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노을 흐르는 그 강가, 짙은 커피향의 추억 그대로

2012. 9. 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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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 오면 공지천에서 오리배를 타고, 이디오피아의 집에서 커피를 마셔야만 그 시절 최고의 사랑으로 인정받는 셈이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강변에 짙은 커피향이 흐르고, 마치 외국의 어느 카페 길목처럼 이국적인 풍경이 여행의 운치를 더한다. 카페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이들의 모습 역시 이방인처럼 한가롭고 여유롭다. 부지런히 오리배를 타고 발을 구르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만큼 자유롭고 발랄하다.

춘천시민들이 오래도록 자랑으로 삼는 곳인 공지천. 병풍처럼 높은 산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고, 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 도심공원이다.

청춘의 기억, 옛 사랑처럼 그리운 풍경

지난 여행의 추억은 늘 오래도록 젊음과 낭만으로 기억된다. 젊은 청춘의 시절, 경춘선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젊음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경춘선 열차의 끝인 춘천역에 내려 공지천에 자리한 이곳 '이디오피아의 집'(춘천시 이디오피아길 7번지)을 찾는 것은 젊은 연인들의 로망이었다. 춘천에 오면 공지천에서 오리배를 타고, 이디오피아의 집에서 커피를 마셔야만 그 시절 최고의 사랑으로 인정받는 셈이었다.

"당시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커피를 마실 정도였습니다. 원두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습니다. 특히 미팅을 하거나 맞선을 보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어서,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데이트 코스로 찾아오기도 했어요. 당시에 대학생이던 중년의 손님들이 잊지 않고 지금도 찾아주십니다."

이미 지나버린 청춘의 기억. 시절이 변하여 낡고 오래된 작은 간이역들이 모두 사라지고, 느리게 강변을 따라 달리던 옛 경춘선 열차는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그 강가에는 아직도 그 시절의 사랑처럼 진한 커피향이 흐른다. 특히 수십년 지난 공지천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고, '이디오피아의 집' 역시 거의 옛 모습 그대로다. 이 커피점이 문을 연 것은 1968년, 올해로 46년째를 올곧게 자리를 지키며 그 세월만큼의 깊은 향기로 추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커피 마니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한국 최초' 원두커피 전문점, 이디오피아의 집

호반의 도시 춘천 시민들이 오래도록 자랑으로 삼는 곳이 바로 공지천. 공지천은 호수를 중심으로 병풍처럼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고, 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 도심공원이다. 짙은 노을이 반짝이는 강가에 서니, 어디선가 향긋한 커피향이 흐른다. 공지천변 오른쪽으로 붉은 지붕의 건물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두커피 전문점인 '이디오피아벳'이다. 벳은 에티오피아어로 '집'이란 뜻이다.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에서 20여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말이면 커피숍 안팎으로 외지에서 찾아온 이방인 손님들로 카페 앞 거리가 떠들썩하다.

은빛 머릿결이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과 잘 어울리는 조명숙씨가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 2대째 '이디오피아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 2대째 이디오피아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조명숙씨가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은빛 머릿결이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과 참도 잘 어울린다. "교사였던 부모님이 카페를 한다고 하자 가족 모두 반대했다고 합니다. 제 나이 여덟살 무렵이었어요. 1960년대 후반이니 커피를 판다는 것만으로도 '무슨 물장사냐'며 모두에게 원성을 듣던 때였죠. 더욱이 커피를 판다고 해도 변변하게 커피 원두를 볶고 할 기계도 없을 때입니다. 부모님은 주한 에티오피아 영사관을 찾아가 생두 볶는 방법을 배웠다고 해요. 마땅한 기구도 없어 프라이팬에 볶고 고춧가루 만드는 원리를 차용해 원두커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디오피아의 집이 문을 연 것은 1968년 11월 25일. 그해 5월 19일 6·25전쟁 참전국인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슬라세 1세 황제가 참전기념비의 제막을 위해 춘천을 찾았다. 황제는 당시 이곳에 에티오피아 문화를 알리는 장소로 에티오피아기념관 건립의 뜻을 비쳤다. 조씨의 부모님인 조용이·김옥희씨 부부가 사재를 털어 황제가 다녀간 그 자리에 이디오피아집(벳)을 만들고 기념탑을 세웠다. 이디오피아의 집이 문을 열자 황제는 '이디오피아벳(집)'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현판을 보냈다. 또 개관을 축하하며 에티오피아 황실 커피 생두를 외교행랑을 통해 보냈다. 커피 원두 공급은 에티오피아가 공산화된 1974년까지 이어졌다.

부모님의 가업을 대물림한 부부

최초의 원두커피 전문점으로 문을 연 이디오피아집은 문전성시를 이루다 1990년대 후반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7년 전부터 조씨가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 본격적으로 커피 제조 수업과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조씨는 이탈리아에서 의사를 하던 남편 차중대씨를 설득해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디오피아의 집 운영을 맡고 있다. 부모님의 대를 이어 부부가 함께 이디오피아집을 함께 운영하게 된 셈이다.

마치 외국의 어느 카페 길목처럼 이국적인 풍경이 운치를 더하는 '이디오피아의 집'.

부모님의 명성과 유지를 이어가며 부부는 새로운 각오로 카페 외벽에 벽화를 새롭게 그리고 짙은 갈색으로 칠하는 등 이디오피아의집을 새롭게 단장했다. 벽화에 그려진 에티오피아 복장의 인물화는 바로 조씨 자신이 모델이다. 부모님의 뜻을 이어 에티오피아와의 각별한 인연을 소중히 하겠다는 각오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커피의 기원지입니다. 커피라는 이름은 에티오피아의 도시 이름인 카파(Kaffa)에서 유래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오랫동안 야생상태로 자라다가 9세기에 처음으로 인간에 의해 경작됐는데, 원두커피를 즐기는 애호가들은 특별한 풍미가 있어 에티오피아 커피를 높게 평가합니다. 부모님께서 탑을 세웠다면 저희 부부는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고 원두커피의 발상지인 춘천을 커피를 대표하는 도시로 가꾸어갈 것입니다."

46년 이어온 명성으로 세계커피축제 연다

지난해 조씨는 기존의 '강둑길'이라 지어진 주소를 춘천시와 협의해 '이디오피아길'이란 새 주소로 바꾸었다. 또 이를 기념해 지난해부터 매년 10월 초 공지천과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 이디오피아길을 중심으로 커피축제를 열고 있다.

공지천변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는 지역주민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이디오피아의 집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2007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에티오피아 전통가옥 양식을 그대로 본뜬 건물로 한국전쟁 참전 과정 등을 설명하는 그림판들과 에티오피아 커피와 관련한 문화와 풍습 등을 소개하는 물건과 벽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해에는 1968년 개관을 기념해 시민 1968명에게 커피를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또 에티오피아뿐만 아니라 5대륙의 15개 품종 원두커피를 맛볼 수 있는 향기 가득한 시간을 마련했었습니다. 올해 역시 10월 1~3일까지 에티오피아 전쟁기념관 주변에서 '춘천 이디오피아길 세계커피축제'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추억과 낭만의 도시 춘천. 1960~70년대 대한민국 청춘들이 가장 낭만적인 여행지로 손꼽았던 춘천은 이 가을 추억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최근 서울에서 춘천까지 오가는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춘천행 열차를 타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색색의 단풍이 짙어지고 옷깃을 세울 때면 따스한 커피 향이 그리워진다. 이른 가을바람에 짙은 커피 향기가 흐르는 듯하다.

글·사진|이강 <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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