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잊혀진 고도, 백제로의 시간여행

2012. 6. 2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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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부여군은 지역민들과 함께 잊혀진 백제문화권을 되살리려 노력하여 왔다. 그 결과 이미 부여의 부소산성을 재정비하였고, 몇 해 전 사비성을 복원하여 백제문화단지를 중심으로 1400년 전 잊혀진 왕도 백제를 다시 부활시켰다. 낙화암에 올라 내려다본 백마강. 물빛은 가슴이 시리도록 짙푸르다. 꽃잎이 떨어진다. 천길 만길의 나락. 여인은 그저 옷깃을 나래 펼쳐 높이곰 하늘로 날아오른다. 1400년 전 백제의 찬란한 부활. 백제의 왕도, 부여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궁남지는 현존하는 국내 연못 가운데 최초로 인공으로 조성됐다.

영원한 상상의 땅, 백제

백제 최후의 고도(古都) 부여는 스러짐의 아련함이 진하게 배어 있는 땅이다. 백제 최후의 보루였던 부소산과 궁남지 등에 백제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가만가만 시공 속으로 마음을 옮긴다.

부소산성의 숲길을 따라 올라 낙화암에 오른다. 부소산성은 백마강 남쪽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 성왕이 서기 538년에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긴 후 123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세 번째 도읍지. 낙화암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보니 역사의 시간 속으로 침잠하듯 백마강의 짙은 물빛이 서럽고도 또 서럽다. 순간 눈꽃보다 시린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진다. 송이송이 꽃잎은 하늘을 물들이고 강을 채운다.

백제는 사비성을 수호하기 위해 부소산성을 축조하였고, 산성은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하였다. 패망의 역사와 한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부소산성으로 오른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삼천이 백마강 바위 위에서 몸을 던졌다. 1929년 궁녀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백화정(百花亭)을 지었다. 그것뿐이었다. 사실 백제유적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당연합군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남은 것이라곤 무심한 주춧돌이나 부서진 기와조각, 그리고 피 맺힌 그 패망의 역사와 한(恨)뿐이었다. 백제유적지 가운데 제자리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정림사터와 정림사지 오층석탑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제 땅은 머물면서 보는 곳이 아니고 강을 바라보고 느끼며 상상하는 곳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부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상상할 뿐이었다.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삼충사, 낙화암, 백화정, 영일루, 궁녀사, 고란사 등 그 상상의 터를 천천히 돌아본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고란사에 이르러 잠시 쉬며 목을 축인다. 고란사는 아담한 사찰로 낙화암 아래 백마강이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의자왕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하남성 낙양시 교외 북망산의 흙을 퍼다가 고란사에서 봉안한 뒤 능산리 고분에 안치했다고도 전해진다. 암자가 자리잡은 주변 경관이 소담스럽고, 바위 틈에서 자란다는 고란초와 고란약수로 사람의 발길이 잦다. 약수에 목을 축이고 나니 멀리 백마강이 눈에 들어온다. 고란사 아래의 물길부터 저 멀리 구드레 나루까지 백마강이 흐른다.

자전거 여행으로 부여를 둘러보고 있다는 한규식씨가 잠시 궁남지에서 땀을 식히고 있다.

고란사 나루에서 백마강을 거슬러 구드레 나루까지 왕래하는 황포돛배에 오른다. 백마강 강가에 잊혀진 백제의 영화와 번영, 한과 눈물의 역사를 실은 황포돛배가 행락객들을 싣고 유유히 흐른다. 백마강은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다른 이름으로,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강은 굽이치는 부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길이 400여㎞의 금강이 공주에 이르러 금빛 비단강이 되고, 남쪽 부여로 들어서며 백마강으로 불리며 낙화암 아래로 흐르고 또 흐른다. 백마강 물줄기를 따라 오르다 구드레 나루에 내려서니 붉은 강과 하늘이 이내 황금빛으로 빛난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걸음을 서둘러 구드레 나루에서 멀지 않은 궁남지로 발길을 돌린다.

궁남지는 현존하는 국내 연못 가운데 최초로 인공으로 조성된 곳으로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의 규모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백제 무왕 때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지금까지 무왕의 연못이라 불리기도 한다. 일본 정원의 원조가 되는 곳으로, 여름에서 가을 초까지 연꽃밭이 환상의 자태를 뽐내며 사진 애호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왕의 연못을 돌아 정림사 절터까지

자전거 여행으로 부여를 둘러보고 있다는 한규식씨가 잠시 궁남지에서 땀을 식히고 있다. "부여는 문화유적이 모두 시내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문화 답사여행으로 안성맞춤입니다. 부소산성을 둘러보고 국립부여박물관, 능산리고분군, 궁남지, 정림사지까지 모두 둘러볼 셈입니다." 자전거로 국토를 한 바퀴 다 돌아볼 작정이라는 한씨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백제의 땅에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그 상상의 터를 둘러볼 작정이다. 그를 따라 궁남지에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백제유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림사터를 찾아본다.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년)의 중심 사찰이 있던 터이다.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짐작케 한다. 백제 때에 세워진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허허로이 남아 있다.

부여군은 백제문화권을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여의 부소산성을 재정비했고, 사비성을 복원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는 수모를 겪었다. 목조건물의 형식이 특이하고 세련되며 창의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고,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400년 전 백제의 생생한 부활

오래전부터 부여군은 지역민들과 함께 잊혀진 백제문화권을 되살리려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이미 부여의 부소산성을 재정비하였고, 몇 해 전 사비성을 복원하여 백제문화단지를 중심으로 1400년 전 잊혀진 왕도 백제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중 충남 부여군 규암면 일원에 조성된 역사테마파크 백제역사문화단지는 그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관람객을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빈 터에 다시 세워진 백제왕궁은 장엄한 모습으로 후손들을 반긴다. 찬란한 문화강국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백제가 생생히 재현되어 있다.

글·사진|이강 <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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