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있는 명소] 문경새재--내 인생의 딱 하루, 조선선비의 길 걷다

2012. 12. 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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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문경=남민 기자]엽전 열닷냥 꼬깃꼬깃 옷섬에 챙겨받은 선비는 달랑 괴나리봇짐 하나 메고 한양천리 과거보러 떠난다.

어사화(御賜花)를 쓰고 금의환향할 낭군님을 떠나보내는 아내는 몇달이나 걸릴지 모를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며 정화수 앞에서 천번만번 빌고빈다.

'선비의 길'로 상징되는 조선의 옛길 문경새재는 선비들의 갖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동래(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데다 문경 고을을 거쳐가면 장원급제가 눈 앞에 보인다고 믿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선비들이 몰렸다. 그래서'장원급제의 길'이라고도 불렀다.

문경은 '경사스런(慶) 소식을 들을 수 있다(聞)' 해서 장원급제를 바라는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넘었다.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 사이에서는 '죽령을 넘으면 죽을 쑤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 처럼 떨어진다' 해서 문경새재를 넘었다. 심지어 멀리 호남의 선비도 이 길을 일부러 찾아 넘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군사요충지라 산적이 상대적으로 적어 많이 찾기도 했다.

문경새재 과거길. 멀리 가운데 제1관문인 주흘관이 보인다.

문경새재 입구. 바깥쪽 현판은 '문경새재', 안쪽의 현판문은 '영남대로'라고 쓰여있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나라에서 영남대로(한양~동래)로 개척한 길 중 문경과 충북 괴산을 연결하는 고갯길로, 영남대로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부고속도로 격이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짧은 직선대로로 거리가 약 380km, 당시 선비들이 걸어서 15일 걸렸다. 대구에서는 열흘, 안동에서는 1주일 정도 걸어서 갔다.

하지만 과거급제의 길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한양에 도착해도 갑자기 시험일정이 연기될 때도 있어 대부분의 가난한 선비들은 몇달이 걸릴지 모를 먼 길을 떠나 도중에 돈이 떨어져 되돌아 가는 사람도 생기고, 데리고 가던 머슴을 되돌려 보내기도 한다. 어떤 선비는 도중에 경비를 빌려 나중에 되갚기로 하고 한양으로 향한다.

문경새재 과거길 초입에 있는 선비상. 옛길박물관에 전시된 괴나리봇짐과 선비들의 소지품들.

달성 현풍의 곽주(1569~1617)는 상주를 지나 새재로 가면서 벌써 노자(路資)가 떨어졌다. 그는 줄곧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양식이 부족해 유재로부터 빌린 쌀을 길되로 서말 아홉되로 꾸어가니 되말로 너말 주소"

떠나보내는 부모와 가난하고 어진 아내도 '모험'을 건다. 한 집에 자식이 여럿 있지만 형편이 넉넉지 못해 주로 장남에게 학문을 집중 지원해서 과거에 응시케 한다. 한번 떠나보낼 때면 논밭을 팔아야 한양까지 경비를 댈 수 있어 어떤 면에서 보면 일종의 '로또'에 희망을 거는 셈이다. 가난한 선비가 낙제하면 파산에 가까운 생활이다.

선산의 노상추는 여러차례 한양길 돈 대느라 재산이 거덜났다. 후에 급제로 출세는 보장받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온가족이 수년간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조령관문. 제1관문으로 주흘관 및 영남제1관으로 부른다. 같은 관문이지만 앞뒤 현판 글씨는 다르다.

영남의 선비가 그렇게 치른 과거에서 합격률은 고작 13%다. 지방 치고는 그나마 많은 편이었다. 한양 출신이 45.9%로 압도적이었다. 인구비례로 합격자가 안배된 것.

이렇듯 청운의 꿈을 가진 선비 10명에 1명만이 이 금의환향 길에 오르는 정도였다. 그럼 낙방자들의 귀향길 심정은 어땠을까.

유우잠(1575~1635)은 시로 심정을 표현했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신세, 필경엔 허황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라며 여러번 과거길에 올랐으나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탄해 했다.

하지만 선비의 자존심을 지킨 사람도 있다. 박득녕(1808~1886)은 "선비가 비록 과거에 낙방했다 하더라도 슬픈 마음이야 가질 수 없지 아니한가"

조령관문. 제2관문으로 주곡관 및 영남제2관으로 부른다. 같은 관문이지만 앞뒤 현판 글씨는 다르다.

그러니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 중 가장 험한 소백산맥을 넘는 문경새재에 애환이 서려있을 수 밖에.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선비 학자들은 죄다 이 재를 넘었다. 누구는 과거길, 누구는 유배길 그 목적도 다양했다. 그리고 멋진 시(詩) 한 수 정도는 남겼다.

조선초 문인 김시습이 넘었고, 율곡 이이도 넘었으며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도, 서포 김만중도 넘었다. 조선후기 정약용도 유배길에 이곳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선비의 정취를 남겼다. 그리고 이름조차 모를 수많은 선비들이 애환을 뿌리며 이 고개를 넘었다.

조령관문. 제3관문으로 조령관 및 영남제3관으로 부른다. 같은 관문이지만 앞뒤 현판 글씨는 다르다. 고개 정상에 있다.

오늘날 디지털화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지만 딱 하루만이라도 이 길을 걸으며 옛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건 어떨까. 나도 오늘 만큼은 시간을 거슬러 조선의 선비가 된다. 이 순간 모든 생각과 자세를 '선비 풍'으로 전환하고 이이를 따라가고 이황을 따라가본다...가슴을 활짝 열고 폼나게 걸어본다.

문경새재 과거길에 있는 각종 모습들. 시계방향으로, 선비들의 시비(詩碑). 낙동강 3대 발원지 중 하나. 조령원터. 명경지수와 바위. 새재길.

경상도 관찰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임무교대식을 했던 교귀정. 앞의 소나무가 일품이다.

길은 쉽다. 운동화만 신어도 좋다. 괴나리봇짐 대신 마실 물 한병 담은 작은 백만 하나 메고 가보자. 노폭 5m 안팎의 흙길로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이 함께 한다. 충청도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제3관문)까지 6.5km다. 제1관문서 제2관문까지 1시간, 제2관문서 제3관문까지 1시간 격이다. 왕복 4시간, 맑은 공기와 함께 운동은 절로 된다. 물론 올라갈수록 길은 조금씩 경사지고 좁아진다. 그래서 더 매력있지 않을까.

가는 길 중간 주막이 나타난다. 조선의 유명 선비들이 하룻밤 묵고 간 그 주막. 앙칼한 목소리의 주모가 주안상을 들고 금방이라도 달려나와 반겨맞을 것만 같다. 이런 분위기 어디서 또 느껴볼까.

선비 등 나그네의 애환이 서린 주막. 금방이라도 주모가 달려나와 반겨줄 것만 같다.

나그네와 말의 숙소인 조령원터, 사찰(혜국사), 경상도 관찰사 임무교대소인 교귀정, 아름다운 소(沼), 낙동강 3대 발원지 등이 즐비해서 지루할 겨를이 없다. 초입에는 사극세트장도 있다.

무엇보다 문경새재하면 동의어 격으로 조령관문이 있다. 관문은 출발점에 있는 제1관문(주흘관), 중간지점의 제2관문(조곡관), 정상의 제3관문(조령관)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칠 이 천하의 요새를 신립 장군이 부하장수의 말을 무시하고 충주 탄금대로 후퇴하는 바람에 왜군은 한양까지 직행하게 되는데, 이 관문은 이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임란 2년 후(1594년) 성벽 구축을 위해 제2관문을 먼저 건립했고, 제1 및 3관문은 1708년 숙종때 지었다. 위엄있는 관문의 모습이 지금은 든든해 보인다. 이 협곡에서 왜군을 막았더라면 쉽게 포위해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고개 정상의 제3관문은 자세히 보면 북쪽, 즉 충청도로 향해 문이 나 있다. 이는 왜군이 아닌 병자호란 등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이다.

많은 사람들은 제2관문에서 도시락을 비우고 되돌아 가지만 큰 맘먹고 과거길에 올랐으니 장원급제해야 하지 않을까. 제3관문까지 가보자. 그러면 귀향길(돌아오는 길)에 '금의환향길'이 반가이 맞아준다.

정상에 있는 제3관문까지 올랐다 내려오면 이 금의환향길이 맞아준다. 드디어 장원급제한 것이다.

(도움말: 역사적 사료 등은 '옛길 문경새재'의 저자이자 옛길 전문가인 문경 옛길박물관의 안태현 학예연구사께서 현장에서 도움을 주심)

■ 문경새재의 유래

: 새재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한자어로 조령(鳥嶺)이라고 부르는데 새도 넘기 어려운 높고 험한 고개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또 풀(억새)이 많아서 새재, 새로 난 길이라 해서 새(新)재, 하늘재와 이우릿재 사이에 있다 해서 새(사이)재라 부른다.

새재길 좌우로는 주흘산(1075m)과 조령산(1026m), 부봉, 영봉, 마패봉 등이 에워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소백산맥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이러한 봉우리들 사이의 협곡으로 새재길이 나 있으며 정상에서 충청북도와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다.

■ 선비

: 선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용어로 조선사회 자체가 선비문화였다. 선비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겸손 예의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유식자였다.

이이, 이황이 그랬고, 조광조, 조식 또한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해 조정에 들어가 신하가 돼 국정에 관여하거나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문과 급제를 통해 조정에서 활동하면서 무과 보다 우선 순위에 섰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과학자 등 이과 출신 보다 법, 경영학 등 문과출신이 더 우대받는 것도 이러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또 조선의 선비들은 임란 이후 일본사회를 안정시킨 공로도 크다는 주장이 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저서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에서 "에도막부가 납치해온 조선 유학자들에게 성리학을 배워 막부의 정통사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약 270년간 양국이 선린관계를 유지하는데 공헌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조선의 선비문화가 칼을 든 일본의 사무라이 정권을 제압한 것이나 다름없다.

■ 이이(李珥ㆍ1536~1584) 문경새재 시(詩)

'새재에서 묵다'(宿鳥領)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 산자락 주점은 길 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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