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에 새겨진 달빛·별빛·햇빛의 하얀 영혼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겨울트레킹

2012. 12. 1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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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는 자작나무숲에 내려놓아야 한다. 상처 난 삶을 치유하고 위로받고 싶다면 벌거벗은 겨울산 자작나무 숲 풍경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화려했던 가을의 기억을 언 땅에 묻고 침묵하는 자작나무, 살아온 세월만큼 고독의 그림자가 길고 짙은 자작나무…. 달빛과 별빛, 그리고 햇빛의 영혼이 깃든 겨울산 자작나무 앞에 서면 나이테 속에 새겨진 침묵과 고독을 조우하게 된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품고 있는 강원도 인제는 동화 속 설국이다. 형형색색의 래프팅 보트가 급류를 타던 내린천은 무명천을 펼쳐놓은 듯 하얗게 얼어붙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한 소나무는 무시로 은가루를 뿌리고, 솜이불을 뒤집어 쓴 산골 오두막들은 굴뚝에서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며 정담을 나눈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서울 여의도공원 두 배 넓이인 138㏊. 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가 1990년대 초기에 병해충 피해목을 베어내고 자작나무 묘목 70만 그루를 심었다. 자작나무가 속성수인데다 쓰임새가 많고 비교적 병해충에 강하기 때문이다. 산불조심기간을 제외하고 일반에 공개되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25㏊.

산불감시초소에서 자작나무 숲까지는 3.2㎞로 걸어서 한 시간 거리다. 산림청은 군사작전도로로 개설된 임도를 보수하고 자작나무 숲에 탐방로 3.5㎞를 개설했다. 눈이 발목 깊이로 쌓인 임도에는 심심산골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루와 고라니 등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완만한 등고선을 그리는 임도가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북위 45도 이상의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 자작나무는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한반도의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 러시아와 핀란드 등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하얀 피부로 인해 '숲 속의 귀족'으로 불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작나무가 문학작품의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까닭이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묻힌 곳도 자작나무 숲이고 영화 '닥터 지바고'와 '러브 오브 시베리아' 등 명화에 등장하는 숲도 당연히 자작나무 숲이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가는 겨울 자작나무'(정끝별 시인의 '자작나무 내 인생' 중에서)

한국 문인들의 자작나무 사랑도 자작나무를 국수(國樹)로 추앙하는 러시아 못지않게 유별나다. 고은 시인은 삭풍이 부는 칠현산 기슭의 겨울 자작나무 숲에서 '강렬한 경건성'을 발견했다. 안도현 시인은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하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라고 극찬했다. 강윤후 시인은 자작나무 숲을 '흑판에 백묵으로 마구 그은 선'처럼 보인다고 표현했고, 도종환 시인은 '곧고 맑은 나무'에서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1970년대까지 화전민들이 살던 마을의 산비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삼팔선에 위치한 원대리는 한국전쟁 때 적군과 아군이 번갈아가며 점령하던 격전지. 견디다 못한 주민 20여 가구는 군인들이 없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궜다. 한때는 회동초등학교 분교가 들어설 정도로 주민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작나무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작나무 숲은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는 새봄과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환상적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벌거벗은 자작나무가 삭풍에 맞서 묵묵하게 침묵을 지키는 한겨울을 으뜸으로 꼽는다. 한겨울의 자작나무 숲은 시야를 흐리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오로지 순백의 수직선들이 만들어내는 한 폭의 수묵화만 존재할 뿐이다.

여느 자작나무 숲과 달리 원대리는 숲 속에서 자작나무를 만나는 흔치않은 공간. 문화재 복원용으로 지정된 금강송 몇 그루가 자작나무 숲 입구에서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채 독야청청 산수화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북서풍을 피해 햇살이 잘 드는 비탈에 뿌리를 내린 자작나무 숲에는 간벌한 자작나무로 만든 숲 속의 교실과 원뿔형의 인디언 오두막처럼 만든 두 개의 쉼터가 겨울 숲을 지키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생태연못은 자작나무와 낙엽송 군락이 만나는 경계지역. 하얀 자작나무와 검은 낙엽송이 연출하는 흑백의 수직선들이 눈 덮인 비탈을 오르내린다.

자작나무는 여느 나무에 비해 쓸모가 많다. 한약재로도 사용되는 자작나무 껍질은 매끄럽고 질긴데다 수십 년이 흘러도 잘 썩지 않아 종이 대용으로 사랑받았다. 경북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天馬圖)가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까닭이다. 백두산 자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죽으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여 묻혔고, 심마니들은 산삼을 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보관했다.

죽어서 더 강한 자작나무는 수레바퀴로 사용될 정도로 단단해 경남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일부는 자작나무로 제작됐다. 곡우 때 나는 자작나무 수액은 무병장수에 좋고, 충치예방에 좋다는 자이리톨도 자작나무에서 추출된다. 활엽수 중 피톤치드가 가장 많은 자작나무가 아토피 피부염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힐링 장소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과거로 떠나는 시간의 문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이루어지지 못한 어린 시절의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이승기의 뮤직비디오 '되돌리다'가 지난 늦가을 이곳에서 촬영됐다. 영상미가 뛰어난 뮤직비디오에서 이승기는 원뿔형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과거로 떠나 어린 시절 좋아했던 여학생과 함께 자작나무 숲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20∼30m 높이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햇빛을 흡수하기 위해 높은 가지인 우듬치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모든 가지를 도태시키는 아픔을 감수한다. 가지가 떨어지면서 생긴 검은 생채기가 하얀 껍질과 어우러져 기하학적 무늬를 연출하는 자작나무의 나이테들. 아픈 만큼 성숙한 자작나무의 그 나이테 속에는 세상의 모든 빛들이 차곡차곡 저장돼 있다.

인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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