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명품업체 임원에 K9 실패이유 물어보니..

박성우 기자 2013. 1. 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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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울 양재동 본사. 시무식을 마치고 1층 로비로 내려온 정몽구 회장이 전시된 K9을 가리키며 "이거 어떻게 되어 갑니까?"하고 물었다. 양웅철 연구개발본부 부회장은 "중동 지역 수출이 시작됐으며 북미 시장에서는 일부 사양을 바꿔 출시할 계획입니다"라고 답했다.

지난해 출시된 대형 세단 K9은 기아차가 독일 고급 브랜드를 겨냥해 출시한 야심작이다. 하지만 K9의 참담한 판매 실적이 새해를 시작하는 정 회장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K9은 왜 실패한 것일까?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기아차가 지난해 5월 출시한 K9은 4년 5개월의 시간과 총 4500억원의 개발비가 투입된 플래그십(기업의 모든 기술력을 집약한 제품) 대형 세단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005380)그룹 회장 역시 K9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어, 의전차량을 K9으로 바꾸기도 했다.

출시 당시 기아차는 K9을 국내 시장에서만 월 2000대 이상 팔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기아차는 지난해(5~12월) 당초 목표(1만8000대)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7599대밖에 팔지 못했다. 이례적으로 신차 출시 6개월 만에 판매촉진을 위한 신차교환 프로그램, 253만원 할인(개소세 인하분 포함) 등을 내걸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 제품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가격…옵션 끼워팔기 논란도

전문가들은 K9의 실패 원인에 대해 먼저 '높은 가격'을 꼽았다. 또 차량에 적용된 첨단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원치 않은 옵션을 구입해야 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김종훈 한국자동차품질연합 대표는 "K9은 비싼 가격과 옵션 끼워팔기 등 소비자를 배려하지 않은 가격정책으로 빛을 보지 못한 차량"이라면서 "기아차가 자랑하는 K9의 첨단기술들이 기본사양이 아닌, 옵션패키지에 묶이는 등 끼워팔기 논란이 일면서 신차효과를 상쇄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K9의 기본모델 '3.8 GDI 프레스티지'는 6265만원에 살 수 있지만 풀옵션(모든 선택사양 포함) 사양인 '3.8 프레지던트' 모델은 8538만원이다. 옵션을 다 선택하면 웬만한 중형차 한 대 값인 2273만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또 가격대가 BMW 5시리즈(5940만~7080만원), 메르세데스벤츠 E300(6910만~8010만원)과 비슷해 소비자의 눈길을 수입차로 빼앗겼다.

◆ 오래된 기술이 첨단 기술로 둔갑

전문가들은 기아차가 K9에 첨단기술을 적용했다고 하지만 오래된 기술도 있다고 분석했다. 포장은 화려했지만 내실은 부족한 것이 판매 부진의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아차가 자랑하는 텔레매틱스 시스템(차량 내 전화연결을 통해 지리·날씨·교통상황 등의 정보를 받는 기술) '유보(UVO)'는 완전 자동으로 길을 찾아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차량내 유보 버튼을 누르면 기아차 콜센터로 연결돼 상담원이 최종 목적지를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무선전송해주는 방식이다. 위성과 교통정보 수집장치를 이용해 목적지까지의 최단거리를 안내해주는 텔레매틱스 본연의 서비스가 아니라 사실상 수동으로 사람이 알려주는 구식 시스템이다. 이는 이미 제너럴 모터스(GM), 다임러 등 선진업체가 10여년 전에 상용화한 기술이다.

GM은 1996년 모토로라와 합작해 유보와 비슷한 '온스타(On-Star)'를 상용화했다. 온스타는 총 45종 이상의 GM 차량에 적용되며 미국과 캐나다, 중국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2011년에는 포드, 도요타, 크라이슬러 등의 차량에도 제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사실 유보는 GM 온스타와 거의 똑같은 기술로 1세대 텔레매틱스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미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경우 통신사나 IT기업과의 합작·제휴를 통해 콜센터가 아닌 인공지능 기능을 추가한 2세대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 '디자인 카피논란'도 한 몫

기아차 K9은 출시 전부터 현재까지 '디자인 카피논란'에 곤욕을 치루고 있다. 미국 자동차 전문지 '잘롭닉(jalopnik)'은 '누가 봐도 모방이 명백한 자동차'로 K9을 꼽았다. 이 매체는 K9에 대해 BMW 5시리즈 그란투리스모(GT)와 7시리즈를 반반씩 섞어놓은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릴 중간을 제외한다면 BMW와 거의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K9을 디자인한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 총괄은 올해 3월 열린 '기아차 디자인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디자인이 비슷하다는 점에 대해)오히려 칭찬으로 생각한다"면서 "독일차들과 비슷하다는 것은 기아차의 디자인과 품질력이 향상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울 소재 한 대학의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슈라이어 총괄이 BMW나 벤츠, 아우디 등 독일 메이커 소속의 디자이너였어도 이런 말을 했을지 묻고 싶다"면서 "이곳저곳 명품차의 장점만을 모아놨기 때문에 짝퉁차라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다. K9은 결국 명품과 명품이 더해져 괴물이 나온 꼴"이라고 말했다.

◆ 법인판매조차 '꽝'…"협력사 사장들도 외면…"

모 대기업의 총무 부서를 맡고 있는 A임원은 연말 임원인사에 따라 리스업체로부터 제안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 문서에는 K9은 없었다. 리스업체는 K9의 수요가 적어 후보 차량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대형세단에는 배기량·가격·차체크기 등을 고려한 보이지 않은 등급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사장은 에쿠스(3.8~5.0L), 체어맨W(3.2~5.0L)을 선호하며, 임원급은 그랜저(2.4~3.3L), K7(2.4~3.3L), 알페온(2.4L), SM7(2.5~3.5L)을 타는 것이 일종의 관례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전무급에 대해서 제네시스(3.3~3.8L)를 제공하기도 한다.

K9의 배기량은 제네시스와 똑같은 3.3L·3.8L로 에쿠스나 체어맨W보다 낮다. 하지만 K9(5228만~8538만원)의 가격은 동급인 제네시스(4338만~6394만원)을 뛰어넘어, 상위차종인 에쿠스(6880만~1억630만원)와 체어맨W(5564만~7792만원)와 비슷하다. 따라서 K9은 임원이 타기에는 너무 비싸고 사장에게는 급(배기량)이 다소 부족한 차가 돼버렸다.

기아차 관계자는 "대형 세단은 일반 소비자 판매뿐만 아니라 회사·정부(관공서·군) 등에 납품하는 법인판매가 중요하다"면서 "사장이 타는 차인지, 임원이 타는 차인지 포지션이 애매해서 사장도 임원도 타기 부담스런 차가 됐다"고 말했다.

완성차 업체 법인판매팀 관계자는 "협력사 사장들이 한대씩만 사줘도 이런 실적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 '기아'는 대중차 브랜드…벤츠·BMW 등 고급차 브랜드와 경쟁 어려워

브랜드 전문가들은 '브랜드 이미지'도 실패 이유로 꼽았다. 기아차나 K9이 고객들에게 명품이라는 인식을 주기에는 기업(브랜드) 이미지가 너무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국내 시장에서 기아차의 시장점유율은 35% 수준으로 차량 3대 중 1대는 기아차다. 희소성이 생명인 명품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한 이탈리아 명품업체의 임원은 "명품이라는 것은 단순히 럭셔리하고 비싼 것을 뜻하는 게 아니고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서 "만약 기아차가 아닌 메르세데스벤츠 K9이나 BMW의 K9이었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요타가 별도의 고급차 브랜드 '렉서스'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도요타 브랜드는 중저가의 대량생산 차량이라는 이미지가 고정돼 있어 차를 아무리 고급스럽게 만들어도 소비자들이 이를 '명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렉서스'라는 별도의 고급차 브랜드를 만들었다. 닛산의 인피니티, 혼다의 아큐라 등도 대량생산으로 성공한 자동차 회사들이 고급차 시장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만든 브랜드다.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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