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시대 성범죄, 어떤 처벌 받았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2012. 10. 1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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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어린 아이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 < 태조실록 > )

"칠원사람 정경이 처녀 연이를 강간하려 밤새도록 때렸으나 연이가 완강히 항거하다 죽었습니다. 청컨대 정경은 교수형에 처하고, 연이는 정문(旌門)을 세워 그 정절(貞節)을 표창하게 하소서."( < 세종실록 > )

강간죄를 처벌한 조선시대의 법률은 이렇듯 추상 같았다. 모두 1367년 제정된 명나라 법인 < 대명률 > 에 따른 처벌이었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 < 대명률 > ·'형률·범간조(犯奸條)')

'강간죄'의 구체적인 처벌규정은 다음과 같다.

젊은 양반이 이웃집 여인을 희롱하는 장면을 그린 혜원 신윤복의 < 소년전홍(少年剪紅) > . 조선시대 땐 가벼운 성희롱도 중형의 처벌을 받았다. |간송미술관 ■강간범은 교수형, 성희롱도 곤장 80대

"부모상 또는 남편상을 당한 자와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와 도사(道士)·여관(女冠·여자 도사)이 간음을 범하면 범간죄에다 2등을 더해 가중처벌한다."( < 대명률 > ·'거상급승도범간조(居喪及僧道犯奸條')

욕정을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뼈도 못추릴 엄격한 형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성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1404년(태종 4년)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그들의 처남인 박질이 능지처사의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판사(1품~3품까지의 고위직) 이자지 부부가 잇달아 사망했다. 그러자 그의 16살 짜리 딸 내은이가 삼년상을 행하려 했다. 그런데 가노(家奴)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 등 3명이 내은이를 자기 집으로 끌고가 손발을 묶었다. 내은이는 밤새도록 저항했으니 그만 힘이 빠져…."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이 사지를 서서히 찢어죽이는 극형(능지처사)을 받은 것은 상전을 겁간했기 때문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성희롱도 엄한 처벌을 받았다.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한 앳된 부인이 편복 차림으로 여종을 거느리고 여종 2명을 데리고 성균관 옆 냇가를 건너고 있었다. 그 때 그곳에서 옷을 홀랑 벗고 목욕을 하고 있던 생원 최한경이 갑자기 뛰어나가 여인을 쓸어안았다. 부인이 완강히 항거했다. 계집종이 "우리집 안주인이시다"라고 외쳤다. 최한경과 함께 목욕을 했던 동료 두 명이 여종들을 때려 �아냈다. 세 명은 완력으로 여인을 눌러 옷을 벗기고 욕 보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부인의 입자(笠子)를 빼앗아 도망쳤다. 큰 일을 당할 뻔했던 여인은 사헌부에 최한경을 비롯한 유생들을 '강간미수죄'로 처벌해달라고 고소했다. 유생들은 단지 "희롱을 했을 뿐 강간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사헌부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뒤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처벌을 내렸다. < 대명률 > 에 따르면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와 유배 1000리라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최한경은 강간미수와 성희롱의 경계선에서 장 80대로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다.

■강간미수로 노비전락

예나 지금이나 인면수심인 사람들이 있었다.

1477년(성종 8년), 내은산이라는 사람은 의붓아버지와 짜고 양녀 덕비라는 여인을 부인으로 삼고자 했다. 이들은 덕비와 덕비 아버지가 길을 가는 것을 보고는 아비를 강제로 붙들고, 덕비를 업고 달아났다. 덕비는 내은산의 집으로 끌려가 강간을 당하고 말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짜고 천인공노할 짓을 지지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들 내은산은 교수형의 처벌을 받았다.

사족(士族)의 부녀를 강간하려 한 전직 공무원은 '강간미수'임에도 노비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군수를 지낸 황우형이 그 오명의 주인공이다. 황우형은 1472년(성종 3년) 4월 한밤중에 사족의 부녀인 반씨의 방에 들어가 강간을 하려다가 반씨의 어머니와 종이 막아서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성종은 '죄질이 좋지 않다'는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황우형의 적첩을 거두고 영원히 등용하지 않으며,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내린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 처벌 또한 부족했던 것일까. 황우형은 변방 중의 변방인 회령의 관노(官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사면령에도 빠진 강간죄

강간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다. 국가의 경사 때 종종 행했던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되지 않았다. 예컨대 성종임금은 1471년 1월24일 20살의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를 의경왕으로 추서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중죄를 나열했다.

"24일 새벽녘 이전에서부터 모반(謀反)·대역 모반(大逆謀叛)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염魅)한 것과, 강간·강도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1481년(성종 12년) 처삼촌의 조카딸을 강간한 최습은 뜻밖에 사면을 받았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감찰업무를 담당한 장령(掌令) 이감이 이의를 제기한다.

"최습의 죄는 강상(綱常·삼강오륜)에 관계되므로 사면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영을 내린다.

"이미 대사면령이 지났으므로 용서한 것이다. 하지만 죄가 정말 중하구나. 그렇다면 전가사변(全家徙邊)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전가사변'이란 일족이 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하는 중벌이다.

장형을 받는 모습을 그린 기산 김준근의 < 조선풍속도 > . |숭실대박물관 ■명나라군의 성범죄도 효수·참수형

요즘에도 주한 미군의 성범죄가 종종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한미행정협정 등에 의해 한국 국내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 때마다 굴욕적인, 불평등 협정이라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조선의 경우는 어땠을까. 도리어 지금보다 더 엄정한 법의 잣대로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때는 1597년(선조 30년) 8월6일 밤이었다. 덕지(德只)라는 여인이 흰 옷을 입고 시장 골목길을 지나는데 한 중국군인이 붙잡고 강간하려 했다. 여인이 끝끝내 항거하자 중국인이 칼을 빼들고 여인의 볼과 목을 찔렀다. 그 때 지나던 아이가 '강도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중국군인은 그 소년을 죽였다. 중국인은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파귀 유격(頗貴 遊擊)휘하의 군인이었다. 사건을 조사한 명군의 파귀 유격은 여인의 진술이 100% 맞다고 판단했다. 파 유격은 길 가던 여인을 겁탈하려 했고, 죄없는 소년까지 살해한 중국군인 이종의를 종루(종각)거리에서 목을 베었다.

또 있다. 1598년 8월 명나라 유정 제독을 수행한 접반사 김수가 선조임금에게 고한 내용이다.

"중국 군사들이 마을을 출입하면서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했으며, 심지어는 소녀까지도 강간했습니다. 이 일이 발각되자 유정 제독이 죄질이 나쁜 자들을 잡아 효수하였습니다."

명의 지휘관들이 전쟁 중이라는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군기를 훼손하는 성범죄자들을 참수나 효수형으로 엄단했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추상같은 척결이다.

■천하의 난봉꾼이었던 세종대왕 손자

부녀자 강간죄가 추상같다 해도 천민의 경우 법률에 따라 교수형으로 처벌됐지만, 양반의 경우엔 장과 유배형 등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종친이나 부마와 같은 왕실 사람의 경우 처벌에 어려움이 많았다.

1489년(성종 20년) 대신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 청풍군 이원(1460~1504)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은 것이다.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청풍군 이원은 세종의 막내인 영응대군의 외동아들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7촌 숙부인 이효창의 첩기인 홍행을 간통한 죄로 파직당했다.

특히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부음을 듣고도 홍행의 집에 머물다가 탄핵받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의 일이 일어났다. 징계 중에 다시 홍행의 집을 찾았다가, 역시 그 집을 찾은 당대의 난봉꾼인 부평부사 김칭과 큰 길에서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 청풍군은 이 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못말리는 난봉기질은 유배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유배지에서 청상과부를 강간한 것이다. 그 천인공로한 일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지만 그 곳에서도 남의 논밭과 우마를 빼앗는 등 완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성종 임금이 갖은 악행으로 원성이 자자한 청풍군의 작위를 회복시킨 것이다. 대신들도 더는 참지못하고 들고 일어선 것이다. 대사헌 송영 대사간 김경조 등의 상소를 보자.

" < 서경(書經) > 에 '벼슬은 사사로이 친하다 하여 줄 수 없고 오직 유능한 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종실의 지친인 청풍군 이원은 정희왕후의 상중(喪中)에 애통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도 상을 듣고도 이튿날 도리어 음란한 짓을 행하였습니다. ~그 죄는 죽여도 용납받지 못할 것이나,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따라 외방에 부처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조심하지 않고 국상(國喪) 이 끝나지 않아서 또 새로 과부된 여자를 강간했으니 그 완악함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으므로 종신토록 외방에 부처해야 하는데~ 그런데도 얼마 되지 않아 용서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어찌 작위까지 주어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성종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원은 세종(世宗)의 손자이며, 영응 대군의 외아들이다. 어머니(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제사를 받들기를 부탁하였음으로 특별히 사면한 것이다."

■아들을 강간죄로 처벌한 선조임금

그러나 비슷한 사안이라도 선조 임금의 조치는 추상같았다.

1600년(선조 33년) 7월 16일 선조 임금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지엄한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아들인 순화군 이보(1580~1607)를 법에 따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이보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다. 여러차례 살인을 했고~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 할 뿐이었다.~오늘 빈전의 곁 여막(무덤을 지키려고 옆에 지어놓은 초가)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를 겁간했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대신들을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

신하들이 "골육 사이의 정이 있으니 화를 참으시라"고 상주했지만 선조 임금은 단호했다.

"상중에 백주대낮에 궁인(宮人)을 겁간한 자식을 용서할 수는 없다."

결국 아버지 선조임금은 아들 순화군 이보를 유배형에 처함과 동시에 녹안(錄案)의 결정까지 내린다. 유배형은 강간죄, 녹안은 < 경국대전 > '금제조'의 조항, 즉 "사인(士人)으로서 패륜행위를 한 자는 녹안한다"는 각각 따른 것이다. 녹안은 범죄사실을 기록하는 처벌이다. 한마디로 전과기록이므로 순화군으로서는 치욕적인 처벌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가중처벌을 내린 것이다.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김윤보의 < 형정도첩 > . 성폭행죄가 바로 교형, 즉 교수형에 해당되는 중벌로 취급됐다. ■욕을 본 여성이 자살하면 '열녀' 대접

그런데 강간사건을 다룬 실록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간과해서는 안될 내용이 적잖다.

강간을 당하거나 성희롱을 당한 여인이 자살할 경우 '열녀'라고 칭송하는 대목이다. 1737년(영조 13년) 창녕에 살던 17살 소녀 문옥이가 팔촌인 문중갑과 나무를 함께 하다가 성희롱을 당했다.

문옥이가 "같은 성씨끼리 무슨 짓이냐"며 꾸짖고 옷소매를 떨치고 돌아왔다. 하염없이 울던 문옥이는 몰래 독약을 구해 마시고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은 소녀에게 "정절을 지켰다"는 이유로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1787년(정조 11년) 전라도 남원부의 유학자 정조문의 처 이씨가 집 뒤 시냇가에서 쑥을 캐고 있었다. 그때 이웃에 살던 권만세라는 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손을 잡고 강간하려 했다. 이씨는 죽기를 각오하고 반항하자 권만세는 도망가고 말았다. 치욕을 당했다고 여긴 이씨는 분한 나머지 손도끼로 오른팔을 자르고 목을 베려고 했다. 마침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이씨의 자살을 가까스로 막았다. 이 사실은 암행어사의 서계로 조정에 알려졌다. 이씨는 '열녀'의 이름을 얻었고, 정려문이 세워졌다.

정절을 지키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끊어려 했던 여인에게 상을 내린다? 일견 좋은 일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좀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정이 나서 자살을 독려하는 꼴이 아닌가?

■강간당하고도 재혼녀라고 폄훼된 사연

또 웃기는 대목이 있다. 강간을 죄질이 아주 나쁜 범죄라 비난하면서, 피해자인 여인의 정조를 거론하는 대목이다.

1520년(중종 15년)의 일이다. 영의정을 지낸 고(故) 박원종에게 진주라는 첩이 있었다. 귀화한 사람인 낭근손이라는 자가 진주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거절 당하자 낭근손은 진주의 집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 때 진주가 재빨리 피해 달아났기 때문에 낭근손은 허탕을 치고 말았다. 조정에서 "만약 진주가 집에 있었다면 반드시 강간을 했을 것이니 강간미수죄로 처벌하는게 옳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그렇다면 < 대명률 > 에 따라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의 중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사헌부는 '장 80대'의 처벌로 경감한 판결문을 중종임금에게 올렸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처음에는 낭근손이 수절하는 재상의 첩을 강간하려 한 죄로 엄히 처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사를 하다보니 진주가 이미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절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수절 하지 않은 여인을 강간미수했다면 죄가 경감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중종이 언성을 높였다.

"이 사건은 길 가는 남자가 길 가는 여자를 우연히 범(犯)한 일과는 다르다. 근손이 진주 집의 문을 밀치고 돌입하여 뒤쫓기까지 하였으니, 그것이 강간한 것과 다를 게 뭐 있는가. 강포한 무리들이 이런 방자한 행위를 본뜬다면 이는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바가 큰 것이니, 다시 조율하여 강포한 무리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죽은 여인을 두 번 죽인 사연

이 뿐이 아니다. 1494년(성종 25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이 아뢴다.

"안음현(함양)에서 지아비를 잃고 시부모와 살던 옥금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노(私奴) 석을만이 옥금을 강간하려고 달려들어 마구 때리자 옥금은 스스로 목을 매 죽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옥금이 시부모의 허락을 얻어 친정(거창)에 가다가 사노 석을만 등 3명이 길에서 욕을 보이려고 했다. 옥금이 거절하고 집으로 왔는데, 석을만 등이 집을 찾아와 달려들었다.

옥금은 "간악한 종놈이 어찌 수절하는 여인에게 무례한가"라고 꾸짖고는 "차라리 죽을 지언정 욕을 당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그런 뒤 곧바로 목을 매고 말았다.

그런에 이 사건을 다루는 조정의 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형조는 "절개를 지키려고 생명을 버린 옥금을 열녀로 삼아 상을 내려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단서를 단다. 옥금이 만약 재가를 했던 여자라면 그곳은 절개를 이미 훼손시킨 셈이므로 상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임금마저 "만약 재가한 여자라면 절대가 그다지 높다고 볼 수 없으니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임금의 명에 따라 관찰사가 사건을 재조사한 끝에 옥금의 절개 사실이 재차 확인됐다. 하지만 강간을 피하려 스스로 목을 낸 여인을 두고 재가 여부를 확인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버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억울하게 죽은 여인을 두번 죽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종대왕은 과연 성군인가?

1436년(세종 18년) 임복비라는 여인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면 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복비는 일찍 이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첩인 소근의 집에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소근의 아들, 그러니까 서형(庶兄)인 어연이 짜고 복비를 강간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된 것이다. 복비의 숙부는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으나 나몰라라 했다. 숙부는 복비의 임신사실을 알고도, 복비를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 박아생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했다. 복비로서는 뱃속의 아이가 큰 일이었다. 숙부에게 "나중에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지만 혼인은 일사천리로 성사됐다. 혼인을 마친 복비는 신랑 박아생을 따라 길을 떠났다. 아이를 낳을 날짜가 임박한 복비로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거짓으로 신랑에게 말했다.

"몸이 너무 안좋습니다. 숙부의 집으로 돌아가서 치료한 뒤에 시집으로 가겠습니다."

"병이 심하다"는 신부의 말에 신랑은 "좋다"고 했지만, 숙부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댁에서 치료해라."

더 이상 묘책을 찾을 수 없던 복비는 도망가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을 강간해서 아이를 임신시킨 어연과 함께…. 두 남녀는 곧 체포됐다. 복비는 신랑을 버리고 내연남과 도망 갔다는 죄로 교수형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복비의 종이 글을 올려 어연이 복비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남김없이 고했다. 조정은 복비의 일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임금과 황희 정승 등은 "나중에 둘이 도망을 갔지만 처음엔 복비가 거절했으니 사형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세종 임금은 "복비를 변방의 관비로 보내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하지만 형조판서 정연 등은 "복비가 절개를 지키지 않았으니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결국 세종도 그의 말에 따랐다. 이로써 복비를 교수형에, 강간범인 어연은 참형에 각각 처했다. 그리고 어연의 어미도 강간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했다. 조카딸의 사정을 알면서도 나몰라라 하고, 시집까지 보내려 한 숙부는 변방의 군인으로 삼아 내�았다.

이 사건을 보면 분노가 치솟는다. 강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임신까지 당하고, 거기에 억지결혼, 그리고 퇴로 없는 도피행각…. 그녀가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와 도피를 벌인게 크나큰 죄라고? 그렇다면 그 아이까지 밴 그 기구한 여인이 대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여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극형을 결정한 세종대왕은 과연 만고의 성군이 맞는가.

■유감동 여인의 한 서린 삶

또 기구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세종대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희대의 요부' 유감동(兪甘同)이다.

유감동은 당시 40여 명의 권문세가들과 정을 통한 음탕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살필 때 과연 그녀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유감동의 아버지는 한성부사(검한성·檢漢城)을 지낸 유기수였고, 남편은 평강 현감 최중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요양하러 가던 유감동은 김여달이라는 남자에게 강간 당한다. 김여달이 순찰을 핑계로 유감동을 위협해서 욕을 보인 것이다. 김여달은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남편 최중기가 버젓이 있는 유감동의 집에까지 찾아가 거리낌없이 간통하기 시작했다.

이쯤해서 유감동은 여느 여염의 여인과 달랐다. 남편과 잠을 자다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김여달을 만나기도 했다. 남편이 무안군수가 되자 유감동은 병을 핑계삼아 서울로 올라와 온갖 추문의 주인공이 됐다. 유감동은 결국 남편과 이혼했다. 그때부터 유감동은 창기(娼妓)를 자처, 한성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뭇 남성들과 정을 통하기 시작했다.

1427년(세종 9년) 8월17일 임금이 묻는 내용이 재미있다.

"사헌부에서 음부(淫婦) 유감동(兪甘同)을 가뒀다는데, 대체 간부(奸夫)는 몇이나 되는가?"

좌대언 김자가 대답했다.

"간부는 이승·황치신·전수생·김여달·이돈 등과 같은 사람이고, 기타의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사옵니다."

추가조사 끝에 유가동의 간부는 모두 4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논하는 조정대신들은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남성들을 꾸짖기 보다는 유감동을 처벌하는 방안에 중점을 둔다.

"유감동은 사족(士族)의 딸로써 남편을 배반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여…. 스스로 관기(官妓)라 일컬으면서 사욕을 제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며, 인륜(人倫)을 문란시킴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비상한 형벌에 처하여 뒷사람에게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유감동이 강간을 당했다는 말은 쏙 빼고, 인륜을 문란하게 했다는 등 꾸짖음으로 일관한 것이다.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아무 일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양반가 안방마님으로 살았을 유감동이 아니었던가.

가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여인네들이다. 또하나, '강간죄=교수형'의 원칙으로 엄벌에 처했던 조선시대였지만, 그 천인공노할 죄는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냥 징역 몇 년만 살고 나오는 요즘은 더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죄질을 본다면 그냥 확 궁형(宮刑)에 처하면 어떨까. 그것이 너무 중한 처벌이라면 얼굴에 '난 성범죄자요'라고 새기는 자자형(刺字刑)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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