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철새가 빚는 아릿한 풍경.. 따뜻한 '겨울 초대'

박경일기자 2012. 12. 1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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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 & 바다 전남 해남

# 세밑에 우리 국토의 끝을 찾아가는 이유

겨울이 깊어가는 세밑에 남녘의 땅 끝으로 간다. 땅끝이 있는 해남으로 간다. 해남의 땅 끝에는 뾰족하게 새겨진 토말비가 우리 국토의 끝임을 알리며 서 있지만, 땅끝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건 날카롭게 서 있는 토말비보다는 땅끝 가는 길의 고은의 시비다. "땅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저녁/ 파도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제가 서 있을 장소에 맞춤처럼 서 있는 시비다. 어디였더라. 설악산 아래 백담사에도 고은의 시를 새긴 시비가 서 있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갈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이치, 그리고 '살아온 날들을 다 데리고' 땅 끝에 서는 자세가 어쩐지 닮아 있다. 국토의 위와 아래 한 시인의 절창(絶唱) 같은 시비가 하나씩 서 있는 셈이다.

해남의 땅끝을 말하면서는 수사(修辭)를 치렁치렁 달지 않기로 하자. 거기 무엇이 있고, 어떤 풍경이 아름다운지는 설명하지 않기로 하자. 어차피 땅끝은 굳이 일러주지 않는다 해도 다 찾아올 곳이다. 그곳의 매력이나 풍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 국토의 끝'이라는 '장소성'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곳이란 얘기다. 땅끝은 단체관광버스로 행락을 겸해 찾아가는 곳은 아니다. 그렇게 땅끝을 찾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땅끝은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이거나, 과거를 끊고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는 이들의 여행지다. 풍요한 이들보다 결핍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란 얘기다. 그래서 그곳은 비장하기도 하고, 향기도 짙다. 왜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다 이기고 싶어하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이긴 사람보다 진 사람의 흔적이 더 따스하고 마음이 가는 것 말이다.

지금처럼 깊어가는 겨울에도 땅끝을 찾는 이들은 적지 않다. 일찍 어둠이 내리는 세밑의 겨울날에 이 멀고 먼 땅끝까지 오는 이유는, 살을 에는 거친 겨울 바닷바람 속에 호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차가운 땅끝에 찾아오는 이유는, 거기서 위안을 얻고, 새로 시작할 용기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땅끝을 찾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땅끝'이란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길고 먼 행로 속에서 자신 앞에 가로놓인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땅끝에 선 날은 종일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바다 저쪽에서 밀려온 운무가 세상을 온통 안개로 지워 버린 사이로 또 한 사내가 땅끝의 토말비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 현판의 글씨를 읽으며 대흥사를 거니는 맛

해남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 두륜산 자락의 그윽한 절집 대흥사다. 전남 해남군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 동네 이름 한번 멋지다. 풀어 보자면 '아홉 굽이 숲길'과 '기나긴 봄날'이다. 절집으로 드는 긴 숲길에는 지난 가을의 말라붙은 낙엽을 여태 달고 있는 나무가 아직 여럿이다. 막 겨울이 시작된 터에 봄을 기다리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온 세상이 이른 눈발 속에서 쩡하고 얼어붙은 계절에도 이곳 남녘 땅의 숲에는 제법 초록이 살아있고 훈풍도 남아 있다.

본래 대흥사는 옛 기록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자그마한 절집이었다. 당당한 절집 당우들이 버티고 선 지금의 위세에는 어림도 없었다. 절집의 사세가 불같이 일어난 것은 모두 서산대사 덕이었다. 임진왜란 후 서산대사가 지금은 북한 땅인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하던 중 제자에게 자신의 옷과 밥그릇을 이곳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마지막 설법 후 자신의 영정 뒤편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시를 적어 제자에게 건네고 가부좌를 한 채로 입적했다.

그렇다면 서산대사는 왜 남쪽 땅끝의 이리도 외진 곳을 택했을까. 제자들의 물음에 대사는 '만세도록 허물어지지 않을 곳'이란 답으로 대신했다. 그건 절집의 뒤편에 둘러친 두륜산 산세의 비범함을 말함일까. 중국 곤륜산 줄기가 백두산을 거쳐 백두대간의 등뼈가 돼서 흘러내려온 자리. 두륜(頭崙)이란 산 이름은 땅끝에 이르러 솟아오른 산이라 해서 백두에서 '두(頭)'자를, 곤륜에서 '륜(崙)'을 가져왔다. 그 이름처럼 산정에 우뚝 솟은 암봉들이 장쾌하다.

절집의 산문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의 현판을 내걸고 있다. 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이뤄 가득 채우고 있다니 선과 교가 하나임을 주창했던 서산대사의 선교사상을 뜻함이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산문에 들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부도밭. 여기에 서산대사와 혜장선사, 초의선사의 부도가 돌이끼를 얹고 그윽하게 서 있다.

절집으로 들어서면 금당천의 물길을 끼고 있는 북원 일대의 당우에 걸린 현판은 서예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조선 후기 명필들의 글씨가 모두 다 여기 있다.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의 마른 듯하면서도 서릿발 같은 글씨가 붙어 있고, 무량수각에는 추사 김정희가 뭉툭하면서도 힘있는 획으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천불전으로 드는 가허루의 현판에서는 추사와 솜씨를 겨뤘다던 창암 이삼만의 살찐 획의 솜씨가 엿보인다. 대흥사에서는 고즈넉한 절집을 느긋하게 거닐면서 이처럼 현판을 하나하나 읽는 맛이 단연 최고다.

# 북미륵암 마애여래불 앞에서 탄성을 금치 못하다

대흥사에 갔거들랑 두륜산 산자락의 암자 '북미륵암'을 빼놓지 말 일이다. 대흥사의 암자라면 초의선사가 기거했던 일지암만 알려져 있다. 북미륵암은 소수의 등산객들만 그 자취를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북미륵암을 가본다면 일지암보다 북미륵암을 더 앞줄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게 된다. 그건 단 하나, 절집에 모셔진 마애여래좌상 덕이다.

북미륵암은 대흥사 뒤편을 병풍처럼 두르고 서 있는 고계봉과 노승봉 사이의 부드러운 능선인 오심재로 오르는 길에 자리 잡고 있다. 북미륵암은 진초록 신우대 숲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자태도 좋지만, 그보다 용화전에 모셔진 마애여래좌상이 압권이다. 건물 절반의 천장과 벽을 채광창으로 지은 암자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 안에는 돌을 깎아 세운 마애여래좌상이 서남해안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본존불의 높이만 4.85m에 달해 규모에서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데다,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무른 비누처럼 깎아낸 솜씨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신라 말엽 불교조각의 전성기인 8세기 양식을 이어받은 것이라는데, 이런 설명이 없다 해도 불상은 국보란 이름에 능히 값한다. 봉긋 솟아오른 눈두덩이며 형형한 빛을 뿜는 눈, 부드러운 선을 가진 여래상의 얼굴은 도무지 1000년 전에 돌로 깎은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다. 본존불 뒤편의 타오르는 듯 새겨진 화염도 그렇고, 좌우 사방에 돋을새김된 비천상 조각도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상은 왜적의 침입을 견제하는 호국불교의 모습으로 간주된다. 불상이 서남쪽 해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나, 불상 조성 당시 신라가 중앙귀족의 분열과 호족의 발호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하기야 북미륵암 아래 큰 절인 대흥사도 임진왜란의 와중에 혁혁한 전과를 올린 서산대사가 기거하면서부터 이름을 떨친 절이니 북미륵암의 호국의 마애불은 대흥사의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와 능히 짝하는 것이겠다.

# 노승봉에서 대흥사와 그 너머의 바다를 보다

북미륵암에서 내친김에 산길을 더 짚어 오르면 두륜산의 낮은 목을 타고 오르는 오심재가 금방이다. 제법 널찍한 평지로 이뤄진 오심재에 서면 오른편으로는 노승봉이, 왼쪽으로는 케이블카가 놓인 고계봉이 올려다보인다. 오심재에서 노승봉까지는 20∼30분 정도면 올라설 수 있다. 거친 암봉으로 이뤄진 노승봉을 오르는 일은 아찔하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철에 이쪽 사면에는 눈이 좀처럼 녹지 않는 데다, 노승봉의 바위에 얼음이 버석버석 얼어 있으니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오름길의 바위에 매어 놓은 쇠사슬과 밧줄을 붙잡고 용을 쓰면서 정상에 오르면 거기서 대흥사의 그림 같은 전경이 펼쳐진다. 구태여 노승봉까지 오르는 이유는 대흥사의 전경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기 위함이다.

무릇 사물에 가까이 서면 오히려 그 실체가 잘 안 보이는 법. 대흥사 경내에 들어서서 잘 볼 수 없었던 절집의 자태가 물러서서 노승봉 위에 올라서니 비로소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절집을 감싸듯이 둥글게 이어지는 두륜산의 능선 아래 대흥사의 앉음새가 뚜렷하다. 절집 너머로 첩첩이 겹쳐진 야트막한 산자락과 그 주변의 논과 밭, 그리고 고천암호가 펼쳐지고 그 끝은 바다다. 바다 너머로는 진도가 떠 있다. 맑은 날이면 진도 너머로 흑산도와 홍도까지 환하다는데, 멀리 점점이 뜬 섬이 그게 이것 같고, 이게 저것 같아서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는다.

노승봉에서는 가련봉과 두륜봉을 넘어 구름다리를 지나고 상원암과 진불암을 거쳐 대흥사로 내려올 수도 있고, 아예 도솔재를 건너가서 도솔봉까지 딛고 남암과 관음암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네댓 시간이 걸리는 길. 겨울이 깊어가면서 숲의 풍경은 황량하지만, 고도를 높일 때마다 그보다 더 푸른 바다가 일망무제로 펼쳐지니 조금도 지루함이 없는 길이다.

# 고천암호를 가득 메운 철새들의 서정

겨울 해남에서 꼭 보아야 할 것 하나를 더 붙이자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고천암호를 찾는 철새들이다. 너른 갈대숲 사이로 물오리와 기러기, 논병아리떼들이 저희들끼리 수런거리며 수면을 메우고 있다. 새들은 호수와 부근의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머물다가 이른 아침과 저물녘이면 일제히 날아오른다. 이즈음에는 철새들의 발길이 뜸해져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줄을 맞춰 차가운 겨울의 하늘을 날아가는 철새들의 군무는 제법 볼 만하다. 오히려 하늘을 가득 메우는 장관보다는 아스라이 전봇대가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끝 간 데 없는 호숫가 벌판을 따라 이따금 생각난 듯 날아가는 철새들의 모습이 훨씬 더 서정적이다. 이렇듯 평화로운 풍경 속에 철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호반에서 길을 잃었는지 고라니 한 마리가 길 위로 올랐다가 한참 동안 이쪽을 빤히 바라보다가는 생고무처럼 통통 튀며 갈대숲으로 사라졌다.

방조제 안쪽으로 이어지는 호반을 따라 길게 도로가 나있는데, 여기서는 차를 여러 번 멈출 수밖에 없겠다. 아릿하게 안개가 피어오르는 빈 논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니 말이다. 여기다가 물 위를 미끄러지는 철새들의 유려한 움직임과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비행, 그리고 이곳저곳의 논에서 수런거리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자면 살아있는 것들이 이렇듯 아름다운지 비로소 느끼게 된다. 저물어가는 호수 위로 제 식솔들을 이끌고 철새들이 편대를 이뤄 날아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게 될까. 그건 먼 땅끝의 해남 고천암호의 갈대숲에 가서 직접 느껴볼 일이다.

해남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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