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20주년①]서태지와 아이들.. 그때는, 굉장히, 예뻤다

2012. 1. 1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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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종원 기자] < 서태지와 아이들 > 데뷔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박종원 시민기자는 "당장,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 오마이스타 > 는 '절대공감'합니다. 그래서 '서태지와 아이들 특별 섹션'을 준비했습니다. 물론 한 번으로는 부족합니다. 앞으로 < 서태지와 아이들 > 을 주제로 하는 원고나 사진 기꺼이 모십니다. 독자님들의 관심과 참여 기대합니다. < 편집자말 >

90년대의 지배자.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안 늙을 것만 같던 그들의 모습도 이제는 세월의 흐름이 묻어난다. 세 멤버 중 두 명은 애 아빠가 됐고 나머지 한 명은 '돌싱'인걸 보면 말이다.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 자체가 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기성세대의 입장으로서는 우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니까. 비단 음악사적 업적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들을 좋아했든 싫어했든 당시의 그들은 우리 삶의 일부를 장악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호불호와 관계없이 '난 알아요'의 가사를 다 외우고 '컴백홈'의 고릴라 춤을 한 번씩은 다 따라하면서 자라왔다. 그렇지 아니한가.

90년대에 태어난 친구들은 잘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태지와 아이들 열풍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추적 60분이 나서서 파헤치는 수준이었다고 하면 좀 와 닿을까. 과장을 조금 보태서 그들의 인기는 열풍의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차원의 지각변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태지보이스 … 그 때는, 굉장히, 예뻤다

1990년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서태지와 아이들

ⓒ 서태지닷컴

특히 데뷔앨범인 1집 태지보이스(Taiji Boys)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지각변동을 일으킨 진원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한 번에 '확!' 떠버린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일단 곡이 굉장히 예쁘다. 섬세한 멜로디와 지금으로써는 바로 떠올리기 힘든 서태지 특유의 미성이 곡 전체에 깔려있다. 지금 들어보면 구식 장비가 주는 레코딩 질감이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만드는데 오히려 그것이 곡들을 더 예쁘게 만든다.

'이 밤이 깊어가지만', '이제는', '우리가 함께 한 시간 속에서'를 듣고 스쳐간 연인과의 추억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곡의 적재적소마다 들어가는 색소폰 연주와 스무 살 청년 서태지의 청순(?)한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달달하다.

"너를 위해선 아파해도 좋아"라고 외치는 그의 가사들은 오글거릴 만큼 민망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오글거리는 가사가 귀여워 왠지 모를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만큼 이 앨범은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서태지의 최근작인 8집의 앨범과 비교해보면 감성의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비교된다.

미국에서도 생소했던 랩 & 메탈 크로스오버

이 곡들은 단순히 예쁜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난 알아요'와 '로큰롤 댄스'는 단순히 소녀들을 위한 랩댄스 뮤직이라고 보기에는 사운드의 밀도가 굉장히 높다. '난 알아요'는 곡의 도입부부터 강렬한 신디사이저 소리가 귓속을 꽉 채운다. 마치 기타 리프(기타 주법)를 키보드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여기에 가벼운 톤의 베이스가 통통 튀듯 연주되면서 서로 대비를 이룬다. 로큰롤 댄스는 곡 말미에 강렬하게 지속되는 기타 솔로 연주와 AC/DC의 '백 인 블랙'의 메인리프, 그리고 피처링을 맡은 김종서의 샤우팅 창법이 단연 돋보인다. 사운드는 록과 비슷한데 리듬은 펑키다. 여기에 랩이 더해졌다.

두 곡 모두 중간 중간마다 디스토션(증폭) 사운드의 거친 기타연주가 배치돼있는데, 연주 스타일은 순전히 메탈이다. 메탈과 랩댄스를 뒤섞은 이 파격적인 센스는 당시 미국의 음악시장에서도 흔치 않은 발상이었다.

랩과 메탈을 크로스오버(Cross Over)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데뷔앨범이 1992년 11월에 나온걸 보면 서태지의 트렌드를 보는 통찰력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에서조차 랩과 록의 크로스오버의 개념이 생소할 무렵에 이미 이러한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또는 서태지의 성공 비결은?

1990년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서태지와 아이들

ⓒ SBS

록과 힙합의 결합은 단순히 1집 앨범 뿐 아니라, 서태지와 아이들 4년 간의 음악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2집 타이틀곡인 '하여가'와 3집의 타이틀곡인 '교실이데아', 그리고 4집의 수록곡인 '필승'과 '프리스타일'을 보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 랩과 록을 결합하려 했는지를 대번에 파악할 수 있다. 1집의 랩댄스 이후 2집은 헤비메탈, 3집은 스래쉬 메탈, 4집은 펑크라는 록음악 중심의 스타일 변신이 이어져 왔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그의 랩이 빠지지 않았다.

이렇듯 랩과 록의 크로스오버라는 서태지의 일관된 음악적 실험은 동시에 아이돌 시절 그들에게 쏟아진 '잡탕앨범'과 '정체성' 비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2집 이후 서태지가 세미클래식과 퓨전재즈, 테크노를 넘나드는 등 광범위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준 것은 맞다. 2집 수록곡 중 테크노를 시도했던 '수시아'와 퓨전재즈 스타일의 '마지막 축제', 세미클래식을 내세운 3집의 '영원' '아이들의 눈으로'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스타일의 곡들은 트랙 수 자체가 많지 않고 특정 앨범에 국한된 것으로 봤을 때 그것이 그들의 음악적 정체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물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가 3, 4집에서 시도한 펑크도, 메탈도, 갱스터 랩도, 결국 크게 보면 록과 힙합의 범주에 속하는 장르들이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범주를 벗어나는 예외적인 장르가 몇 개 있긴 하지만, 크게 보면 결국 세부적 장르에서 차이를 보일 뿐, 그는 록과 힙합의 크로스오버를 여러 각도에서 실험해왔다 볼 수 있다.

2000년 컴백 후 발표한 서태지의 솔로앨범 < 울트라매니아 > 장르가 메탈과 힙합을 섞은 뉴메탈인 사실은 그런 점에서 보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결국 록과 힙합이라는 당시의 비주류 장르를 여러 갈래에서 실험한 것이 그들의(또는 서태지의) 성공 비결이었던 셈이다.

그들에 대한 음악적 평가, 왜 솔로 서태지보다 인색했을까

1990년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서태지와 아이들

ⓒ 서태지닷컴

이렇게 음악에서 얼마든지 그들의 성공 비결을 찾을 수 있건만, 이들에 대한 분석의 틀은 여전히 음악 산업과 정치·사회적 변화에만 초점이 맞춰진 경향이 강하다. 당연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과 음악에 대한 내용 평가는 묻힐 수밖에 없었다.

가장 주목을 많이 받았을 시기의 음악적 평가가 서태지의 솔로시절보다도 많지 않음은 역설적이다. 원인이 뭘까. 그의 음악과 공연문화가 문화적 충격을 가져올 만큼, 당시 한국사회의 문화 콘텐츠 생산 구조나 대중들의 인식이 패쇄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결과 그의 음악적 시도는 철저히 음악과 퍼포먼스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나, 그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관점은 사회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가수를 넘어선 사회적 인사로 인식된 그들에게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붙었다. 혁명가, 메시아, 심지어 문화적 좌파에, 그들이 10대들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특히 1994년 벌어진 서태지와 아이들 사탄 논란은 낯선 음악을 바라보는 당시 대중 인식과 전근대적 종교관이 어떤 문화지체 사회현상을 초래했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럴수록 그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만 갔다.

"심지어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너희들이 정말 서태지를 위한다면 그가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식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요지의 설교도 했다고 한다. 언젠가 국회에서도 서태지가 이 땅의 자녀들을 다 버린다는 발언이 나온 적이 있는데,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다. 청소년들 우상이 되는 것이 이토록 상처 입어야 하는 것인가?" (1994년 < 리뷰 > 겨울호)

물론 그들이 가져온 제도적 변화를 무시할 순 없다. 콘서트 도입, 코디네이터와 음향 스텝의 등장, 공륜 심의제도 폐지 등은 그의 음악적 업적만큼이나 높게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음악적 수식어보다 사회적 수식어가 먼저 붙어야 했던 상황이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공허하고 가혹한 일이었는지 우리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이들은 좀 더 오랜 세월 음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탄 논란의 '추억', 지금 당장 재조명이 필요하다

1992년 이후 20년. 이제 서태지와 아이들은 없다. 그들은 이제 영웅도 우상도 혁명가도 아니다. 지금 그들은 평범한 가장으로써, 또한 안무가와 뮤지션, 기획사 회장으로써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변화를 지지한 그들의 팬들은 이제 마냥 소리를 지르고 예쁘게 웃을 수만은 없는 나이가 됐다. 외국의 새로운 음악들은 이제 별도의 루트를 거치지 않고서도 언제든 접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대중의 인식도 몰라보게 성숙해져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사탄이라는 소문에 전 국민이 덜덜 떨던 전근대적 촌극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일까.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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