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씩 들여 노동자 후보 나온 까닭

전혜원 인턴 기자 2012. 12. 1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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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원.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등록하려면 내야 하는 기탁금의 액수다. 당선되거나 사망한 경우, 또는 유효투표 총수의 15% 이상을 득표한 경우 전액을 돌려받는다. 10%에서 15% 미만을 득표했다면 절반을 돌려받을 수 있다. 10%도 득표하지 못하면 3억원은 고스란히 지출로 남는다.

이번 18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는 모두 7명이다. 기호순으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무소속 박종선·김소연·강지원·김순자 후보가 출사표를 던졌다. 이 가운데 재산이 수십억원 이상이거나, 후보 이름을 내건 펀드가 단기간에 수백억원을 끌어 모으거나, 소속 정당이 있어 선거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후보들에게 기탁금 3억원은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기탁금 3억원은 무모해 보이는 장벽이다. '노동자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동시에 내건 기호 5번 김소연 후보와 기호 7번 김순자 후보(등록 재산 각각 1억7458만원·2억9732만원) 얘기다. 무엇이 그들에게 3억원을 감내하게 만들었을까.

'노동자 대통령' 후보가 두 명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진보신당이 '좌파 공동대응'을 전제로 대선 전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부 당원들이 김순자씨에게 대선 출마를 제안했다. 김씨는 고심 끝에 출마를 결심했다. 10월23일 김씨와 일부 당원이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추진했으나 당 대표단과 중앙당은 기자회견을 연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당의 공식 결정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은 취소됐다.

김소연 무소속 후보 "선거운동이 곧 투쟁"

이후 진보신당은 대선 전략을 두고 내부 진통을 겪는다. 김씨는 진보신당을 탈당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11월6일 밝혔고 25일 후보등록을 마쳤다. 이에 앞서 민주노총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전·현직 간부가 주축이 된 '노동자 대통령 선거투쟁본부'는 11월11일 김소연 전 기륭전자 분회장을 노동자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노동자 선거인단 1117명이 투표에 참여해 1115명이 찬성했다. 진보신당은 대선 공동전선의 일환으로 '김소연 후보를 적극 지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문재인 후보가 왔으면 안 그랬겠죠." 김소연 후보가 씁쓸하게 웃었다. 선거운동 첫날인 11월27일 김소연 후보는 첫 유세 장소로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을 택했다. 이날 건물 주변에는 출입을 막는 빨간색 띠가 둘러졌다.

ⓒ김흥구 비정규 노동운동을 해온 김소연 후보의 선거투쟁 선포식이 11월27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열렸다.

평소라면 이들이 삼성 사옥 앞에서 마이크를 잡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선거 유세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3억원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비용이기도 한 셈이다. 김소연 후보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동지들도 20만, 30만원씩 십시일반으로 마음을 모았다. 후보 등록 과정 자체가 기적이었다"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비정규직 싸움의 상징 격인 기륭전자 투쟁의 산증인이다. 2005년 7월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를 만들었고,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006년 30일간 단식농성, 2008년 94일간 단식농성, 2010년 8~10월 포클레인 고공농성 등 극한 투쟁을 벌였다. 결국 지난 11월1일, 1895일 만에 정규직 전환 합의를 이끌어냈다. 지난해 6~11월에는 희망버스 기획단으로 활동하면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연대 투쟁에 참여했다. 김 후보는 "우리는 누구를 대변하겠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싸운다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이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고통받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기적적으로 기탁금을 마련했지만 자금은 턱없이 부족하다. 김소연 선대본부는 선거일 전날인 12월18일까지 1만명에게 10만원씩 10억원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단 몇 사람이라도 '우리 얘기를 하는 후보가 있구나' 느낀다면 대성공이다"라고 말하는 김 후보는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제1공약으로 내걸었다. 앞으로도 쌍용자동차 해고자, 재능교육 노조 등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을 중심으로 유세를 이어갈 계획이다. 김 후보는 당선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철탑에 있는 동지들을 내려오게 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시사IN 윤무영 청소노동자 출신 김순자 후보(오른쪽)가 11월27일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유세를 진행했다.

김순자 무소속 후보 "비정규직 대변 위해 출마"

"'세상 많이 좋아졌구나.' 대학에서 청소하던 노동자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걸 보고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셨을 거다. 그렇지만 세상이 좋아졌으면 제가 나올 리가 없다. 힘없는 사람이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되는 걸 바꿔보려고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김순자 후보의 대선 출마 일성이 신촌 거리에 울려 퍼졌다.

김순자 후보 역시 등록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선대본부의 한 관계자는 주택담보대출까지 받아 비용을 보탰다. 진보신당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감행한 이유에 대해 김순자 후보는 "안타깝게도 당이 대선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했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내려면 출마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순자 후보는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다. 지금은 대선 출마를 위해 휴직계를 낸 상태다. 선거가 끝나면 다시 일터로 돌아갈 생각이다. 2003년 청소 일을 시작했을 때, 월급 55만원을 받았다. 정규직 임금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밥도, 연장근무 수당도 없었다. 2006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듬해 계약 해지로 조합원 전체가 해고됐다. 63일간 천막농성을 벌인 끝에 복직됐다.

진보신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19대 총선 때 김 후보는 경상도 억양에 직설적인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다른 법은 날치기도 잘하면서 왜 비정규직 철폐는 하지 못했습니까?" "최저임금이 100만원도 안 되는데 그 돈으로 사람이 어떻게 삽니까? 도둑질을 해야 합니까, 그냥 굶어야 합니까?" 등은 '순자 어록'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이번 대선에서도 김 후보 선본의 논평은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안철수 후보의 사퇴에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라고 쓰는 식이다. 북한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혐의로 사진작가 박정근씨가 유죄 판결을 받자 '백지 논평'을 내기도 했다.

김 후보는 비정규직·정리해고 폐지를 비롯해 △6년 일하고 1년 쉬는 유급 안식년제도 도입 △일주일 35시간(현행 40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1만원(현행 4580원)으로 인상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선 후보로서 급식·마트·알바(아르바이트) 노동자 같은 미조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게 김 후보의 바람이다.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노동계의 심정은 착잡하다. 노동계 인사 상당수가 문재인·안철수 캠프에 합류했고, 민주노총은 대선 방침조차 정하지 못했다. 심상정 진보정의당 후보는 문 후보와 단일화했고, 이정희 후보 역시 야권연대에 적극적이다. 노동자 후보 두 명이 나란히 무소속 후보로 등록한 것은 한국 진보 정당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히 '노동자 대통령'을 표방하는 두 후보 간 단일화 가능성은 없는 걸까. 쉽지 않다.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경우 단일화를 촉구하는 여론이 높았고,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조사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두 노동자 후보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데다 두 후보 지지자들 사이 감정의 골도 제법 깊어졌다.

비용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김순자 캠프의 한 관계자는 "공보물 한 장에 앞·뒷면만 인쇄해도 2억원이다. 기본 5억원이 드는 선거라 그쪽도 우리도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 문제 때문에라도 단일화를 하려 했다면 후보 등록 전에 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등록까지 가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았던 만큼 중도 포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의미다. 두 후보에게 대선 출마는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보인다.

전혜원 인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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