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너무 특별해서 외로웠던 남자

2013. 1. 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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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준목 기자]

"항상 정상에 올라서는 방법만 열심히 연구했다. 하지만 내려가는 방법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은퇴한 '코리안특급' 박찬호가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했던 말이다.

야구선수로서 부와 명예의 최정점에 올랐던 박찬호는 누구보다 가파른 추락도 경험해봤다. 잘 나갈 때는 하나같이 열광하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손가락질을 하며 돌아서는 모습을 직접 체험하며 박찬호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최근 자살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고 조성민은 박찬호와 92학번 동기기도 하다. 조성민 역시 박찬호처럼 당대의 스포츠 스타로서 삶의 굴곡을 누구보다 극적으로 체험했던 인물 중 하나다. 뛰어난 기량·훤칠한 외모·미모의 여배우와 결혼에 이르는 극적인 이야기까지. 행복하던 시절에는 신이 모든 축복을 허락한 것 같았지만 추락할 때는 역설적이게도 그 축복이 저주가 돼 남들보다 훨씬 더 잔인한 고통을 맛봐야 했다. 하지만 조성민은 박찬호와 달리, 야구도 인생도 끝내 추락의 아픔을 딛고 재기하진 못했다.

한국야구 '92학번 황금세대' 이끌었던 조성민

조성민은 흔히 한국야구 '92학번 황금세대'를 이끈 주축으로 거론된다. 박찬호·정민철·임선동·박재홍 등 동갑내기 선수 중 한국 야구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화려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이는 단연 조성민이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194cm의 큰 키에서 내리꽂는 직구와 모델 뺨치는 외모로 프로선수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아마추어 시절만 해도 조성민은 박찬호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학 졸업 이후 진로를 놓고 미국과 일본을 저울질하던 조성민은 결국 일본을 택한다. 동기인 박찬호가 먼저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잡은 게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영향을 끼쳤다. 당초 메이저리그를 꿈꿨던 조성민이지만 '박찬호 다음'이 아닌, 첫 발을 내딛는 선수로 인정받고 싶어 일본 최고명문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한국인 '영건'에게 요미우리가 7년간 계약금 1억5000만 엔, 연봉 1200만 엔의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는 것은 조성민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조성민의 공은 일본에서 통했다. 1997년 1승 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줬고, 이듬해인 1998년부터는 선발로 전환해 전반기에만 7승(6패) 평균자책점 2.76을 올리며 올스타에 선발됐다. 빼어난 외모로 주목을 받았던 조성민은 2000년에는 당대의 톱스타이던 최진실과의 드라마 같은 연애 스토리로 혼인하며 또 한 번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부상과 평탄하지 않은 가정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역설적이게도 감독 추천으로 나갔던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내림세를 걸었고, 이후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조성민이 일본에서 남긴 성적은 53경기 출전 11승 10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4. 부상 이후에는 3년간 2군을 전전하다가 결국 2002년 퇴단했다. 고교와 대학시절 누적된 혹사가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성적에 따라 철저하게 외국인 선수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일본 야구에서 체계적인 관리와 보살핌을 받지 못한 용병의 한계도 조성민을 좌절하게 했다.

조성민은 이후 2005년 5월, 한화 이글스에 복귀해 잠시 활약하기도 했지만 주로 중간계투와 패전 처리 투수로 기용되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영광은 재현하지 못했다. 그가 남긴 성적은 3시즌 통산 35경기에서 3승 4패 평균자책점 5.09. 2007시즌을 끝으로 그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다시 야구계에 발 들여놨지만... 불투명한 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 최진실과의 결혼 생활도 파경으로 끝났다. 2002년부터 악화된 감정의 골은 폭행사태와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법정공방으로까지 치달았다. 이 과정에서 유명인이었던 두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이 선정적인 언론보도를 통해 낱낱이 공개되며 서로 적지않은 마음의 상처를 겪어야 했다. 2004년 9월, 두 사람은 합의 이혼으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야구해설위원과 개인사업 등에 전념하며 비교적 조용한 삶을 꾸려나가던 조성민은 2008년 전처 최진실의 급작스러운 자살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떠오르게 됐다. 조성민은 두 아이의 양육권 문제 등을 두고 최진실의 유족들과 갈등을 벌이다 사회적 비난 여론에 휩싸이기도 했다. 조성민은 결국 친권만 유지하고 모든 것을 최진실의 친모인 정옥숙씨에게 양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2011년 두산 재활 코치로 다시 야구계에 돌아간 조성민은 한때 자녀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나타나는 등 다정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성민의 삶은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10년 처남 최진영까지 자살하면서 다시 한 번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지인들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폭행 시비에 연루되기도 했다. 코치로 활약하던 두산으로부터 다음 시즌 재계약 불발 통보를 받으면서 불투명한 진로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낙인'이 남긴 외로움, 그를 죽음으로 내몰진 않았을까

지난 6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 한 아파트에서 숨진채 발견된 고 최진실의 전 남편인 전직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의 빈소가 서울 안암동 고대안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조성민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살아야 했기에 그만큼 더 불행해야만 했다. 조성민이 차라리 야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으로 진출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거나 차라리 한국에 남았다면, 혹은 연예인 같이 화려한 외모가 아니었더라면, 유명 톱스타 여배우와 교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과도하게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힘들게 살지 않았어도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잘못 들어선 길과 훼손된 이미지는 조성민의 인생을 족쇄처럼 얽매고 놔주지 않았다.

조성민은 오랜 시간 애증의 관계를 유지했던 전처 최진실씨와 같은 나이·비슷한 방법으로 안타깝게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대의 톱스타였던 최진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세상의 삐딱한 편견과 홀로 남겨졌다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최진실은 생전에 친분이 있었던 또 다른 유명 연예인의 자살과 연루됐다는 근거 없는 루머에 휩싸이며 악플러들의 비난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최진실이 떠난 이후 이번에는 그로 인해 가장 많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던 이가 바로 조성민이었다. 손가락질하기는 쉽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고인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세상의 차갑고 이기적인 '낙인'이 남긴 외로움 때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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