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2) 강원도

속초·양양·동해 2012. 10. 18.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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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잔의 소주와 같은 바다였다.. 그 바다가 있는 곳. 묵호 (소설 '묵호를 아는가'中) 논골 마을 담벼락엔 묵호항 사람들 이야기 담은 벽화

책 읽기 좋은 계절을 맞아 '매거진 +2'는 책 한 권과 카메라 하나 들고 떠나는 '문학여행'을 시리즈로 소개하고 있다. 1편 인천에 이은 두 번째 여행지는 '항항포포'(한승원)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윤대녕) '7번국도'(김연수) '묵호를 아는가'(심상대) 등에 등장하는 강원도다.

◇짙푸른 바다에 발을 묻은 갯바위, 속초와 양양"하긴, 그래도 속초 해돋이는 봐야겠죠? 혼자라도 말예요."(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애인 없어도 된다. 혼자 봐도 좋은 게 속초의 해돋이다. 해돋이 명소로 꼽히는 속초 동명항 영금정(靈琴亭)과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에 갔다. 지금 가면 새벽이라도 춥지 않고 코끝을 알싸하게 스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해돋이를 볼 수 있다.

"속초 동명항으로 갔다. 영금정에 올라가 바다 구경을 했다. 항구와 속초시 저쪽으로 무겁게 침묵하고 있는 설악산의 웅대한 자태가 가슴을 압도했다. 높은 산은 머리를 신화 속에 묻고 있는 존재이다. 침묵은 숭암한 신이다. 바람이 세차졌고, 파도가 전보다 더 드높아졌다. 파도들은 갯바위에 와서 하얗게 부서졌다." (항항포포 中)

한승원의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 임종산은 유부남인 주제에 세상을 떠난 내연녀의 흔적을 추억하며 흑산도부터 부산, 제주도까지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물론 이 여정에서도 여자는 함께다. 그는 영금정에서 바다를 본 뒤 회 한 접시에 소주를 걸치고선 여자에게 시까지 읊어준다. 이게 다 영금정에서 본 바다 때문이다.

지금은 바다 쪽에 만들어진 정자 두 개를 영금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원래는 바다 저 밑에 뿌리를 두고 정자를 받치고 있는 너럭바위와 그 바위가 이어져 육지에서 솟은 바위산이 그 이름의 주인이다. 암벽 사이로 치는 파도소리가 거문고의 울음소리처럼 신비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귀를 쫑긋 세워보아도 거문고 소리는 듣기 힘들다. 일제 강점기 때 속초항 방파제 건설용 골재를 채취하기 위해 바위를 폭파했다고 한다. 그래도 세찬 파도 소리와 검은 바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바닷물은 여전히 관능적이다.

"속초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홍련암으로 갔다. 홍련암은 쪽빛으로 탁 트인 바닷가 언덕 위에 날아갈 듯이 앉아 있었다. 울긋불긋 단청이 꽃송이들로 장식을 해놓은 듯싶었다. 홍련암이 건너다보이는 자리에서 그는 발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암자를 보며 말했다. '그림 같아요'."(항항포포)

홍련암에 얽힌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믿기 힘든 '환상'에 가깝다. 의상대사가 입산하는 도중에 돌다리 위에서 색깔이 파란 이상한 새를 보고 이를 쫓아 석굴에 들어갔다. 석굴 앞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나체로 정좌하여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더니 7일 만에 깊은 바다 속에서 홍련(紅蓮·붉은 빛깔의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고 한다.

"홍련암이 앉아 있는 언덕의 밑뿌리는 검은 갯바위였고, 그것은 짙푸른 바다 밑에 발을 묻고 있었다. 쪽빛의 먼바다에서 달려온 파도들이 그 검은 바위를 들이받고 있었고, 그때마다 흰 물보라가 일어났다."(항항포포)

홍련암과 10분 거리에 의상대가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다. 의상대에서 홍련암을 바라보는 것보다 그 반대가 더 낫다. 검은 바위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세차게 부딪치는 파도는 화려한 홍련암보다는 단출한 의상대와 더 잘 어울린다.

◇아직도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도로, '7번 국도'"그해 여름 우리는 대략 하루에 1,000㏄씩 한 달 동안 모두 30,000㏄의 생맥주와 수십 마리의 말린 바다생물을 씹어먹으며 7번국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건 마술쇼를 보러 가는 저녁 나들이, 어쩌면 판돈을 다 따기 위해서 가진 재산을 모두 거는 마지막 도박판 혹은 완전한 망각, 망실, 망명, 그러니까 무의 존재를 향한 매혹적인 여행의 시작이랄까."(7번 국도)

동해안 드라이브나 자전거 여행은 길이 꼬불꼬불해도 옛 7번 국도를 이용하는 게 좋다. 7번 국도는 부산에서 시작해 포항을 거쳐 영덕·삼척·강릉·속초를 지나는 도로다. 산등성이를 돌 때마다 산과 바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풍경을 빚어낸다. 새로 뚫린 7번 국도는 길도 넓어지고 직선으로 쭉 뻗었지만 해안과 떨어져 바다와 함께 달리는 재미는 떨어진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묵호"바다, 한잔의 소주와 같은 바다였다.(중략) 내게 있어서 동해 바다는(동해에 바다가 들어갔는데, 동해 바다라고 한 건 잘못된 표현 아닌가?)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 한잔의 소주를 연상케 했다. 어느 때엔, 유리잔 벽에서 이랑 지어 흘러내리는 소주 특유의 근기를 느껴 메스껍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단숨에 들이키고 싶은 고혹적인 빛깔이었다. 파르스름한 바다. 그 바다가 있는 곳. 묵호.(중략) 바다가 그리워지거나, 흠씬 술에 젖고 싶어지거나, 엉엉 울고 싶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허둥지둥 이 술과 바람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묵호는, 묵호가 아니라 바다는, 저고리 옷고름을 풀어헤쳐 둥글고 커다란 젖가슴을 꺼내주었다."(묵호를 아는가)

동해 중에서도 유난히 투명해 '소주 같다'는 얘길 듣는 묵호(墨湖)의 이름이 왜 하필이면 '검은 호수'일까. 물이 너무 맑다 보니 해저(海底)의 검은 바위가 투명하게 드러나 보여 바다가 검게 보이는 것이다.

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묵호등대가 자리 잡고 있다. 동해의 원경(遠景)을 보고 싶으면 등대에 올라야 한다. 묵호항에서 등대로 올라가는 논골담길은 좁고 가파른 길 양쪽으로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을 얹은 집들로 빼곡했다. 빨랫줄에 걸어놓은 가자미가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해풍에 꾸덕꾸덕 말라간다. 논골은 30여년 전만 해도 명태와 오징어가 많이 잡히던 동해의 대표적인 항구마을이었다. 그러나 어획량이 줄어들면서 북적대던 마을은 썰렁한 동네로 전락했다.

작년 말 동해문화원은 이 마을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매일 새벽 어선들로 활기를 띠었던 묵호항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를 그려넣었다. 벽화에는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항구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는 묵호의 전성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신고 다니던 장화를 담벼락에 가득 그려넣었다. 이름하여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 '신발은 집 쪽으로'도 있다. 뱃일하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못했던 남편들을 향한 '마누라'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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