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추석특집-한국의 족보 '어제와 오늘'>족보는 소수 양반 전유물.. 18세기 대량 위조 '너도나도 양반'

최영창기자 2012. 9. 2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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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까지 10% 남짓 보유.. 군역 면제·문벌 숭상 겹쳐

퇴계 이황(1501~1570)이 속한 진성(眞城) 이씨는 고려말 향리 가문에서 입신해 이황 대에 와서 명문사족으로 입지를 굳힌 가문이다. '진성이씨세보(世譜)' 또는 1600년(선조 33) 경자(庚子)년에 편찬됐다고 해서 '경자보', '도산보(陶山譜)'로 불리는 진성 이씨 가문의 첫 족보도 퇴계의 손자인 이영도가 출판을 주관했다.

3권1책 256쪽으로 된 '경자보'에는 진성 이씨 내외후손 2800명의 이름과 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아들과 딸을 막론하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퇴계는 진성 이씨 세계를 정리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을 기울였는데 친필로 시조 이석(李碩)부터 손자인 이안도 대까지 가계를 세계도 형태로 그린 '진성이씨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퇴계의 필적들을 모은 '선조유묵(先祖遺墨) 11'(보물 제548-2호)에 실린 것으로 친가인 진성 이씨뿐만 아니라 외가인 춘천 박씨 등 자신의 조상에 해당되는 인물들의 가계도를 모두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자료는 최근 재개관한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실 3관 '가족' 부분에 전시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기의 일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안동권씨성화보'가 1476년(성종 7)에 간행됐으며 이보다 조금 앞서 '문화유씨영락보'(1441)와 '남양홍씨정통보'(1441), '진주하씨경태보'(1451) 등 몇몇 가문의 족보가 만들어졌던 사실이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한 족속의 계통과 혈통에 관계되는 것을 적은 책'인 족보는 성관(姓貫)별로 한 시조로부터 일정한 원칙에 의해 정해진 후손들을 가능한 한 모두 망라한 동시에 여러 가족 단위의 계보 자료들을 집적해 만든 계보 기록을 말한다. 고려시대 각종 기록에 가록(家錄)이나 세보(世譜), 가보(家譜) 등과 같은 용어가 보이나 현재 실물로 전하는 게 하나도 없을뿐더러 가족 단위 중심의 기록이란 점에서 족보라고 할 수는 없다.

중국의 족보문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15세기와 조선 사회가 본격적인 성리학 사회로 전환하는 17세기에 우리의 성과 본관에 대한 의식과 족보 편찬 체계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시조 권행(權幸)부터 후손들을 계보상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고 총계(總系) 원칙에 따라 정리한 조선전기 '안동권씨성화보'의 경우 수록된 후손이 8000여 명에 달한다. 같은 원칙에 따라 1565년 간행된 '문화유씨가정보'에는 3만8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수록돼 있는데, 이 족보에 당시 지배층 대다수가 수록돼 있어 '나라의 공보(公譜)'로 불리기도 했다. 두 족보를 중심으로 15, 16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는 '내외손 동족집단' 대신, 동성만을 동족으로 보는 의식이 강화되면서 족보 편찬도 부계 자손에 국한된 동성보(同姓譜) 편찬이 중심이 된다. 외손 등 이성(異姓)에 대한 내용은 격감하지만 족보 편찬이 급증하면서 중간 조상을 정점으로 해 그 이하의 자손만을 기재하는 파보(派譜)와 한 성씨의 시조로부터 파생된 수천, 수만의 자손을 세대의 차례로 모조리 기재하는 성씨별 대동보(大同譜)가 만들어지게 된다.

15~17세기 활발했던 족보 편찬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에서 이를 소유한 인구는 10% 남짓이었을 정도로 소수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17세기까지 전체 인구의 80~90%를 차지했던 평민과 노비 계층이 족보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300년이 지난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족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18세기 이후 군역(軍役)을 면제받기 위해 양반이 되고자 했던 평민과 노비 계층 가운데서 성장한 신흥세력의 노력에 양반들의 잘못된 문벌의식과 숭조(崇祖)사상이 겹쳐져 광범위한 족보 위조가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령 1900년 풍양 조씨 족보가 그보다 74년 전에 출판된 족보에 비해 분량이 두 배 이상 증가한 사실 등이 이를 입증한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서 1929년까지 10년 동안 출판된 도서 가운데 매년 1위를 차지했던 족보 출판 열기도 당시의 분위기를 말해 준다. 참고로 현대 서유럽에서 귀족의 후손은 전체 인구의 3% 미만이라고 한다.

역사학자인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는 "조선시대 관습에 기초한 양반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 족보였다"며 "18세기 이후 위보(僞譜)의 유행은 누구나 족보를 소유해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측면에서 '차별의 해제'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일부 족보 편찬자·출판사들의 축재수단으로 악용되고 전근대적인 차별의 철폐보다 새로운 차별을 낳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요소가 더 컸다"고 밝혔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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