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서울 사업, 시각장애인의 길을 빼앗다
서울시 광진구에 사는 1급 시각장애인 유승주씨(44)는 요즘 집 근처 지하철역에 갈 때 택시를 탄다. 그는 지난 20년간 영동대교 북단에 있는 집에서 건대입구역까지 약 1㎞ 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러나 3년 전부터는 걸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기존에 있던 시각장애인용 점자 유도블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점자블록이 있을 때는 15분이면 걸어갈 수 있던 길이 지금은 50분이 걸린다. 걷는 동안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잡아 장애물에 부딪치는 경우도 많다.
유씨는 구청에 3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구청은 "조치를 취하겠다"고만 할 뿐 달라진 것이 없다. 유씨는 "시각장애인은 집에만 있으라는 얘기냐"고 말했다.
서울시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꾸미겠다며 실시하는 거리조성 사업이 시각장애인의 보행권을 위협하고 있다.
점자블록 끝의 장애인 '어디로 가야 하나'
1급 시각장애인 한만옥씨가 20일 '장애 없는 보도 디자인 가이드라인' 때문에 점자 유도블록이 끊긴 서울 노원구의 거리에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서울시는 2007년부터 '디자인 서울 거리 조성사업'을 하면서 시내 30곳, 총 37㎞ 구간에 있는 인도, 전봇대, 가로가판대, 휴지통을 교체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인도에 깔려 있던 노란색 점자 유도블록이 갑작스럽게 검은색의 밋밋한 블록으로 바뀌었다.
기존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이 걸을 때 발바닥이나 지팡이의 촉감으로 위치나 방향을 알 수 있도록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돼 있다. 새 보도블록은 요철이 없고 일반 블록과 질감만 달라 시각장애인들이 길을 걸을 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블록의 색깔도 문제다. 한국시각장애인편의증진센터 이승철 연구원은 "약시력자들이 가장 분별하기 쉬운 색은 기존 점자블록의 밝은 노란색"이라며 "새로 깔린 검은색 블록은 명도가 낮아 약시력자들의 눈에 웅덩이가 파인 것처럼 보여 위협감을 준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이 사업의 문제점을 보완하겠다며 2009년'장애 없는 보도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장애인들의 보행 환경이 더 나빠졌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요철이 큰 점자 유도블록이 없어지고 대신 길 양쪽에 경고용 띠 블록이 만들어졌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과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시내 25개 자치구가 보도를 개·보수할 때마다 가이드라인을 따랐는데 대부분의 구가 색상이 검고 일반 보도블록과 질감에 큰 차이가 없는 블록으로 경고용 띠를 만들었다.
노원구에 사는 시각장애인 한만옥씨(57)는 "발로 밟아보고 지팡이로 문질러 봐도 무엇을 경고용 띠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도로를 걷다 헤맨 적도 있고 노점 물건을 엎어 주인과 실랑이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승철 연구원은 "서울시내 보도가 시민 누구나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보도의 일부분에라도 노란색 점자 유도블록이 깔려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은 경고용 띠를 지팡이나 발로 감지할 수 있고 명도가 높은 보도블록을 설치하라는 것인데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보니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 같다"며 "최근 발주한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을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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