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신선이 노니는 섬, 군산 선유도

2012. 7. 13.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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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대봉전망대에서 바라본 선유도. 가운데 우뚝 솟은 돌산이 망주봉이다. 허리 잘록한 조롱박 같다. 망주봉은 고군산열도의 중심이다.

후천개벽을 열망하는 민중의 '범씨 천년왕국' 전설이 서려 있다.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면 봉우리에서 7, 8개의 물줄기가 쏟아져

망주폭포가 된다. 두 신선이 마주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이다. 오른쪽 모래해안이 선유도해수욕장. 마치 잔잔한 호수에 표주박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듯하다. '술에 취한 섬/물을 베고 잔다/파도가 흔들어도/그대로 잔다'(이생진 시인) 선유도=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누가 떠나는가

목쉰 뱃고동소리로

나는 태어났다

누가 돌아오는가

한밤중

멍든 뱃고동소리로

나는 자랐다

벌써 석자 세치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쪼르르 하나인

바다는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누가 또 떠나는가

억울한 것

서러운 것

누가 또 돌아오는가

내 고향 군산은

백년이나 울어준 항구였다

천년이나 기나긴 탁류로 울어준 생이었다

―고은 '군산' 전문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는 '표주박 마을'이다. 군산 앞바다에 엎어진 바가지들이 둥둥 떠 있다. 딱 63개의 바가지. 그들이 올망졸망 어우러져 소박한 촌락을 이뤘다. 가운데 안쪽 표주박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다. 마치 빙글빙글 무리 지어 강강술래를 하는 듯하다. 선유도 장자도 무녀도가 바로 그렇다. 바가지 중에서 '으뜸 표주박'이다. '고군산열도의 지중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머지 횡경도 방축도 명도 보농도 말도 비안도 두리도 등은 선유도를 지키는 외곽 산성이다. 한양을 지키는 남한산성 북한산성이나 마찬가지다. 선유도 먼 밖에서, 일렬종대로 서서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낸다. 섬이 바다를 에워싸고, 또 바다가 섬을 에워싸고 있다. 사람들은 섬과 바다 사이에 깃들었다.

선유도(仙遊島)는 '신선이 노니는 섬'이다. 장자도 무녀도와 다리로 이어져 이미 한 몸이 됐다. 5개의 산봉우리가 '섬이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지그시 못을 박고 있다. 그 5개의 꼭짓점이 곧 선유·장자·무녀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다. 선유도의 3개 봉우리 망주봉(해발 104.5m)·선유봉(111m)·남악산(155.6m)과 장자도의 대장봉(142.8m), 무녀도의 무녀봉(130.9m)이 그곳이다. 이 중에서도 망주봉이 으뜸이다. 허리 잘록한 조롱박처럼 암수 봉우리가 볼록하게 솟아 있다. 마치 범선의 '삼각 쌍돛' 같다. 선유·장자·무녀도의 명치 자리에 '도발적으로 발기한' 돌산이다.

선유도초분공원. 섬에 따라 풍장 형태가 달랐다.

선유도는 민들레꽃이다. 낮게 엎드린 납작 단추다. 자그맣고 소박하다. 사방 어디에서도 바다가 보이고, 섬이 보인다. 싸드락싸드락('느릿느릿'의 토박이말) 걸어도 한나절이면 얼추 웬만한 곳은 갈 수 있다. 싸목싸목('천천히'의 토박이 말) 다녀도 서너 시간이면 선유도 구석구석까지 대강 볼 수 있다. 큰 섬은 일단 땅에 내딛는 순간, 섬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섬 속에 그만 내가 녹아 없어져 버린다.

1951년 1·4후퇴 당시, 군산에 살던 고은 시인(1933∼)은 피란 삼아 이곳에 몇 달간 머무르며 하루 10여 편씩 시를 썼다. 열여덟 감수성 많은 나이. 그는 고향에서 좌우로 갈려 죽고 죽이는 학살극에 치를 떨었다. 가슴앓이가 심해져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는 매일 망주봉에 올라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섬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다.

섬사람들은 전쟁과 관계없이 하루하루를 어기차게 살고 있었다.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초분(草墳)에 한 3년 정도 안치했다가, 육탈이 되면 뼈만 추려 땅에 묻었다. 이른바 풍장(風葬)이라고 불리는 '바람장례'였다. 동백나무는 그 추운 겨울에도 묵묵히 붉은 꽃을 계속 밀어 올렸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퉁퉁소리 지나/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잠시 정신을 잃고/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살을 말리게 해다오/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조각도/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바람을 이불처럼 덮고/화장도 해탈도 없이/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놀게 해다오.'

―황동규 '풍장'에서

선유도는 군산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다. 주민은 3개 섬 합쳐 1100여 명. 나루터(선착장)에 배가 닿으면 골프장 전동카트가 줄을 서서 맞이한다. 섬에만 줄잡아 100여 대의 전동카트가 관광객들의 발 역할을 한다. 자전거도 빌릴 수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걸어서 한 바퀴 도는 게 쏠쏠하다. 전혀 힘들 것 없다.

걷기는 3개 코스가 있다. A코스=나루터∼선유도해수욕장∼망주봉∼대봉전망대∼몽돌해수욕장∼나루터(7.8km), B코스=나루터∼선유봉∼장자대교∼장자도∼대장봉∼나루터(7.6km), C코스=나루터∼선유대교∼무녀봉∼나루터(5km).

선유도해수욕장은 국토해양부가 올여름 서해 5대 해수욕장(선유도·백길·배낭기미·신도·모항)으로 뽑은 곳이다. 선유도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황홀하다. 하늘도 붉고, 바다도 붉고, 땅도 붉고, 연인의 눈동자도 붉다. 장자대교 아래에서 갯바위 밤낚시도 해볼 만하다. 요즘엔 붕장어가 줄지어 올라온다.

선유도의 원래 이름은 '군산도(群山島)' 즉 '산들이 무리지어 있는 섬'이었다. 예부터 '서해의 배꼽으로 군사요충지였던 곳. 중국과 일본 무역선들이 들락거렸고, 당연히 수군 진지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왜구가 이곳을 피해 돌아서 연안을 침입하자, 수군 진지를 지금의 군산(鎭浦·진포)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진포를 '군산진'이라 불렀다. 자연히 선유도 일대는 '옛 군산도(古群山島)'가 됐다.

내년 말이면 고군산도는 사실상 육지가 된다. 새만금 둑과 연결된 신시도에서 다리가 이어진다. 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대장도를 잇는 4.38km의 2차로 다리가 그것이다. 다리는 사람을 몰고 온다. 온갖 도시문화도 밀려온다.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다. 섬은 바다에 떠 있을 때 아름답다. 그래서 섬과 섬 사이에 바다가 있다.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이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건 선유도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선유도는 수천수만 년이나 섬사람들을 위해 울어 줬다. 억만년 짙푸르게 섬들을 지켜줬다.

'물 위에 뜬 선유도보다/물속에 가라앉은 선유도에 반할 때가 있다/그때 물을 퍼내고 선유도를 건지려 하면/선유도는 없다/그만큼 선유도는 신비의 섬/설사 선유도를 건졌다 해도/선유도는 두 개일 수 없다/언제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은/네가 선유도에 사로잡힌 때문이다'

―이생진 '선유도'에서

▼고군산열도의 마지막 선비 전우 선생▼

"교육으로 독립"… 전국서 몰려든 선비 3000명 가르쳐

간재 전우 선생

간재 전우(艮齋 田愚·1841∼1922) 선생은 고군산열도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뭍인 전주 출신. 하지만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바다로 나가 섬을 떠돌며 살았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에 따른 것이다. 왕등도 계화도 신시도 등 고군산열도의 섬들을 옮겨 다니며 제자를 키웠다.

그는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문은 냈지만, 직접 의병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학문을 일으켜 언젠가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내외 정세에 관심을 끊고 오로지 가르치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내륙의 땅을 밟지 않았다. 일본인을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세금도 내지 않았다. '호적 신고를 하면 일본 백성이 된다'며 자손을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다. 손자에게 '나는 조선의 유민인데, 어찌 타국에 입적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벽에 '만겁이 흘러도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평생을 기울여 공자의 문인 되리라(萬劫終歸韓國士 平生趨付孔門人)'는 시구를 붙여 놓고 그대로 실행했다.

간재의 명성은 식민지 조선반도에 널리 퍼졌다. 그가 머무르는 섬마다 전국에서 몰려든 선비들로 도학촌(道學村)을 이뤘다. 제자가 제주도에서 북간도에 이르러 3000여 명이나 따랐다고 한다. 그는 무명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았다.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제자들의 보답도 일절 사양했다.

1922년 7월 간재는 부안 계화도에서 눈을 감았다.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나의 문집을 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의 영구엔 무려 2000명 가까이 뒤를 따랐다. 지켜본 사람만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의 제자들은 무럭무럭 자라 광복 후 나라를 이끌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1887∼1964), 전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1889∼?), 전 국회부의장 윤제술(1904∼1986), 국문학자 이병기(1891∼1968)가 그 면면이었다.

▼일제 수탈의 현장 군산▼

다다미방-일본식 절… 근대 유산 전시장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내부

군산엔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간 흔적이다. 군산항은 1899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었다. 한가로운 어촌이 거대 항구가 된 것이다. 1914년 군산항의 총 수출물량은 부산 다음으로 전국 2위였다. 수출품은 두말할 것도 없이 '쌀'이었다.

군산항엔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호남평야의 거대 일본인농장 주인들이 대부분 이곳에 살았다. 일본인 장사치들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군산항은 총독부의 주도로 자고 나면 커졌다.

호남평야엔 가난한 일본인 농민들이 대거 옮겨 왔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당시 전국 일본인 토지 8만6951정보 중 전북지역에 무려 2만2512정보가 몰려 있었다. 전북지역 조선 농부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 비율이 68%로 전국 평균 40%의 2배가 넘었다. 소작료도 수확량의 3분의 2에 가까웠다. 살려면 만주나 북간도로 유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모두 군산항으로 집결했다. 1934년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쌀은 200만 섬이 넘었다.

군산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부유층이 살던 곳이다. 지금도 당시 포목상이었던 히로쓰 가옥이 남아 있다. 일본식 정원과 주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다다미방이 지금 보아도 호화롭다.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별장인 이영춘 가옥, 우리나라에 남겨진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옛 군산세관 본관, 옛 군산시 제3청사 등도 마찬가지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063-450-4541)에 가면 한눈에 '아픈 역사의 생채기'를 되새김질할 수 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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