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가을, 이젠 '노을 속 군무'의 계절

서산·태안 | 박용하 기자 2012. 10. 3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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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시간에 늦기라도 한 걸까. 일군의 관람객이 초조한 얼굴로 갈대밭에 들어선다. 다행히 공연은 시작되지 않았다. 북쪽에서 날아온 '특급 무용수'들은 갈대밭 저편에서 날개를 가다듬고 있다. 참을성 없는 몇몇 관객은 벌써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하지만 무용수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무심한 태도에선 도도함마저 느껴진다.

관객들의 성화에도 아랑곳않던 이들, 하지만 일몰의 붉은 빛에는 한 치의 오차가 없다. 삽시간에 창공을 날아 모래톱으로 날아든다. 예닐곱으로 이뤄진 무리가 V자를 그리며 비행하자, 스무마리 남짓의 무리도 '끼룩끼룩' 울어가며 군무를 선보인다. 잠시 조용하더니, 이제는 대지가 웅성인다. 벌판에 있던 수만마리가 동시에 치솟았다. 천수만에서 펼쳐지는 '지상 최대의 쇼', 그 공연의 클라이맥스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황혼 무렵 천수만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철새들. | 서산시청 제공

▲ 시시각각 변하는 지상최대 '그림자 쇼'인근 천리포수목원은 벽안의 신사가 남긴 선물'비밀의 정원'서 1박하며 달빛 아래 들국화 감상을

■ 바다가 육지가 되자 찾아온 손님

= 천수만은 충청남도 서산 남쪽에 자리잡은 '만'이다. 안면도와 홍성 사이 바다가 길쭉이 머리를 디밀어 야트막한 물길을 이뤘다. 깊지 않은 수심과 심한 간만의 차는 연안어업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민들은 4600여만평의 갯벌에서 바지락, 김 등을 채집하며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1980년대 초 이곳은 변했다. 정부는 식량 증산을 위해 이곳 바다를 막아 농장을 만들기 원했다. 파도가 거칠어 꿈에 불과한 얘기였다. 하지만 '불도저'로 불렸던 현대그룹 정주영은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 버려진 유조선에 물을 채우고 물길을 막았다. 3000여만평, 전 국민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땅이 새롭게 생겨났다.

하지만 건설의 신화만큼 현실은 미덥지 못했다. 새 농지들은 국가와 기업이 가져갔고, 갯벌을 터전으로 하던 주민들은 생계가 무너졌다. 보상이 이뤄졌으나 충분치 않다는 호소가 터져나왔다. 많은 이들은 동네를 떠나고, 남은 주민들에겐 시름이 쌓여갔다. 그때 사람들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하늘에서 날아온 새들이었다.

■ 가을 들판에 펼쳐지는 새들의 검은 안개 =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철새들의 좋은 휴식지였지만, 천수만 간척지 일대는 더 특별했다. 기계화 영농을 하며 낙곡이 많아졌고, 담수호와 갈대밭은 새들의 흡족한 잠자리가 됐다. '본의 아니게' 새들의 최고급 휴게소가 된 셈이다. 천수만에는 겨울·여름 철새, 텃새 등을 포함해 300여종의 새들이 하루 최대 40여만마리 찾아온다. 기러기와 청둥오리, 얼굴에 태극무늬가 박힌 가창오리 등이 대표적이다. 천연기념물인 황새, 흑두루미도 있다.

이곳의 장관은 낙조 즈음 펼쳐지는 새들의 군무다. 발갛게 변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지상 최대의 '그림자 놀이'가 펼쳐진다. 황혼의 빛 사이를 새들의 실루엣이 가로지른다. 기러기 무리의 V자 비행도, 큰 고니의 우람찬 날갯짓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작품이 된다.

뭐니뭐니 해도 최고는 가창오리다. 천수만을 찾는 새들 중 숫자가 제일 많다. 30만마리가 동시에 하늘로 솟구치면, 수십만개의 검은 점이 붉은 하늘의 캔버스에 펼쳐진다. 형상도 시시각각 변한다. 회오리 같기도 하고 커튼 같기도 하다. 심약한 이는 공포영화를 떠올릴 법하다. 하지만 한산한 가을 들판에 펼쳐지는 검은 안개는 두렵다기보단 정겨운 풍경이다.

■ 벽안의 한국인이 남기고 간 선물, 천리포수목원 =

'화려한 손님' 천수만 철새들의 공연을 맛봤다면, 지척인 태안 천리포에도 들러보자. 그곳에는 푸른 눈의 객이 남기고 간 비밀의 화원이 있다. '천리포수목원'이다.

벽안의 한국인 민병갈 박사(미국명 칼 페리스 밀러·1921~2002)는 1945년 스물네살이 되던 해 미군 장교로 한국을 찾았다. 혈육 하나 없는 이국땅이었지만 그는 이 땅의 산하에 깊이 빠졌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온갖 산을 누볐다. 한국전 당시 북진할 때도 "이제 북한의 산을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는 특히 태안 천리포의 자연에 반해 자주 찾곤 했다. 1962년 이곳을 찾았을 때 한 노인이 그에게 다가와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다"며 땅 4500평을 사달라 제의했다. 당시 천리포는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농사도 지을 수 없는 황무지였다. 하지만 민 박사는 그 자리에서 땅을 사들였다. 그러고는 모래땅에 자신이 사랑한 한국의 나무들을 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소설 < 나무를 심은 사람 > 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에 빗대곤 했다.

천리포수목원 닛사나무 단풍. 잔가지가 우산처럼 늘어져 독특한 모양을 이뤘다. | 박용하 기자

민 박사가 나무를 심은 지 30여년, 그가 산 모래땅은 이제 거대한 수목원이 돼 있다. 현재 이곳은 18만평. 우리나라 자생식물과 전 세계 60여개국에서 들어온 도입종 약 1만3200여종이 자라고 있다. 2000년에는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 2만평의 정원을 걷다 =

천리포수목원은 2009년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허락을 받은 연구자나 후원회원만이 출입할 수 있어 '신의 비밀정원'이란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민 박사 타계 뒤 재정적 어려움이 계속되자 전체 7개 지역 중 하나인 '밀러가든' 2만평을 개방했다. 현재 연 방문객 수는 20여만명에 달한다.

수목원 입구에 들어서면 길 옆에 난 해송 사이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밀려온다. 5분여를 걷다보면 왼편에 낭새섬과 천리포 해변이 펼쳐지고, 오른편에는 가을날의 단풍과 목련, 호랑가시나무가 호젓한 정취를 자아낸다. 가을이 아니라도 좋다. 늦은 봄 이곳에는 분홍빛의 콴잔벚나무 꽃잎이 융단처럼 깔리고, 겨울에는 눈 속에 벚꽃이 핀다.

천리포수목원의 백미는 '하룻밤 묵기'다. 전국의 수목원들 중 유일하게 숙박이 가능하다. 숙소는 우리 옛집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아담한 연못이 눈에 들어오고, 집 옆으론 소박한 들국화가 피었다. 숙소가 수목원 내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객들은 '왕의 산책'을 체험할 수 있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2만평의 정원을 홀로 걷노라면, 번잡한 근심 하나쯤은 덜어놓을 수 있다.

민병갈 박사의 흉상 옆 목련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나무에는 최근 민 박사의 유골이 수목장으로 묻혔다. "내가 죽으면 묘를 쓰지 말고,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를 더 심으라"던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국만리에서 온 벽안의 남자는 왜 조국도 아닌 타국에 나무의 천국을 만들었을까…. 살아생전 민 박사가 남긴 대답이다. "수목원이 내가 제2의 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값진 선물로 남기를 바란다."

■ 서울에서 천수만까지는 차로 2시간쯤 걸린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에서 안면도 방향으로 14㎞쯤 달리면 A·B방조제를 만날 수 있다. 방조제 인근의 간월호와 간월도, 부남호 일대가 새들이 찾는 곳이다. 천수만의 새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다면 '서산버드랜드'에서 운영하는 탐조 투어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1시간여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한다. 간월호 주변 30㎞를 돌며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 천수만을 들른다면 30분 거리에 있는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도 둘러보자. 한국 근현대 회화의 거장 이응노 화백의 작품과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이 화백은 외국에서 오랜 기간 작품생활을 했으며, 귀국할 즈음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고를 치렀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선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가 묻어난다. 감옥에 있을 당시 폐휴지를 훔쳐 고향의 풍경을 그려낸 작품은 가슴 한편을 아련하게 한다.

■천리포수목원은 충남 태안군 소원면 태안반도 북단에 있다. 서산IC에서 서산 방향으로 진입, 태안과 만리포해수욕장을 거치면 수목원에 들어선다. 동절기 개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관람시간은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생태교육관과 게스트하우스 두 종류의 숙소를 예약할 수 있다. 현대식 건물인 생태교육관은 인원에 따라 1박에 5만~20만원을 받는다(동절기 기준). 전통 가옥인 게스트하우스는 15만~27만원(주말 기준)에 예약할 수 있다.

< 서산·태안 |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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