수난시대

강훈 기자 2013. 1. 2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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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작전 능력-수영장서 사진찍다 들키고 미행하다 되레 쫓기고,공중전화 부스에 갇히고..

지난 9일 경기도 수원에서 진보단체 간부 이모씨를 미행하다 걸린 국가정보원 직원 문모(39)씨. 경기지부 대공수사 요원인 그가 경찰에 넘겨지는 과정은 불법 사찰 여부를 떠나 국내 최고 정보기관이 보여준 한편의 코미디였다.

경기진보연대 고문인 이씨가 낯선 사람으로부터 미행당하고 있음을 느낀 건 사건이 불거지기 엿새 전인 지난 3일 오전 6시 30분이었다. 수원시 장안구 구민회관에서 수영 강습을 받던 중 수영장 출입구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사진을 찍더라는 것. 당시 이씨는 수영 코치에게 사진 찍는 남자가 누구인지 확인을 요청했다. 이씨는 다음 날 비슷한 시각에도 수영장 2층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남자를 발견하고 몰래 2층으로 올라갔더니 그 남자가 사라졌다고 했다.

미행당하는 느낌을 받은 이씨는 다음 날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신호를 무시하고 갑자기 좌회전을 했더니 의심 차량이 택시와 충돌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차를 쫓아오는 등 차량 여러 대가 미행에 동원되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사건 당일인 9일 오후 3시 30분쯤 이씨는 수원 종합운동장 부근을 걸어가다 갑자기 뒤를 돌아봤더니 한 남자가 급하게 몸을 숨기는 것을 봤고 다시 걷다가 또 고개를 돌렸더니 이번에도 그 남자가 몸을 숨기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미행을 확신한 이씨가 남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때부터 상황은 역전됐다. 남자는 인근 주유소 쪽으로 사라졌고 이씨는 잡으러 다녔다. 이씨는 주유소 근처에 주차된 승용차 뒤에 숨어 남자를 기다렸으나 보이지 않자 대로변으로 나섰다. 멀리 남자의 모습이 보였고 이씨는 뒤를 쫓았다.

남자가 횡단보도 옆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자 이씨는 부스 입구를 막아섰다. "당신이 누군데 미행하느냐"고 따졌고 남자는 "왜 이러느냐"면서 부스 밖으로 나오려 했다. 둘 사이에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소리쳤다. 10분 뒤 순찰차가 왔고 부스에서 빠져나온 남자와 이씨는 경찰에 연행됐다.

남자는 경찰에서 미행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직업이 없고 대리기사, 당구장 알바 등을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남자는 가끔 헛소리를 하는 등 정신이상자인 척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일 뒤 국정원은 협조자료를 내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공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면서 그 남자가 국정원 직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진보단체에선 법원 영장을 공개하라면서 국정원 직원 문씨를 불법 사찰에 따른 직권 남용과 상해 혐의로 고소했다. 국정원 측에선 "수사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면서 상해 혐의로 이씨를 고소했다.

이 사건을 두고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한심하고 부끄러웠다"고 입을 모았다. 불법 사찰인지는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국내 최고 정보기관의 작전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전직 국정원 직원은 "대상자에게 미행을 그렇게 계속 들키는 정보 요원들이 어디 있느냐"면서 "사전에 지형지물 파악조차 못한 아마추어의 작전이었다"고 했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는 "고도의 전술 낙하 훈련까지 받았을 요원이 남자 한 명에 의해 10분간 부스에 갇히고 그나마 다른 동료들도 빼내줄 생각은 안 하고 경찰에 연행되어 가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면서 "후진국 정보기관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심지어 경찰관 출신의 흥신소 사장은 "배우자 뒷조사를 하다 걸리면 우리는 의뢰인으로부터 돈도 못 받는다"면서 "도보 미행과 차량 미행 둘 다 허술했다"고 했다.

국정원의 '아마추어' 행태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대선 직전 불거졌던 '국정원 여직원 감금 사건'에서 김모씨는 주거지를 외부에 노출당했다. 물론 야당 측에서 고의로 접촉 사고를 내 정확한 오피스텔 호수를 알아냈으나, 그전에 김씨는 자신이 낯선 사람으로부터 수개월간 추적당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국정원은 재작년 2월 서울 롯데호텔에 머물던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에 잠입했다가 특사단 관계자에게 적발돼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국정원은 정치권으로부터 "요원 3명이 작전에 참여하면서 어떻게 행사장에 가려다 되돌아온 특사단 관계자에게 발각될 수 있느냐. 국정원이 '내곡동 흥신소'로 전락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2010년 6월 리비아에선 국정원 직원이 무기와 북한 근로자 정보를 수집하다 적발돼 추방된 적이 있고, 비슷한 시기 한국에 온 프랭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일행의 움직임을 캠코더에 담던 요원이 거꾸로 휴대전화로 촬영되는 '수모'를 겪었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공작은 술래잡기와 같아 들키면 죽는다"면서 "정보기관원과 스파이 제1의 행동수칙은 비밀성"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국정원 작전 능력이 저하되는 한 원인으로 베테랑 요원의 조직 내 단명(短命)을 꼽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고참 간부들이 줄줄이 옷벗고 나가면서 초보들을 가르칠 고수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간부들이 정치적 외풍을 타면서 조직이 느슨해지고 정보와 수사에 매진하는 분위기를 해치는 것도 정권마다 반복되고 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상당수 전·현직 국정원 간부들이 박근혜·문재인 후보에게 연줄을 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국정원은 정권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보고 일해야 한다"면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인사 물갈이로 조직 기강이 이완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20여년간 대공수사 분야에 종사했던 정보기관 관계자는 "국민에게 존경받는 국정원장, 평생을 정보와 공작 업무에 전념하는 국정원맨이 나오려면 국정원부터 정치권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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