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반, 여성이 같이해야 조선 독립은 가능합니다!".. 재조명되는 3·1만세운동 숨은 주역 김마리아

2012. 2.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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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주년 3·1절을 맞아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김마리아 선생이 재조명된다. 최근 김영란(57) 북산책 대표가 출간한 '조국과 여성을 비춘 불멸의 별 김마리아'를 통해서다. 왜 지금 김마리아 선생인가.

"3·1만세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무서운 폭발력을 갖고 전국적으로 일제히 전개된 배경에는 마리아와 같은 무명의 연약한 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김영란 대표는 김마리아 선생의 불굴의 투쟁의지가 있었기에 3·1운동이 여성운동 비폭력운동 인권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도의 간디가 자신이 비폭력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3·1운동이라고 밝혔고 다른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2007년 김마리아 선생께서 졸업하신 뉴욕신학교에서는 '김마리아상'을 제정했어요. 선생께서 한국의 3·1만세운동과 장로교회 여성 리더로서 남긴 훌륭한 업적을 기념하는 상이에요. 2009년 여전도회 이연옥 명예회장, 2011년 장신대 주선애 명예교수가 이 상을 받았어요. 미국 대학 중에서 한인 동창의 이름으로 상을 주는 학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24일 국민일보에서 만난 김 대표는 "오랫동안 미국에 살면서 조국을 알지 못하는 교포 학생들과 삶의 목표가 없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 훌륭한 선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다"고 말했다.

김마리아 선생은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서 태어났다. 김마리아의 증조부와 조부는 마을을 변화시키고 개화시키는데 선두역할을 했다. 아버지 김윤방과 가족들은 1883년 의주에서 온 상인 서상륜·서경조 형제를 만나 성경을 배우며 자연스레 예수를 영접했다. 아버지는 초가집에서 사람들을 모아 예배를 드렸다. 십여년이 지난 1895년에는 소래사람들의 힘으로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소래교회는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조선에서 조선 사람들이 직접 세운 조선 최초의 교회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어요."

3녀 중 막내인 마리아는 어른들로부터 장군감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읜 마리아는 삼촌을 따라 경성에서 살게 됐다. 삼촌이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경영하던 김형제상회에서 차 심부름을 하며 많은 독립투사들을 보았다. 이때 마리아도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됐다. 1910년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 중 일등으로 졸업하고 광주수피아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12년 히로시마에서 1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일본에서 공부한 것을 접목시켜 확고한 신앙과 애국애족 사상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었다. 1915년에 다시 기독교학교인 동경여자학원에 유학, 서양선교사 교수들에게 배우며 신앙이 깊어지고 학식의 폭도 넓어졌다.

"선생은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으로 유학생 모임에서 회장을 맡으며 독립운동에 진력했어요."

김마리아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 학생 대표 11명에 여자대표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자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후 "세상의 반인 여자가 같이 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며 여성 계몽에 앞장섰다. 2·8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선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남학생보다 감시와 통제가 느슨한 여성들이 밀송과 유포를 맡겠다고 제안했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재일유학생이 주축이 된 조선독립청년단원 500명이 YMCA 강당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때맞춰 귀국한 김마리아는 전국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정신여고 졸업생들을 이용, 전국에 2·8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김마리아 선생은 3·1만세운동 후 온갖 고문으로 병을 얻어 53세에 운명하기까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상해임시정부 첫 여성의원을 지냈다. 도미 후에는 뉴욕신학교, 파크대 등에서 공부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김 대표는 "김마리아기념사업회의 후원, 정신여중 정혜순 교장의 소장 자료, 박용옥 박사와 김영삼 교수의 연구와 저서, 신한민보(미국) 등의 기록이 있어 재조명이 가능했다"며 "앞으로도 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계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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