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보름달 차오른 고향의 풍성한 인심

2011. 9. 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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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충남 아산골 외암리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스토리텔러' 이강씨의 '길에서 만난 사람' 연재가 시작된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전해주는 웃음과 눈물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의 멋을 전해 줄 예정이다. 그의 여행기는 사람들과 작고 소소한 풍경에 말을 거는 '스토리텔링'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콘텐츠 스토리텔러'라고 부른다. < 편집자 주 > .

추석을 준비하는 고향집.

추 석 명절이다. 이내 고향집에 다니러 갈 채비로 마음이 분주해진다. 지난한 비의 계절에 고향집은 무탈했을까? 고향마을 어른들은 시름 많은 여름을 보냈다고들 했다. 긴 장마 끝에 물기를 머금은 초가 지붕이 혹여 내려앉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또 조상을 모신 선산에 별고는 없나하는 근심에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하늘의 순리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별로 손 쓸 여력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한가위'가 다가왔다. 마을 어른들은 이제야 제 빛깔을 내는 가을볕으로 저 들판에 황금물결 일렁이고 풍년가가 드높아지길 소원할 뿐이다.

고향집에 가을이 한창이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外巖)리 고향마을. 동리 아해들의 물장구 소리가 잦아든 여름 개울을 건너 마을 초입에 들어선다. 뒷산인 설화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은 들어앉은 품이 아늑하고, 앞산 광덕산에서 흘러내려 마을 구석구석, 너른 앞들까지 적시고 흐르는 실개울 자락이 살기 좋은 우리촌락의 원형을 그대로 닮은 품세이다. 마을 사람들은 올 여름 큰 비에도 수해는 없었던 것이 모두 마을이 들어앉은 명당의 풍수 덕이라 믿고 있었다.

외암 마을의 제일 어른인 박정세 할머니.

들머리로 들자 외암마을의 첫 집이자 제일 어른이 사시는 박정세 할머니(100세·충남 아산시 광덕면 외암리) 댁네 앞마당에서 며느리 김형분씨(67세)가 볕에 말린 참깨를 털어내느라 분주하게 몸을 놀린다. "명절이 내일 모레니 인자 바쁘지라. 자식들이랑 손주들이랑 일가들이 몽땅 올 거구먼유. 내내 밀린 일도 해두고 마당이래두 쓸어 두는 거여."

올 봄에 백세의 준령을 넘은 시어머니 박씨 할머니는 대청마루에서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가을 들녘과 높아진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봄에 마을 어른들과 자손들이 모여 어머님 백 살 잔치를 치렀는데, 아직도 기력이 정정하시지라. 걸음도 바람처럼 날렵하시고. 어머님이 열 넷에 천안에서 시집을 오셨다니까. 물 좋고 볕 좋은 마을 덕에 팔십년 넘게 건강하게 사시는 거지유."

효부 김씨의 말대로 외암마을은 아산 땅과 천안 땅을 통틀어 인근에서 풍광이 좋기로 으뜸이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양반네(예안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수대를 이어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후손 중에 인물도 많이 나고 대대로 자손들이 행세깨나 하며 살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이제 마을사람들은 외암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점잖게 기다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암마을은 충청지방의 대표적인 반가촌으로 순천의 낙안읍성 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민속마을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의 맑은 바람 그대로

"어머님 또 마실 가셔유? 찬찬히 다니셔유. 자빠지지 마시구." 가을걷이와 명절 채비에 마음이 분주한 며느리 김씨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박씨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휘휘 앞서간다. 백살 준령을 넘은 할머니에게 소나무숲 오르막은 만만치 않지만, 할머니는 마치 맑은 가을 바람 타고 바람처럼 날듯이 걸어간다. 어쩌면 할머니는 이 땅에 흐르는 물과 바람처럼, 나무와 꽃처럼 살아오신 것인지도 모른다. "다듬이질 소리 들리는감? 참말로 소리 한 번 좋제. 거기 가보자구. 저거 보려구 아이들이 많이 오제. 특히 명절 때랑 시월 보름쯤에 열리는 잔치 때에는 사람들이 참말로 많이 오제. 그때는 참말로 사는 재미가 좋제."

마을에서는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맞이 궁리를 한 끝에 부녀자들이 돌아가며 다듬이질 시연을 하고 있다. 오늘은 아랫마을 이씨와 웃마을 윤씨 아주머니가 순번이 되어 다듬이 품앗이를 하고 있는 터이다. "시집살이에 답답한 가슴 달래려고 두드리던 게 다듬이질인데, 이제는 이 다듬이 방망이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안혀유. 주말이나 명절 때면 제법들 오고, 가을걷이 끝나고 10월 보름쯤에 짚풀문화제라고 잔치할 때는 엄청시레 많이 오지라. 북적북적 사람사는 것 같고 마을사람들도 한바탕 노는 것이니 볼 만혀유." 마을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이면 한데 어울려 대동놀이를 하고, 매년 10월 중순이면 짚풀문화제를 열고 도시 손님들 맞이를 하는 것이다.

"여기가 벼슬 좀 하던 집안이 모여 살던 동리여유. 예안이씨 문중에서 큰 기침깨나 허는 인물들이 엄청 많이 나왔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손님이 많이 드는 집이 저 산 바로 밑에 참판댁여유. 예안이씨 종갓집인데, 종손 어른이 지금 댁에 계실 거유. 저짝으로 가문 해설사가 있어유. 같이 올라가 보세유."

기와집과 초가가 어우러진 한 울타리

외암마을에는 예안이씨 문중의 위상을 알 수 있는 택호가 있는데, 가옥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영암군수댁(건재고택), 송화군수댁, 고양군수댁, 참봉댁, 진사댁, 교수댁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마을 해설사와 함께 돌담길을 따라 참판댁을 찾아 오른다. 해설사는 이끼 긴 돌담을 바라보면 그 세월만큼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고 말문을 연다. "박 넝쿨이며 능소화가 돌담을 따라 늘어지면 마을이 참 아름답지요. 담을 울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울은 경계이자 나눔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경계지만 서양의 담장처럼 높지도 않으며, 그 쌓인 모양 역시 여유가 있고 자연스럽지요. 특히 외암마을 같은 집성촌 마을은 동성동족 중심의 자율성을 지니면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자연스레 돌담을 쌓아올린 것입니다.

외암마을은 충청지방의 대표적인 반가촌으로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몇 안 되는 민속마을이다.

또 '우리'란 말도 울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하는데, 이는 담장 안의 공공체가 서로 어깨를 나누고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집안이 한데 모여 자리를 잡고 핏줄이란 긴 타래로 엮여 바로 '우리'라는 공동의식을 형성한 것이지요."

총 5300m에 이르는 돌담장은 외암마을만의 특징. 구불구불 돌담길을 따라 걸으니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웅장함을 잃지 않은 고택들과 볏짚을 지붕으로 이은 초가들이 돌담을 따라 이어진다. 불규칙적으로 야트막하게 쌓아올렸지만 투박하게 손품의 흔적들이 그대로이다. 또 내 집 네 집이랄 것도 없이 어깨를 나눈 모양은 이웃과 이웃, 기와와 초가집을 이어주는 경계와 허물없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마을에는 참판댁(중요민속자료 195·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참판댁)을 비롯해 영암댁, 송화댁, 외암종가댁, 참봉댁 등의 반가와 그 주변의 초가집들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토지개혁으로 땅을 많이 빼앗기기도 하고, 새마을 운동한다 어쩐다 하면서 많이 망가졌지만, 그래도 충청도 어른들이 고집을 지켜 초가집과 70여 호의 기와집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참판댁네처럼 몇몇 후손들이 남아 마을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맞이 궁리를 한 끝에 부녀자들이 돌아가며 다듬이질 시연을 하고 있다.

돌담길을 따라 끝까지 오르니 막다른 골목에 위풍당당하게 선 고택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예안이씨 문정공파 참판댁 종손 이득선씨(69세·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88)의 종가이다. 이씨가 때맞춰 대문 앞에서 반가이 손을 맞이한다. 참판댁은 구한말 이조참판을 지낸 이득선씨의 조부가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집이다. 지어진 지 1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고택의 풍모가 예사롭지 않다.

"덩치 꽤 큰 기와집이지만 여염집 같지요. 조부께서는 고종황제가 집 지을 돈을 보내오자 외람되이 여겨 고사를 했지만, 얼마 후 목수를 직접 내려보내 낙선재를 본 뜬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돌과 나무를 사용하고 칸의 크기도 쓰임 이상으로 넓히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하사한 집이면 규모가 크고 대단할 것 같지만 이 집은 고졸(古拙)함 그 자체다. 문간채,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을 둘러보고 마루 켠에 앉는다. "우리 마을은 조선시대 농촌마을의 모습과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문화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특히 설날, 추석 같은 명절이면 아이들과 함께 마을을 찾아오는 가족들이 많아요." 초가집 지붕 위로 둥근 보름달이 떠오를 것만 같은 마을을 고향길을 오가며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 아침이면 늙은 아비가 마당을 쓸고, 해질녘이면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고향마을. 외암마을을 찾는 이들은 잊혀져가는 우리네 고향풍경과 인심을 마음에 담고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는 것이다.

글·사진|이강 < 콘텐츠 스토리텔러 >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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