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비정규직 전환'은 '해고 공약' 되나?

2013. 1. 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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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표지이야기] 박 당선인의 '2015년까지 정규직 전환 완료' 공약 맞추려고 정부출연연에서 비정규직에게 '해고 가능성' 비쳐… 2007년의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가

대통령 선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2012년 12월21일, 대전 대덕의 한 대형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일하는 이상훈(39·가명)씨는 "미치겠다"고 했다. 이 연구소에서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해왔는데 2013년에 해고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조처란다. 정규직 전환 공약이 비정규직 해고 공약이었다고? "비정규직 연구원의 비율이 워낙 높으니까 공약처럼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기가 부담스러운 거다. 그래서 사전사업으로 비정규직을 우선 특정 비율까지 해고하겠단다. 비정규직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급여에서 차별을 받으니까 이를 해결하겠다는 게 공약 아닌가? 아예 일자리를 빼앗겠다니…."

연구비로 인건비까지 충당

국가 '싱크탱크'라 불리는 과학기술 관련 정부출연 연구기관(출연연)에 비정규직 연구원이 넘쳐나는 건 고질병이다. 2012년 10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정진후 의원(진보정의당)이 기초기술연구회 소속 10개 연구기관을 대상으로 비정규직 실태를 분석한 결과, 비정규직 비율이 평균 52%에 달했다. 전체 공공부문 비정규직 비율 (20.1%)의 2.5배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73%(900명)로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았고,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65%·387명), 한국한 의학연구원(64%·226명) 등이 평균을 웃돌았다.

더 큰 문제는 비정규직 연구원 수가 해마다 큰 폭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에는 비정규직이 3477명이었지만 2012년에는 4806명으로 집계됐다. 5년 평균 증가율이 38%나 된다. 특히 연구인력은 2482명에서 3496명으로 증가폭(41%)이 더 컸다.

출연연의 비정규직화·부실화의 근본적 원인으로는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Project Based System)를 꼽는다. PBS는 출연연의 연구비 지원에 경쟁 개념을 도입해 연구 효율을 높인다는 취지로 1996년에 생겼다. 1996년 이전까지는 정부로부터 인건비와 연구비를 할당받았지만, 이때부터 연구과제 아이디어를 내서 채택돼야 연구비를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PBS로 따낸 연구비로 인건비까지 충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구책임자가 과제를 따지 못하면 팀원의 월급을 아예 줄 수 없는 구조다. 이에 연구책임자는 정규직이 맡고 연구과제에 따라 팀원은 1∼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연구과제가 많아도 문제다. 정부가 출연연 정규직 인력 정원을 사실상 묶어놓고 있어서 정년퇴직 등 특수한 경우가 생겨야 정규직 채용이 가능하다. 연구과제가 늘어나면 비정규직 연구원만 뽑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연구과제 수주 경쟁이 심해져 연구비까지 줄었다.

이상훈씨의 설명은 이렇다. "연구비에 견줘 요구하는 과제가 많다. 그 과제를 수행하려면 인력이 더 필요한데 돈이 부족하니까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그 과제를 한다. 악순환이 이어진다."

박사 연구과정에 있는 비정규직 연구원의 임금은 정규직의 55%에 그친다. 박사 후 연수과정은 정규직의 71%, 박사학위자는 83% 수준이다. 정진후 의원이 내놓은 비정규직 실태 보고서를 보면, 한국생명공학연구원·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의 평균 월급은 195만원으로 돼 있다. 이상훈씨는 "비정규직 연구원은 경력이 쌓여도 급여를 일정 수준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한선이 있다"고 말했다. 과제 성과보수, 능률제고 성과급도 정규직의 23∼34%만 받는다.

2007년 신분 세탁하고 비정규직 유지

2008년부터 2012년9월까지 10개 출연연 기관이 정규직으로 전환한 비율은 0~0.4%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단 한명도 정규직이 되지 못했고 2009년에는 12명, 2008명에는 4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연구원에게는 미래가 없다. 정규직 전환이 거의 불가능해서다. 2008년부터 2012년 9월까지 10개 출연연이 정규직으로 전환한 비율은 0~0.4%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단 한 명도 정규직이 되지 못했고 2009년에는 12명, 2008명에는 4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고용노동부가 2012년 9월 발표한 '고용형태별 근로자 패널조사'를 보면, 전체 기간제(비정규직) 노동자 중 9.9%가 정규직으로, 31.2%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고 돼 있다. 하지만 박사학위 등 전문직 지식·기술자와 연구업무·지원 종사자는 무기계약직 전환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만성적 고용불안은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이어진다. 국내에서 손꼽는 국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상훈씨는 후배들에게 아예 발을 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박사학위를 받더라도 보장되는게 하나도 없다. 출연연에서 경력을 쌓아도 그렇다. 어마어마한 학비를 내고 40살이 다 되도록 공부만 했는데 남은 건 불안한 미래뿐이다. 누가 과학자의 길을 가라고 권하겠는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등의 설문조사를 보면, 국내 과학자의 70%가 '선진국에서 일할 기회가 있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응답했다. 실제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경우 나로호 발사에 참여했던 임직원과 연구원 가운데 45명이 최근 3년 새 이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80%인 36명이 비정규직 연구원이었다.

어설프게 정부가 칼을 휘두르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됐을 때 그랬다. 비정규직 연구원이 2년이 되면 정규직으로 자동 전환되도록 하자 출연연은 기존 연구원을 2년이 되기 전에 해고하고 그 자리에 다른 비정규직을 앉혔다. 이상훈씨도 당시 해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 '연구생'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월급도 줄고 4대 보험도 적용되지 않았지만 일자리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마저도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유권해석이 나오자 아예 퇴사를 했다가 재계약을 맺기도 했다. 비정규직보호법에 연구직은 연구의 연속성을 위해 연구가 끝날 때까지 고용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이 생겨 '신분 세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연구기관의 행정직은 여전히 2년마다 해고된다.

출연연 "비정규직 축소하려고 다양한 방안 모색"

이상훈씨는 "현장을 모르면서 어설픈 정책을 펴지 마라.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그냥 놔두는 게 낫다"고 했다. 이번 대선 공약이 그때의 악몽을 되살리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은 상시·지속적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공공부문부터 정규직 채용을 의무화해 2015년까지 정규직 전환을 완료하겠다는 공약이다. 이 공약의 시행에 앞서 일부 연구기관이 '꼼수'를 찾아내고 있다. 계약 갱신을 앞둔 비정규직 연구원을 무더기로 잘라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할 모집단을 아예 확 줄이겠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일거리가 크게 늘겠지만 월급을 정규직의 80%로 높여 달랠 계획이다. 출연연 관계자는 "비정규직을 축소하려고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구체적인 방안은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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