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도 걷는 길이 있었다니

이오성 기자 2012. 10. 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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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갔다. 쇼핑하러 간 것이 아니다. 딤섬 먹으러 간 것도 아니다. 걷기 여행을 위해 다녀왔다. 누아르 영화 속 홍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확실히 홍콩은 한국의 63빌딩 정도는 땅딸보라며 놀림받기 딱 좋은, 압도적인 마천루의 숲이다. 그리고 그 빌딩 사이로 개미굴 같은 아파트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인생들이 있다.

우리가 몰랐던 홍콩

서울 명동 거리에 10분만 서 있어도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홍콩은 사실 지옥이다. 서울의 1.8배 크기인 면적에 700만명이 북적이며 살아가고, 매년 관광객·무역업자 등 4000만명이 찾는 '향기로운 항구'(香港)이다. 지하철이든 식당이든 어딜 가나 인파에 쓸려 다닌다. 하물며 이런 곳에서 걷기 여행이라니….

ⓒ시사IN 이오성 홍콩 트레일은 표지판이 잘 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홍콩의 반쪽일 뿐이었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가슴이 탁 트이는 대자연이 있었고, 그 대자연을 즐기는 트레킹 인구도 꽤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홍콩을 몰랐다.

알고 보면 홍콩은 트레일 강국이다. 산악 지형인 탓에 홍콩은 전체 면적의 25% 정도밖에 개발이 되지 않았다. 홍콩 정부는 30여 년 전부터 이런 그린벨트 지역을 트레일 코스로 만들어놓았다. 도심과 떨어진 카우룽 반도(구룡반도) 외곽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기업과 관공서가 밀집한 홍콩 섬에도 걷기 여행 코스가 있다. 가까운 주변 섬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그 길이가 400㎞를 넘는다. 짧게는 2박3일, 길게는 4박5일 정도 홍콩에 머무를 이를 위해 두 가지 코스를 소개한다.

세계적인 트레일, 드래곤스백

먹을거리·볼거리 즐비한 홍콩 여행 내내 걷기만 할 수는 없다는 여행자는 드래곤스백 트레일(Dragon's Back Trail)을 택하면 된다. 더운 날씨라도 넉넉잡고 3~4시간이면 홍콩 트레일의 알짜를 맛볼 수 있다. 무엇이든 순위 뽑기를 좋아하는 미국 < 타임 > 아시아판이 2004년 '아시아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제주올레가 생기기 전이었다.

ⓒ시사IN 이오성 거리와 소요시간이 나온다(위). 드래곤스백 트레일 정상으로 난 길을 여행자들이 걷고 있다

어쨌든 '명불허전'이다. 드래곤스백 트레일은, 말 그대로 용의 등처럼 생긴 길을 말한다. 한자로는 용척(龍脊)이라 쓴다. 트레일 주요 구간이 아래위로 요동치며 이어져 있다(길의 높낮이가 꽤 변화무쌍하다는 뜻이다). 4.5㎞에 지나지 않은 짧은 구간이지만 홍콩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가는 방법도 어렵지 않다. 홍콩 섬 중심부에 있는 센트럴 역에서 지하철(MTR)을 타고, 샤우케이완(Shau Kei Wan) 역에 내린 뒤 A3 출구로 나간다. 출구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에 탑승한 후 케이프콜린스 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여덟 정거장 후에 내리면 되는데, 불안한 사람이라면 버스 운전기사에게 영어로 '케이프콜린스'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홍콩은 영어를 중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하므로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다(그래도 젊은 층이 영어에 훨씬 익숙하다).

케이프콜린스 정류장에 내리면 드래곤스백 트레일을 알리는 표지판 옆으로 계단이 나 있다. 이 계단을 오르는 게 트레일의 시작이다. 꽤 가파른 길을 땀을 흘리며 10분쯤 오르면 평평한 길이 나온다. 이 길을 30분 이상 걷게 되는데,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옷차림을 한 외국인 여행자를 계속 만날 수 있어서 별로 지루하지는 않다.

평지가 끝날 무렵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땀이 제법 날 무렵, 갑자기 탁 트인 능선이 나타난다. 여기부터가 드래곤스백의 진수다. 능선에 서면 발아래 양 옆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하다. 바닷바람도 적당히 불어와 오르막에 지친 여행자의 몸을 식혀준다.

이내 왼편으로 녹색 잔디밭과 푸른 바다, 그리고 하얀 포말이 어우러진 삼색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잔디밭 주위에 그림처럼 흩어져 있는 빨간 지붕 집까지 더하면 사색 풍경이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작은 골프장이었다). 오른편으로는 홍콩 영화배우 저우룬파(주윤발)의 고향인 란마 섬(이 섬에도 짧은 트레킹 코스가 있다)이 동반자처럼 여행자를 따라다닌다.

ⓒ시사IN 이오성 홍콩 도심에도 짧은 걷기 코스가 있다. 도심에 있는 빅토리아피크 걷기 코스에서 본 홍콩 중심부

인위적인 배려의 고마움

능선을 따라 바다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천천히 걷기를 30여 분. 곧 드래곤스백 뷰포인트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잠시 주변 경관을 조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래곤스백 정상이 나타난다. 해발 284m 높이로 서울 남산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지만, 바다에 접해 있어 실제 느끼는 고도는 그보다 훨씬 높다.

정상부에서 10여 분만 걸으면 하산 길이 나타난다. 아직 체력이 많이 남았다면, 내려가기 전에 공원조성 안내판 뒤로 숨은 오솔길로 불쑥 들어가보자.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이 나 있는데, 길이 끝날 무렵 너른 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 위에 앉아 저 멀리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땀을 식힌다. 흡사 한국의 경남 남해 금산에서 상주 해수욕장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드래곤스백 트레일의 묘미는 인위적인 배려에 있다. 망망대해와 바닷바람이 부담스러워질 즈음이면 곧 방풍림이 여행자를 숨겨주고, 시야가 갇혔다 싶으면 이내 탁 트인 풍경이 지친 몸을 달래준다. 체력이 떨어진다 싶을 때 걷기가 마무리되는 것도 이 길의 매력일 것이다.

ⓒ시사IN 이오성 드래곤스백 트레일 정상 부근에 있는 쉼터

하산 길에서 버스가 다니는 섹오로드(Shek O Road)까지는 금방이다. 도로에서 길을 건너 버스를 타면 샤우케이완 역으로 돌아가고, 길을 건너지 않으면 섹오비치(Shek O Beach)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20여 분이면 섹오비치에 도착한다. 4월이라 날씨가 선선한데도, 바닷가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이가 제법 있다. 기자도 충동적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걷느라 지친 몸에 청량제를 준 기분이었다. 바닷가에 탈의실과 샤워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서 '뒷마무리'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외국인보다 홍콩 현지인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러니하게도 섹오비치에서 여행 기분에 한껏 젖을 수 있었다. 이곳 섹오비치 곳곳에 예쁜 집과 길이 많아, 웨딩 화보를 촬영하러 온 신랑신부도 많다.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식당이 하나 있는데, 값이 싸고 요리 솜씨도 뛰어나다.

홍콩 트레일의 자존심, 매클리호스

홍콩에 100㎞에 달하는 트레일이 있다고 하면 놀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1979년에 코스가 개척되었다. 매클리호스 트레일(MacLehose Trail)은 영국 총독이었던 머레이 매클리호스 경의 이름을 딴 길이다. 카우룽 반도 동쪽의 사이쿵 지역에서 출발해 서쪽 튠문 지역까지 이어진다. 코스는 모두 10가지나 된다. 매클리호스는 홍콩 트레일의 자존심이다.

그러나 만만치 않다. 걷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전체적으로 쉬운 코스가 아니다. 산악지형에 난 길이라 사실상 등산을 해야 하는 구간이 꽤 된다. 홍콩 관광청 안내 책자에서도 매클리호스 트레일 코스에는 꼭 'difficult(어렵다)'라는 설명이 붙는다. 그중 비교적 접근하기가 쉬우면서도 경치가 아름다운 트레일2 코스(13.5㎞)를 소개한다. 산과 바다를 누비며 걷는 길이라 풍광이 빼어나다.

ⓒ시사IN 이오성 매클리호스 트레일2 코스는 총 13.5㎞ 거리다. 물이며 간식 등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트레일2 코스를 걷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홍콩 MTR 다이아몬드힐 역에서 내려 버스를 두 번 타야 하는 여정이다. 다이아몬드힐 C2 출구로 나와 92번 버스(20~40분에 한 대꼴로 운행)를 타면 사이쿵 마을이 종점이다. 이곳에 내려 94번 버스를 타고 팍탐충 마을에서 내리면 되는데, 버스가 30분에 한 번꼴로 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다이아몬힐 역에서 팍탐충까지 바로 가는 96R 버스가 운행한다.

관광청 안내 책자에서는 팍탐충에서 시작해 팍탐아우로 마무리하는 코스를 권하는데, 기자는 일부러 팍탐아우에서 출발해 팍탐충으로 마무리했다. 팍탐충 코스에서는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출발 때부터 택시를 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팍탐아우에서 출발한 길은 시작부터 엄청난 내리막이다. 20분 이상 경사진 길을 내려가야 한다. 만약 팍탐충에서 출발했다면 코스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 오르막은 거의 재앙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길이 죄다 시멘트로 덮여 있다. 트레일 상당 구간이 이런 시멘트 길, 혹은 계단이어서 아쉽다. 필경 과거 트레일을 조성한 이들은 길을 내면서 이런 게 여행자를 위한 배려라 생각했을 테지만….

경사가 끝날 즈음 쇠락한 바닷가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을 지날 때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게 되는데, 마을 노인 하나가 정말로 송아지만 한 개 다섯 마리를 데리고 다리 위에 저승사자처럼 서 있다. 순간 다리가 풀렸다. 다행히 개들의 심성도 송아지처럼 순하다. 걷기 여행자들을 자주 접해서인지 아무런 경계가 없다. 나중에는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여행자를 맞는 수호견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다리를 건너면 지루한 오르막의 시작이다. 수풀이 우거져 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저만치 앞에 젊은 흑인 남녀가 길을 걷는다. 미국에서 왔다는 이들은 함틴비치가 목적지란다. 그곳에 숙소가 없을 거라고 했더니, 오늘 노숙을 할 생각이란다. 텐트도 없이 침낭 하나 달랑 메고 온 그들의 용기가 가상해 과일 등 먹을거리를 나눠주었다. 이렇게 열흘 동안 매클리호스 트레일 전 구간을 걸을 작정이란다.

인적 없는 바닷가, 천혜의 휴양지

이곳에서 2㎞ 정도를 걸어 크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 함틴비치에 도착한다. 함틴비치는 그야말로 외딴 바닷가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평일에는 인적이 드물다. 외부에서 오자면 차에서 내려 1시간 이상 등산을 해야 올 수 있는 바닷가다. 오직 매클리호스 트레일 여행자를 위한 쉼터 같다. 모래밭에 퍼질러 앉아 파도도 없이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자니 이곳이 홍콩이라는 사실조차 깜빡할 정도다. 천혜의 휴양지가 따로 없다.

매클리호스 트레일2 코스에 있는 바닷가. 걷기 여행자만 갈 수 있는 은밀한 바다다.

다시 힘을 내 길을 걷는다. 고개를 넘어 1시간 남짓 걸으면 사이완비치가 나온다. 함틴비치보다는 덜하지만, 이곳 역시 한적하기는 마찬가지다. 저 멀리 유난히 뾰족한 샤프 산도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이곳에는 음식점이 몇 군데 있다. 소박한 음식점이지만, '오지'를 한참 걸은 뒤라 이곳이 무척 번화하게 느껴진다. 이제야 트레킹이 마무리되어가는 기분이다. 얼추 거리를 재보니 10㎞ 정도 걸었다.

여기에서 트레일2 구간의 '엔딩 포인트'인 롱케비치까지 다시 1시간 넘게 걸린다. 롱케비치는 홍콩 현지인도 최고로 치는 아름다운 바닷가다. 옥빛·쪽빛·에메랄드빛 등 바다에 수식할 수 있는 모든 색깔이 이곳에 다 있다. 휴일이면 요트 항해를 즐기는 홍콩 부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긴 여정의 끝에 이런 바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만일 팍탐충에서 출발해 걷기 초반에 이 풍경을 봤다면 감흥이 덜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출발지인 이스트댐까지는 금방이다. 이스트댐 주변 도로에 택시가 다니는데, 여기서 택시를 잡아타고 팍탐충 마을이나 사이쿵 마을로 되돌아가면 된다.

고층 건물이 없는 사이쿵 마을

여행의 마무리는 사이쿵 마을에서 하는 게 좋겠다. 사이쿵 마을은 매클리호스 트레일을 걷기 위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작고, 마을이라기엔 좀 번화하다. 우리나라 읍내 정도가 딱 맞겠다. 20~30분이면 마을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곳은 개발제한에 묶여 있어 고층 건물이 없다. 홍콩에서 희귀한 저층 건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공원이며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다. 매클리호스 트레일을 걷지 않더라도, 홍콩의 화려함과 번잡함에 지쳤다면 한번쯤 와볼 만한 곳이다. 항구에 고기잡이 통통배와 최고급 요트가 뒤섞여 있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매클리호스 트레일을 걷는 여행자들 너머로 아름다운 롱케비치가 보인다.

해가 다 넘어간 저녁, 마을의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요리에 맥주 한잔을 걸쳤다. 마천루와 인파에 입이 떡 벌어졌던 홍콩에서의 첫날을 생각하면, 온전히 자연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 여정을 끝낸 오늘 하루가 묘하게 뿌듯하다. 홍콩 여행 중 하루 이틀 쇼핑도 관광도 없이 자연을 맞닥뜨리는 경험. 당신에게도 무척 향기로울 것이다.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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