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조성민, 비극으로 끝난 '야구 천재'의 일생

2013. 1. 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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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이대호 기자] 조성민(40)은 '황금의 92학번' 가운데서도 빛나는 별이었다.

1992년에 대학에 입학한, 또는 고졸선수로 곧바로 프로에 직행한 선수들은 유독 기량이 뛰어나 지금도 줄곧 회자된다.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했고, 임선동·정민철·박재홍·염종석·차명주 등 기라성과 같은 선수들이 가득 포진해 있었다. 신일고 조성민은 휘문고 임선동과 함께 라이벌을 이루며 이름을 날렸다.

조성민은 고려대에 진학했고, 대학시절에도 강속구를 뿌리며 줄곧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1996년 일본 센트럴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계약금 1억5000만엔, 연봉 1200만엔을 받는 조건으로 입단한다. 계약기간은 7년, 갓 대학을 졸업한 신인투수에게는 초특급 대우였다.

일본에서도 조성민의 공은 위력적이었다. 첫 해인 1997년 1승 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로 일본 프로야구에 연착륙한 조성민은 이듬해 선발로 전환, 전반기에만 7승 6패 104⅔이닝 평균자책점 2.76을 올리는 등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말았고, 이후 야구선수 조성민의 내리막길은 시작됐다.

결국 2002년을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퇴단하면서 조성민의 일본 야구도 쓸쓸하게 마감하게 된다. 일폰 프로야구 통산 성적은 11승 10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4, 결코 기량문제가 아닌 부상이 발목을 잡은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더군다나 조성민은 부상을 당했던 1998년 구단의 무관심으로 제대로 재활치료를 받지 못해 재기에 실패한 면도 있다.

이후 스포츠 매니지먼트, 개인사업에 주력하던 조성민은 2005년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다. 한국 프로야구 첫 데뷔다. 공백기가 있었기에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3년동안 35경기에 나와 3승 4패 4홀드 평균자책점 5.09를 거둔 게 전부다. 잦은 부상으로 구속은 떨어져 있었고, 예리했던 포크볼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야구선수로서 생활을 끝마친 조성민이지만 야구와의 연은 줄곧 놓지 않았다. 인스트럭터 일을 하기도 했고 잠시 야구해설을 하며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투수와 타자 양쪽에서 모두 재능을 보였던 조성민이었기에 해설에도 깊이가 있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조성민은 두산과 2군 재활코치로 계약을 맺으며 지도자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1년만에 두산은 조성민과의 재계약을 포기했고, 이에 조성민은 크게 낙담했다는 뒷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렇게 '야구인' 조성민의 삶은 끝이 났다. 젊은 시절의 영광은 희미해져만 갔고, 야구계에 계속 남아있고자 했으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계사년의 첫 주가 채 지나가기도 전인 6일 오전 조성민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경찰은 조성민이 도곡동에 위치한 여자친구 집 욕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5년 전 같은 방법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전 부인 최진실과 같은 방법으로 조성민도 세상에 작별을 했다. 그라운드를 그리워했던 20년 전 야구천재의 말로는 비극이었다.

cleanupp@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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