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핫플레이스]좋았던 그 시절을 만나는 하나의 길 ..'천개의 마을 천개의 기억' vs '정동 1900'

2012. 12. 1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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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때가 좋았지'를 입에 달고 다닌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하고 좋은 기억만 저장하려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추억은 인간을 미소짓게 하는 힘일까? 가까운 곳에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오가며 잔잔하게 웃어나 볼까?

겹쳐 보는 즐거운 상상, 역사는 판타지

서기 1900년의 서울을 기억할 사람이 생존해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당시 나이가 열 살이었다 해도 올해 112세다. 그런 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동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정동길은 서울에서 제일 예쁜 길이다. 개화기 때 정동처럼 활발했던 동네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정동은 오늘의 이태원처럼 외국인들이 많이 오가던 동네였다. 외교관, 선교사, 무역상, 기타 등등이 덕수궁과 경복궁 일대에 영사관과 관저, 살림집들을 마련해 살아갔다. 그때 지어진 건축물들은 오늘날 중요한 문화 유산이 되어 누군가에게는 낭만의 시간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영욕의 역사로 투영되고 있다. 이화여고, 창덕여중, 러시아공사관, 정동제일교회, 구세군회관, 영국공사관, 경교장, 중명전, 배재학당, 성공회교회 등은 지금까지 남아있거나 일부 복원되어 100년 전 서울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정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1900년 즈음의 풍경은 이게 전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기념해서 마련한 '정동 1900전'을 보면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뜨겁게 끓고 있는 도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전시장은 1900년 즈음 정동의 풍경 사진과 그림, 또는 풍경을 재구성한 작품들로 가득하다. 당시 조선은 외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는 분위기였고 선교사, 외교관을 포함한 외세에 의해 한양 일대가 '측량'되는 시기였다. 그것은 이 전시회에 등장하는 많은 사진과 그림이 우리나라 사람이 촬영하고 그려진 게 아닌 외국인에 의해 '기록'된 산물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깨닫게 된 일이다.

기록을 보면 당시 정동은 '양인촌'이라 불렸다. 1882년에 들어선 미국공사관을 필두로 주요국 공사관들이 이 동네로 스며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살다 보니 그들끼리 놀고 즐기는 클럽(구락부)이 생기고 그들을 위한 상점, 식료품점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늘의 서래마을이나 이태원, 이촌동 일대의 풍경을 생각하면 된다. 전시장에는 당시 정동 양인촌 상점에서 외국인을 위해 판매되던 일부 물목과 거래 가격도 전시되어 있다. 말라가 건포도 파운드 당 $0.40, 푸딩건포도 파운드 당 $0.25, 옥수수가루 파운드 당 $0.12, 네덜란드 라운드 치즈 파운드 당 $1.50, 미국 잼 캔 당 $0.10, 테이블와인 12병 당 $4 등이다.

전시장을 꼼꼼히 둘러보다 보면 역시 '역사는 판타지'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미래뿐 아니라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풍경과 오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인생보다 긴 시간을 여행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미국인 화가인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미국 공사관 옆 언덕에서 그린 경복궁, 당주동, 신문로 일대의 풍경을 보면 도포차림의 행인들과 기와집들, 그리고 북악산 능선이 길게 늘어져있고, 그 아래로 경복궁이 우뚝 서 있다. 그림 맨 앞에 있는 집에는 홍매화(로 추정되는)가 활짝 피어있는데,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4월 쯤이 아니었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절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에는 이런 연상놀이를 하는 기쁨도 있다.

당시 영국 공사 월터 힐리어는 서울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자료를 수집했었는데, 그때 그 사진들은 후손에 의해 보관되어 왔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처음 한국인에게 공개되었다. 그의 사진 속에는 미국공사관, 현재 위치로 이전하기 이전의 정동제일교회, 경희궁 뒷쪽, 러시아공사관, 서대문 주변, 영국공사관, 명동성당 등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경운궁(덕수궁)의 실체도 이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전시 자료에 의하면 경운궁에는 원래 28채의 건축물이 있었다. 범위도 지금의 덕수궁보다 컸다. 오늘의 덕수궁에는 중화전, 중화문,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함녕전, 정관헌, 대한문, 광명문, 중명전 등 모두 10채의 건축물만 남아있다. 사라진 건물이 더 많이 있는 것은 격동의 역사를 보낸 우리나라 형편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쳐도, 이제 그 사라진 건축물들 가운데 7채는 복원할 방법도 거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게 된다. 오늘의 덕수궁 안에 있던 경효전, 구성헌, 돈덕진, 평성문, 숭녕부, 발전소, 소방계, 조원문, 영목당, 양심당 등은 작정을 하면 복원이 가능하겠지만 이미 사유지가 되어버린 곳에 있었던 만희당, 환벽정, 선원전, 장옹대, 양화당, 수학원, 포덕문 등을 복원하려면 어마어마한 세금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경운궁과 관련된 전시 코너에서는 당시 경운궁 궁내 건축, 도로 확장 공사 현장은 물론 정비된 도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탑골공원, 경운궁, 환구단, 독립문,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 상량문,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는 홍교 사진 속에는 운행 중인 전차와 도포 차림의 행인들, 어린이, 얼룩개, 나무로 만든 전봇대 풍경도 보인다.

그들은 2012년 이 시간 어느 행성을 거닐고 있을까. 대한제국의 문물도 볼 수 있다. 한성순보, 독립신문, 독립신문 영문판도 전시되어 있다. 전차 승차권과 승차권을 담았던 가방도 볼 수 있는데, 대한제국 전차승차권의 요금은 5전이었고 승차권 뒷면에는 '히이로 생동지건연초'라는 일본 담배 광고도 노출되어 있다.

외국공사관 전시도 볼만하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그림책에서나 구경했던 근대 양식의 러시아공사관, 프랑스공사관, 손탁호텔, 이화학당,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독일공사관, 이탈리아공사관, 영국공사관, 미국공사관 등의 당시 사진과 건축 개요를 상세히 읽을 수 있다. 근대식 연회의 모습과 상차림도 이번 전시에서 꼼꼼히 들여다 볼만하다.

바로 옆 전시장에서는 <1910년 파리 만국박람회>전이 열리고 있다. 1896년 프랑스 정부 요청에 의해 참여한 박람회에 우리 정부는 백자 청화 대접 등 생활 도자기와 작품, 악기 등을 전시했는데, 박람회가 끝나자 전시품 대부분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관례이기도 하고 그 전시품을 회수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부담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동 1900전은 2013년 1월 20일까지 열린다.

2012년 겨울 정동길 걸어보기

서울역사박물관을 나와 정동길을 걷는다. 어느새 은행잎도 모두 떨어지고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풍경이다. 목적지는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삼성병원 사거리에서 시작된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첫번째 '정동 1900'는 '러시아공사관(터)'다. 그곳은 언덕이다. 지금은 빌딩이 도시 풍경을 막아버렸지만 대한제국 시절 이 언덕에 오르면 경복궁은 물론 북악산, 인왕산 전체와 멀리 동쪽으로 낙산, 남쪽으로 남산, 그리고 그 자락 아래에 있는 명동성당, 서쪽으로 중림동교회까지 볼 수 있었으리라. 두번째 유물은 이화여고. 100년 전 이화여고를 그대로 볼 수는 없으나 교정 초입에 있는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 들어가면 학교와 근대사를 보고 읽을 수 있다. 돌담길을 따라 내려간다. 왼쪽으로 보이는 벽돌로 지은 빌딩이 지금은 없어진 신아일보의 별관이다. 이 건물은 정동길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고즈넉하다는 표현말고는 딱히 형용하기 어려운 이 오래된 건물은 사무실과 작은 카페가 입주해 있다. 한편 정동극장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최근에 복원된 중명전이 있다. 대한제국 시절 경운궁(덕수궁)의 범위는 이곳 중명전 외곽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중명전은 어처구니없게도 개인에게 팔렸다가 얼마 전 서울시에서 매입, 복원 작업을 통해 시민에게 공개된 건물. 매력적인 건축물이지만 이곳에서 을사오적에 의해 주권이 통채로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으니 낭만적 감상에만 사로잡힐 공간은 아니다. 정동길로 나오면 정동제일교회가 눈 앞에 있다. 겨울이면 더욱 예뻐지는 이 교회는 초기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7년 상동 부근에 개설한 벧엘 예배당(Bethel Chapel)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정동의 시병원이 이전하자 그 자리에 1897년 감리교 최초 서양식 교회를 지어 문을 열었다. 정동제일교회에 터를 내어 준 시병원은 1885년 9월10일에 문을 연 민간병원으로 제중원에 이은 두 번째 병원으로 기록만 남아있다.

좋았던 그시절, 도대체 뭐가 좋았을까?

정동제일교회 앞에 있는 벽돌건물이 신아일보 본관이다. 그 뒤로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이 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 때 대법원으로 사용되던 것을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이어받아 대법원으로 사용하다 서초동에 신청사가 생기면서 서울시에서 미술관으로 재구성했다.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천개의 마을 천개의 기억>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 각 자체구에는 문화원이 있는데, 그 문화원들이 지역 시민들의 기념 사진을 수집, 지역사와 생활사를 보여주고 서울이라는 특정한 지역의 문제를 카메라로 기록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삶의 터전으로서의 서울을 보여준다. 취지 그대로, 전시는 기억과 기록의 동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김한용이 촬영한 1950년대 덕수궁스케이트장, 원구단과 반도호텔(지금의 웨스틴조선서울), 한국은행 본점 앞 로터리와 남대문로, 임인식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재동초등학교', 전몽각의 1965년 마포, 1967년 숭인동, 갈현동, 한정식이 찍은 1972년 견지동, 사간동, 김기찬의 1983년 중림동, 1980년 중림동, 1988년 중림동, 1990년 중림동, 1993년 중림동, 노무라 모토유키의 1970년대 청계천변 판자촌 풍경, 1970년대 답십리 활빈교회, 안세권의 청계천시리즈, 김문경의 황학지층 등을 차례로 감상하다 보면 서울의 연대기가 눈에 아른거린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재개발, 개건축, 뉴타운 등의 옛모습과 그런 토건 프로젝트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부유하게 해줬거나, 망가트리고 어떻게 폐허로 만들었는지도 사진을 통해 보고 느낄 수 있다. 신림 7동의 재개발을 기록한 한국건축사진가회의 '낙골프로젝트', 은평뉴타운을 다룬 강홍구의 작품들, 철거 재개발이 그곳을 터전으로 살던 사람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보여주는 조은의 작품들은 흘러간 세월과 쫓겨난 사람들에 대한 애잔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홍순태의 뚝섬풍경, 황헌만의 난지도, 최원준의 여도 벙커 등은 중장년 이상의 성인들에게는 추억의 창고가 되어주었고, 어린 친구들에게는 판타지 같은 세상이었다. 도대체 뚝섬 시민공원이 있는 그 자리에 돛단배라니! 문화원에서 수집한 개인 사진들이 전시된 현장 곳곳에서는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부모님의 명륜동 혼례 사진, 둘째 누나의 수송국민학교 졸업식 장면, 이동식 사진관 세트에서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은 추억 그 자체였다. 지금은 고어텍스가 아니면 뒷동산에도 올라가지 않는 세상이 되었지만 신정동에 사는 지무룡 씨가 내놓은 사진 가운에 '1962년 백운대 등산 사진'을 보면, 그곳이 분명 백운대 정상인데, 사진 속의 남자들은 모두 싱글 정장 차림이고 여자들은 지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그때 사람들은 백운대 정도는 양복에 구두나 고무신만 신고 올라갔던 것이다. 서초동의 옛모습을 모은 전시도 흥미롭다. 서초구 송파구 일대가 지금은 부자촌이 되어있지만 한때는 능안마을, 아랫멍더리, 염곡리, 사초리, 잠실리, 양재리 등으로 불리던 시골 동네였다.

<천개의 마을 천개의 기억>전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국민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 주는 특별한 전시다. 단순한 서울의 현대사가 아닌 서울시민, 한국 국민의 역사와 그들이 만들어낸 풍경들을 보고싶다면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을 빼놓고 볼만한 전시다.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357호(12.12.18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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