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필드피플] 차범근, 분데스리가 그리고 축구교실

김태석 2012. 1. 2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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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일레븐)

◆ 베스트 일레븐 스페셜 인터뷰 [필드피플]차범근 前 수원 삼성 감독

차범근 前 수원 삼성 감독. 다름슈타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바이엘 레버쿠젠 등을 거치며 분데스리가에서만 통산 308경기에 나서 98골을 터뜨린 한국 축구 사상 최고의 스타다. 유럽 클럽대항전과 DFB 포칼(독일 FA컵) 기록까지 합하면 357경기 출장 126골이니 적어도 그만큼 유럽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수는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한때 마냥 유럽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던 시기가 있었다. 최근 그는 < 베스트 일레븐 > 과 만나 당시의 일화를 들려줬다. 자신의 영광뿐만이 아니라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분데스리가로 가야겠다고 목표를 설정했던 한창 팔팔할 시기, 그리고 훗날 꿈을 이루고 직접 몸으로 체득한 경험을 어린 후배들에게 전하려 하는 그의 모습은 한국 축구의 신화적 인물이라 평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분데스리가는 동경의 무대였다

"경기에서 질 때마다 언론에서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느니, 문전 처리가 미숙하다느니 질타를 가하곤 했죠. 선수로서 그 얘기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도대체 우리는 매번 왜 이래야 하는지 스스로 반문하곤 했습니다."

그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1970년대 중반. 한국 축구는 바야흐로 아시아 축구의 최강자 반열에 올라서던 시기였다. 아시아 3대컵으로 각광받았던 박스컵, 메르데카컵, 킹스컵을 휩쓸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드높이던 시기다. 그러나 월드컵, 아시안컵, 올림픽 등 타이틀이 걸린 대회에서는 항상 목표 일보 직전에서 쓴잔을 마셔야 했다. 대표팀의 주포였던 그도 그런 좌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를 보고 충격받았다. 당시 한 방송사가 월요일 밤에 방영하던 서독(당시) 분데스리가 편집 영상이었다.

"완전히 뒤집어졌죠. 선수들의 경기력은 물론이며 깔끔하게 정돈된 푸른색 잔디,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의 함성 소리 등을 접하니 그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돌멩이가 널린 운동장에서 훈련해야 했던 우리들의 열악한 현실과는 판이했으니까요."

이를 지켜본 그는 그저 막연한 상상 속에서 저 무대를 누비는 자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쟤네들은 어떻게 저런 축구를 할 수 있을까'라고 동경했던 분데스리가를 자꾸 접하면서 '나도 저런 축구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갈수록 뜨거워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회는커녕 정보마저 없었던 시절이니 그때만 해도 허황된 꿈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분데스리가는 TV로만 보는 축구라고 생각했죠. 거기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꿈꾸던 자에게 기회가 온다

꿈꾸는 자에게 기회가 있는 것일까? 이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1978년 박스컵에서 이뤄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였다. 변함없이 대표팀의 공격수로서 펄펄 날며 종횡무진했는데, 이를 눈여겨본 슐테 프랑크푸르트 코치가 당시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으로 일하던 박동희 교수를 통해 그에게 분데스리가 진출 여부를 물어 온 것이다.

"사실 당시 초청받았던 프랑크푸르트는 프로팀이 아니라 아마추어팀이었어요. 그런데 그 아마추어 팀에 프랑크푸르트 프로팀 코치가 동행한 것입니다. 나를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만났더니 독일 가고 싶은 생각없냐고 그러더라고요. 대뜸 독일을 어떻게 가냐고 되물었죠. 그러자 슐테 코치는 너 정도면 가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후 박 교수님을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을 실질적으로 모색할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출전 문제를 시작으로 공군 복역 중 건너가 1경기만 뛰고 강제로 귀국 길에 올라야 했던 다름슈타트 이적까지 그가 독일 땅에 완전히 뿌리 내리기까지에는 적잖은 진통이 뒤따랐다. 그래도 그의 독일 진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목표를 목전에 두고 좌절을 맛봐야 했던 당시 한국 축구의 아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TV로만 접하던 유럽에 가서 그들의 축구를 경험하고 배워서 돌아오면 변화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막상 가서 몸으로 겪어 보니 역시 내 생각이 맞더라고요."

1979-1980시즌을 앞두고 프랑크푸르트에 정식으로 입단한 그는 1988-1989시즌 레버쿠젠에서 은퇴하기까지 열 시즌간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개인 공격 포인트 기록뿐만 아니라 두 차례나 UEFA(유럽축구연맹)컵을 차지하는 등 축구의 본고장에서 누구보다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실로 대단한 성공이었다.

"기록상 3경기에서 1골은 넣을 수 있는 선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움도 그만큼 할 수 있었고요. 동양 선수가 유럽에서 100골대에 육박하는 득점 기록을 쌓는 것은 가까운 장래에는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물여섯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진출해 마지막 2년을 미드필더로 뛰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고요. 어쩌면 지금처럼 축구 문화가 잘 형성됐다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분데스리가의 경험 통해 축구 교실을 떠올렸다

분데스리가에서 거둔 성공을 두고 그는 비단 자신만의 성공으로 놔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경험을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었다. 귀국 후 축구교실을 운영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제가 뛰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매번 좋은 기회를 잡고도 번번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미래를 위한 투자가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당시는 무엇 때문인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에서 쌓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볼을 다루며 성장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요. 제가 뛸 때만 해도 초등학교 4~5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해 기본기 없이 곧바로 경기를 치러야 했습니다. 저 역시도 늦게 시작한 편이지요. 그러다보니 볼 처리부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감각적으로 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좋은 찬스가 와도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죠.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축구교실을 운영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입니다."

그는 1990년 축구교실을 설립해 21년째 묵묵히 운영해 오고 있다. 나아가 우수한 실력을 지닌 한국 축구 유망주들을 위해서 '차범근 축구상'을 수여하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을 비롯해 이동국(전북), 기성용(셀틱) 등 현재 한국 축구를 대표하고 있는 스타들이 차범근 축구상을 거쳐 갔다. 백승호(바르셀로나 유스팀) 등 촉망받는 유망주들 또한 이 상을 받았다.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유망주를 발굴하고 응원하겠다는 그의 각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이다. 어린 선수의 꿈이 곧 자신의 꿈이며 이는 한국 축구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저 같은 선수, 아니 그 이상의 선수가 나올지 누가 압니까? 만약 이들을 어려서부터 발굴해 착실히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다면 한국 축구가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밀알을 뿌리는 중입니다."

글=김태석 기자(ktsek77@soccerbest11.co.kr)사진=김동하 기자(kimdh@soccerbest1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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