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늪'에 빠진 박근혜.. 헤어나오려는 의지도 없다

김광호·이지선 기자 2012. 9. 1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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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1979년 10월26일 이후 써내려간 일기의 제목은 <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 > 다.

특히 그 책 3장의 제목은 '굴절된 역사의 진실을 찾아'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흉탄에 보내고 그 한을 삭이며 또박또박 눌러 쓴 기록들이다. 당시 박 후보에겐 '역사=아버지'의 상황인 것이다.

박 후보가 역사와 과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5·16 쿠데타의 성격을 놓고 '정변이냐, 혁명이냐'로 논란을 치른 뒤 이번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2개의 판결"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다. '대통령의 딸'을 넘어서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충고가 이어지지만, 극복론 자체는 현재로선 무망해 보인다. 박 후보 과거사 인식의 한계는 무엇이고, 지금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오른쪽)가 12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원외당협위원장협의회 워크숍에서 참석자와 일일이 포옹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1) 역사는 집권자 관점에 따라 변한다는 인식

박 후보는 기본적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 서술에 부정적 입장이다. 대부분 '왜곡'이란 의식이 엿보인다.

박 후보는 2007년 1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사법부가 무죄 판결을 내리고, 일각에서 유신 시절 판사 명단 공개를 추진하자 "(이것은) 나에 대한 정치공세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1990년 5월15일 일기에선 "지도자를 국장으로 장사지내고서 매도해온 10년의 세월…. 이래 가지고는 절대로 나라가 바로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역사가 기록이지만, 집권자의 관점과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란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앞서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인혁당 등 유신 시절 공안 사건을 재조사하자 "공권력으로부터 과거사를 규명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지나면 또 과거사가 돼 국민의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8월 박 전 대통령이 민족문제연구소의 < 친일인명사전 > 수록 예정자 명단에 오르자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자신들이 저지른 왜곡에 대해 평가받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다루려고 하면 자신의 잣대로 편리하게 평가하려는 유혹들이 많지 않겠느냐"(1월 한·일 수교협상 문서 공개 당시 발언)는 것이다.

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이어진 정권에서 과거사 수정 움직임을 야당 대표이던 자신을 향한 정치공세로 치부한 것이다. 결국 집권자의 또 다른 역사 왜곡일 뿐이란 인식이다. 향후 이명박 정부에서도 정수장학회 문제 등에 "과거 정부에서 다 조사하고도 나온 것이 없지 않으냐"고 반박하는 것은 이런 인식이 배경이다.

(2) 유신 집권자의 기억만으로 입력된 사건들

문제는 이런 관점이 실체적 진실에 기초하고 있느냐의 여부다. 유신시절 역사가 집권자 의지대로 좌우되는 기억도 작동하고 있을 뿐더러, 그 결과 그때 실체적 사실관계에 대한 파악도 '유신 집권자' 관점과 기억 안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다.

단적인 사례가 이번 인혁당재건위를 둘러싼 논란이다. 박 후보는 '2개의 판결' 발언이 논란을 일으킨 다음날인 11일 기자들과 만나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이 나온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사법부의 재심 무죄 결정을 존중하더라도 '다른 증언'도 있는 만큼 인혁당 사건의 성격을 더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박 후보가 다른 증언으로 제시한 근거들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아닌 1차 인혁당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1차 인혁당 사건 역시 1964년 중앙정보부가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혁신계 인사 41명을 체포한 것이다. 이들은 사법부에서 유죄가 인정됐지만, 대부분 징역 1~3년 정도 형에 그쳤다. 박범진 전 의원 등 당시 인혁당에 참여한 인사들이 나중에 전향해 그 실체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도 2차, 즉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선 1차와 다르다는 입장이다. 그 결과 박 후보가 사실관계를 혼동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과거 박 후보의 발언에선 법도 집권자 의지에 따른 장식품쯤으로 여기는 시선이 엿보인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 무죄 판결 후 열린 간담회에서 박 후보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안타깝다.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인혁당에 대해 2개의 판결이 있다는 발언이 나오게 된 뿌리다.

결국 역사의 두 요소인 사실과 관점 모두 '과거'(10·26 이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친박근혜(친박)계 참모들 중에선 "불행한 역사이고 유족들과 얘기하고 끝내면 되는데 그게 왜 이렇게 안되는지, 할 말이 없다"는 실망감도 감지된다.

(3) 사과·화해 행보하면서도 공감하는 모습 없어

박 후보의 역사인식이 사실과 관점 모두에서 '집권자'의 틀에 머물면서 피해 유족들과의 만남이나 화해 등 행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공감하는 모습은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장준하 선생 유가족을 만나러 갈 때도 흔쾌하기보단 떠밀리듯 간 점도 그런 예다. 한 참모는 "박 후보는 (과거사 문제는) 본인이 정리하고 준비가 돼야 말도 하고 제대로 할 수 있는 거 같다"고 설명했다. 지난 7월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 초청토론회에선 "정수장학회에 관한 (한) 노무현 정부에서 모든 것을 동원해 유족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로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벌써 해결이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색깔론'까지 등장하곤 했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선 "인혁당 사건 희생자 가족 등이 만남을 요청하면 응할 의향이 있나"라는 원희룡 의원 질문에 "제가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순수하게 헌신한 분들인데 또 한 부류의 세력이 있고 이들은 친북의 탈을 쓰고 나라의 전복을 기도한 사람, 이는 분명 잘못된 것 아닌가. 이것이 혼동되면 진심으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활동에는 "간첩이 민주 인사로 둔갑하고 간첩이 군 장성을 조사하는 잘못된 일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야당이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고 밝혔다.

이 같은 인식은 인권·민주주의 등의 가치에 대한 둔감함으로 비칠 수 있는 발언으로도 나타났다. 1989년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한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라는 것도 능력이 있을 때는 좋은 제도지만 그런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제도만큼 취약한 것이 없다'라고요"라고 밝히기도 했다.

(4)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이 궁극적 목적

박 후보는 10일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때 들었던 한 재미작가의 말을 인용했다. 박 후보는 "한 재미작가가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한반도가 박 대통령을 만들어간 방법과 또 박 대통령이 한반도를 만들어간 방법,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만 바른 평가가 나온다고 이렇게 썼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1989년 MBC 인터뷰에서도 똑같이 답했다. 유신에 대한 인식이 23년 전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특히 1989년은 박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은둔하던 박 후보가 '세상 밖으로' 나온 때다. 당시 세상 밖으로 나온 이유로 "지난 1년간은 억울하게 자꾸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누명, 왜곡시킬 대로 시켜진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데 힘쓰면서 언론 매체를 통해 알리고 홍보해 왔다"(11월9일 일기)고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역사 바로세우기를 들었다.

그 점에서 이후 정치로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2005년 6월 경북대 특강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어느 시대나 잘한 점, 잘못한 점이 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만 그때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은 내가 잘해서 메워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아버지의 못다 한 정치 완성과 명예회복이 여전히 그의 어깨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직 도전에 나선 지금도 그것이 1순위냐는 점이다. 실상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목표라면 역사란 집권자의 관점에서 쓰인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집권 후 또 다른 역사 바로쓰기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모들은 여전히 '유신 극복론'을 제기 중이다. 하지만 좀체 쉽지 않다. 인혁당재건위 발언 논란에 대해 홍일표 대변인이 당 차원에서 사과한 것조차 박 후보는 상의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부인했다.

< 김광호·이지선 기자 lubof@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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