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박타박 천천히 걷습니다.. 그 길에서 행복을 품습니다

박경일기자 2012. 11. 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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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에 이어진 '제주 올레길'

2007년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출발한 제주 올레길이 이 달말쯤 제주 섬을 한 바퀴 다 돌아 5년 만에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당도해 마침표를 찍습니다. 시흥리와 종달리라니 시작과 끝의 마을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올레길이 출발하는 시흥리는 시작을 의미하는'비로소 시(始)' 자를 쓰고, 섬을 다 돌고 도착하는 종달리는 '끝 종(終)' 자를 쓰니 말입니다.

해안과 중산간, 마을의 흐려진 길을 한데 붙여 이어낸 올레길은 참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습니다.

먼저 그 길은 '걷는다'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걷는 일'이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멀미 나는 속도로 살아온 도시 사람들이 그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아름다운 경관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위안과 치유를 만났습니다.

가끔은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서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길 위에서 였습니다. 무릇 여행이라면 그곳의 사람들과 따스하게 교유해야 한다는 것도 그 길에서 배웠습니다.

여행의 방법부터 삶의 방식까지…. 올레길이 우리들에게 축복처럼 선사한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완전 개통을 앞두고 올레길의 마지막 구간 21코스를 미리 둘러봤습니다. 코발트빛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우도와 성산일출봉, 비스듬히 기운 가을볕을 받아 아름답게 물결치는 억새군락, 해가 넘어가고 난 뒤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중산간의 구릉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 청명한 가을날, 올레길과 오름을 딛고 가면서 제주에서 만나고 온 것들입니다.

여기다가 내친김에 몇 곳의 코스를 더 돌면서 차곡차곡 쌓여진 이야기도 찾아가 봤습니다.

# 제주 올레 마지막 길에서 만난 세 장의 그림

제주 동쪽에서 놓기 시작한 올레길이 5년여 만인 오는 24일 섬을 한 바퀴 돌아 출발지점으로 돌아온다. 총연장 400㎞가 넘는 올레길의 완전 개통이 목전에 다가왔다.

마지막 길, 그 얘기부터 하자. 올레길 마지막 구간인 21코스는 섬 동쪽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끝이 난다. 올레길이 끝나는 지점의 마을 이름 '종달(終達)'을 한자로 풀자면 '끝에 다다르다'는 뜻. 그러고 보니 올레길 제1구간이 시작되는 곳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다. '시흥(始興)'의 '시'가 시작을 의미하니 올레길의 시작과 끝은 일찌감치 마을 이름에 담겨 있는 셈이다.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몇 가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고종달이란 사신을 제주에 보냈는데 그가 처음 당도한 곳을 종달마을이라 이름 붙였다는 얘기. 또 제주 서쪽 두모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머리 두(頭)' 자를 써서 제주도의 머리이고, 종달리는 '마칠 종(終)' 자를 써서 제주도의 꼬리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제주 땅을 다스리던 목사(牧事)가 부임해 오면 지형도 익히고 민심도 살필 겸 섬을 한 바퀴 도는 '탐라순력'을 나섰는데, 그 출발 지점과 끝의 마을에 시와 종 자를 넣었다고도 전한다.

제주 올레 21코스는 제주 해녀박물관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해안을 따라 별방진과 각시당, 토끼섬 앞과 하도해수욕장을 지난다. 제주의 해안 풍경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만 이 구간에서 최고의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바로 해안 쪽에 딱 붙어 솟아오른 오름 지미봉이다. 지미(地尾)란 이름은 '땅의 꼬리'란 뜻. 올레길 마지막 구간으로 어찌나 딱 맞는 작명인지, 길이 여기까지 당도하길 기다려 이름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제법 가파른 사면을 올라 지미봉의 정상에 서면 도대체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망설여질 법하다. 사방 360도로 가장 '제주다운 풍경'을 담은 세 장의 그림이 펼쳐지니 말이다.

먼저 바다 쪽으로 보이는 한 장의 그림.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코발트빛 바다를 앞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풍경. 수심에 따라 채도가 달라지는 눈부신 청색의 바다 위로 고깃배들과 유람선들이 오가고, 내륙 안쪽에는 겨울의 초입에도 성성한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밭들이 펼쳐져 있다.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면 이번에는 두 번째 그림 한 폭이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제주 동쪽의 오름군락들이 첩첩이 겹쳐진다.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오름의 부드러운 선들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여기서 다시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줄곧 딛고 온 하도 쪽을 바라보면 세 번째 그림이다. 바다 쪽으로 불쑥 내민 곶 형태의 지형에 바다를 배경으로 빨간색과 파란색의 지붕을 얹은 집들이 '동화 속 세상'처럼 펼쳐진다. 한자리에서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 세 장이 펼쳐지니 여기서 더 무엇을 바랄까. 지미봉은 이른바 올레길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데 추호의 모자람도 없다.

# 올레 3코스… 두고 온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길

하지만 제주 올레 21개 코스를 어디 풍경의 우열만으로 가릴 일인가. 해안길은 해안길대로, 중산간길은 또 그 길대로, 돌담의 마을길은 또 그 나름으로 저마다의 매력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올레길이 놓이기 시작한 지 이제 5년. '제주 사람들의 삶의 길'이었던 올레길이 이제는 그 길을 걷는 이들의 발자국과 이야기가 차곡차곡 포개지며 잘 삭아가고 있는 중이다. 애초에 이 길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게 빼어난 풍경 때문이었다면 이제 다 놓은 올레길 위에 켜켜이 쌓여 가는 이야기들이 또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라. 모름지기 길은 걷는 이들이 만들어 가는 법. 그렇게 몇 곳의 올레길 코스를 밟으며 그 길을 걸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주워 모았다.

올레 3코스는 다른 올레길에 비해 걷는 이들이 적은 편이다. 온평포구에서 시작해서 중산간을 지나 통오름과 독자봉을 넘고 김영갑갤러리를 거쳐 표선에까지 이른다. 거리가 20.7㎞나 되는데다 이 중 14㎞ 구간이 중산간 지역을 통과하니 다른 코스보다 힘이 배로 든다. 그러니 이 코스를 택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호적한 길을 혼자 걸으며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거나, 깊은 생각거리를 들고 오는 이들은 부러 이 길을 찾는다. 이 길을 50대 중년의 여자가 찾아왔단다. 여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3코스를 걷고는 일정을 앞당겨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그 이유인즉 이랬다. 비가 오는 인적 없는 중산간을 지쳐서 걷던 그는 추위로 모진 고생을 했다. 묘지 옆을 지날 때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무서웠다. 그러다 앞서 걷는 이를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함께 걷자'고 했단다.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혼자 걷고 싶으니 그냥 가시라'는 것. 그때처럼 사람이 그리웠던 적이 없더란다. 시댁 식구들과의 불화로 제주행을 택했던 그는 "맘이 통하든 아니든, 말이라도 나눌 사람들이 있다는 게 이리 귀한 줄 몰랐다"며 그 길 끝에서 시어머니도, 얄미운 시누이마저도 보고 싶더란다.

3코스를 찾은 이들 중에는 '이별여행'을 온 젊은 커플도 있었다. 둘은 인적 없는 중산간을 걷는 내내 말 없이 걸었다. 우연히 남녀와 동행하게 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길을 걸으며 남자와 긴 이야기를 나눴단다. 3코스 종점 표선해수욕장에서 전화번호를 나누고 이틀 뒤 여자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서로 다시 노력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누구든 제 발자국 소리만 데리고 고요하게 걷겠다면 올레 3코스를 찾아가 볼 일이다. 일상에서 두고 온 것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가진 것들이나 가까이 두고도 몰랐던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니….

# 올레 7코스… 사랑을 만드는 길

올레길에는 로맨스도 있다. 아름다운 제주의 길 위에 로맨스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다. 제주올레 직원이 길을 잃은 여성 도보여행자를 구조하러 갔다가 결혼에 골인했다는 소설 같은 로맨스도 있고, 올레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다가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도 적잖다.

올레길의 로맨스 중에서 최고라면 올레길을 걷다가 만난 60대 남성과 50대 여성의 로맨스가 아닐까 싶다. 이들이 만난 것은 외돌개에서 법환, 강정포구를 거쳐 월평마을에 이르는 7코스였다. 바다를 끼고 가는 올레길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해질 무렵의 이쪽 길은 낙조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도회지에서 제주로 날아와 홀로 올레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맘이 통해 황혼의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곤 제2의 인생을 제주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7코스를 걸으면서 봐뒀던 법환포구의 집을 사들여 정착했다. 얼굴은 물론이고 이름도 드러내길 원치 않으니, 이들의 신상을 밝힐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등산복 차림이 아니라 제주 갈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부부가 황혼 무렵에 함께 손을 꼭 잡고 올레길을 걷고 있다면 이들이라고 믿어도 좋겠다.

한 중년의 남자가 열일곱 살의 아들과 일주일 일정으로 제주에 내려와 올레길을 걸었다. 그 마지막 구간이 7코스였다. 고교 1년생인 아들은 학교에서 말썽을 부려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이던 말썽꾸러기였단다. 올레길을 걷자고 했을 때 아들은 온통 불만투성이였다. 간식을 살 만한 마트도 없고, 제때 끼니를 때울 식당도 찾기 어려웠고 길을 놓치고 헤맬 때마다 짜증을 냈다. 그렇게 부자는 티격태격하며 며칠을 걸었는데, 어느 순간 아들이 달라졌다. 자신보다 걸음이 늦어 자주 뒤처지는 아버지를 보고 연민을 느껴서였을까. 자주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를 가디려주던 아들이 '아빠, 배낭 제가 대신 매드려요?"라고 묻는데, 아버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단다.

길 위에서 제주올레 직원을 만난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아들과 주고받은 이야기가 17년 동안 한 집에 살면서 나눈 이야기보다 더 많았다"며 "이런 길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란다.

# 올레길 모든 코스… 삶의 의미를 되새기다

'제주 이민'. 이즈음 제주로의 이주를 이렇게들 말한다. 제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을 이사가 아닌 '이민'으로 말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도회지에서 일궈온 삶을 다 내려놓고 제주로 가는 것은 그저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향이나 태도,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제주 이민은 올레길이 기폭제가 됐다. 사실 제주가 지닌 빼어난 아름다움이야 올레길이 놓이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굳이 걷지 않고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구나 풍광 좋은 곳을 앞에 두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건 늘 말로만 그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풍경의 아름다움만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올레길의 미덕은 제주 풍경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도회지에서 관성처럼 살아온 속도 위주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번잡한 일상과 욕심을 다 내려놓고 속도를 늦추고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제주의 푸릇푸릇한 길을 걷다 보면 행복을 느끼게 되고, 그 행복이라는 게 양손에 가득 든 쇼핑봉투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질주하는 도시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허덕허덕 지탱해 온 삶의 의미에 문득 마음이 가닿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던 송영필(47)씨는 2008년 올레길을 걷고난 뒤 직장에 사표를 내고 연고 하나 없는 제주시 애월읍으로 내려와 해안산책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그마한 커피숍 '키친애월'을 냈다. 억대 연봉을 받던 IT기업의 이사였던 박상국(45) 씨도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커피전문점 '스테이위드 커피'를 차렸다. 어디 이들뿐일까. 올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제주 이민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그렇게 거처를 옮긴다고 삶이 늘 행복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을 실현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밝다.

제주의 섬을 도는 올레길은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선사했고, 다른 이들에게는 주위 사람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따스한 마음을 선물했다. 그 길에서 잠깐의 동행을 만난 이들도 있고, 황혼의 나이에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이들도 있다. 올레길. 그 길이 우리에게 준 것이 이리도 많다.

제주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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