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위원 도쿄 르포(4)-대지진이 일본사회에 던진 과제

2011. 3. 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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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피해 지역 일본인들의 질서 정연하고 의연한 모습에 전 세계가 놀랐다. 아니 크게 감동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뉴욕타임스는 "인류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걸 일본이 보여줬다"고 평할 정도였다. 국내외 외신들은 앞을 다투어 지진·쓰나미에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도호쿠(東北)지방 사람들 뿐 아니라 도쿄 등 수도권에서 전철이 마비돼 집에 돌아갈 수조차 없는 극한 상황을 일본인들은 흐트러짐 없이 묵묵히 견뎌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일본인들이 질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풀었고, 또 어떤 이는 일본이 오랫동안 무사 위주의 통치체제를 유지했기에 사람들은 힘들 때 불만을 터뜨리기보다 참아내는 데 익숙하다고 분석한다. 정말 그런가. 도호쿠 주민들은 여전히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도쿄에서는 지진 발생 한 주일도 되지 않아 사재기가 나타나는 등 처음과는 뭔가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고 그 확산정도가 광범위해지면서 일본사람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과연 위기 속 일본인들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하는지, 만약 국내외 미디어가 보도한 것처럼 그게 사실이라면 그 이유나 배경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일본문학자인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도쿄대학 교수를 3월 19일 도쿄 시부야(澁谷)의 한 찻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관련 인터뷰 기사는 3월 21일자 25면).

고모리 교수는 평화헌법 조항으로 지칭되는 일본국헌법 9조(전쟁 포기, 군대 안 갖기)를 지키자는 시민운동단체 '9조회'의 전국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는 등 이른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1985년 세이조(成城)대학 교수를 거쳐 1992년부터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및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도호쿠지방의 역사적·자연적 특수성

고모리 교수는 처음부터 필자가 꺼내놓은 전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질서정연한 일본인,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대처하는 일본인 등의 표현 속에 등장하는 일본인을 보편적인 일본인으로 등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는 일본인은 일본인 일반이 아니라 도호쿠에 사는 일본인, 즉 도호쿠진(東北人)의 모습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고모리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의 소설 '기리기리진(吉里吉里人·1981)'을 거론했다. 소설은 미야기(宮城)현과 이와테(岩手)현의 경계에 있는 가상의 마을 기리기리무라(吉里吉里村)가 일본정부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기리기리국(國)'을 세우는 과정을 하루 반 동안 묘사하고 있다. 도호쿠의 한 마을이 일본에서 떨어져나간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이 이야기는 마치 SF소설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도호쿠진의 일맥상통한 인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일본과의 결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모리 교수는, 그 소설은 도호쿠 사람들이 천년 넘게 겪어온 중앙정부가 있는 교토·도쿄로부터 차별과 억압의 세월, 그 와중에 겪어온 울분을 전제로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헤이안시대(794∼1185)의 도호쿠는 교토(야마토·大和) 조정에서 보면 오랑케(에미시)에 불과했으며 그저 지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야마토 조정에 복속된 후 그들은 야마토의 요구를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수 백 년이 흘렀다.

메이지유신(1868년) 과정에서 타도 막부를 내걸고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쓰마(薩摩, 현 가고시마鹿?島현)와 조슈(長州, 현 야마구치山口현)의 무사들은 막부를 지키려는 도호쿠에 대해 강하게 압박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때 사쓰마와 조슈의 무사들이 도호쿠를 낮춰보면서 한 말이 바로 '시라카와 이북은 별 볼일 없는 황무지(白河以北, 一山百文)'이다. 현재 시라카와시(市)는 도호쿠지방의 관문인 후쿠오카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시라카와에는 경계지역을 관할하는 세키쇼(?所)가 있었다. 그러니까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시라카와 세키쇼 북쪽 사람과는 상종할 바가 없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거론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배·피지배의 구도는 근대국가의 탄생 이후, 아니 전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농·어업에 종사하다 부족한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전국의 공사장 인부로 나서는 등 도호쿠 주민들은 일본 고도성장의 저변을 맡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후쿠오카의 원전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이 지역은 수도권의 에너지공급기지, 야채공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다.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 선 차분한 그들의 모습에는 오랜 세월 억눌려 살아온 사람들의 아픔이 녹아 있다고 고모리 교수는 설명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담담한 표정에는 중앙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고모리 교수에게 이와 같은 주장이 지나치게 단순화, 유형화한 논리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필자의 지적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이번 대지진은 도호쿠라는 역사적·지리적 의미를 곱씹어봐야 하는 계기라고 되받았다. 만에 하나 도쿄나 오사카에서 이번과 같은 대지진이 일어났다면 사람들의 표정은 그렇게 담담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또 한 가지 그는 도호쿠의 자연 친화적 환경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자연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 엄청난 자연재해가 벌어진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도호쿠는 비록 자연재해를 겪으면서도 결코 자연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극단적인 피해 상황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과 지방, 대도시와 농어촌의 대립·갈등구조

그러면 일본인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은 무엇일까. 초점은 이번 재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앞으로 그것이 어떤 사회 동인으로 이어지느냐 있다. 그는 지진, 쓰나미, 원전 폭발 사태로 이어지는 3종의 복합재해의 이면에 중앙, 즉 대도시의 윤택함을 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져온 지방이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가 무엇보다 이 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문제제기에는 자본주의 만능시대의 부차적인 존재로만 생각됐던 농·어업, 즉 자연과 함께 살아온 이들의 삶을 새롭게 다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도시 사람들은 피해지역의 사람들과 단절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철저하게 개체화되어 있는 대도시 사람들에게 자연, 지방, 농·어업 등의 문제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동일본 대지진은 시간이 지나면 분명 수습될 터이나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로 불거진 문제들이 이후 어떻게 반영될 것이냐에 있다. 고모리 교수의 지적은 다소 추상적인 듯 들리지만 대재앙 이후에 대한 미래전망이라는 점에서는 새겨봐야 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지진·쓰나미·원전폭발 트리플 복합재해가 일본사회에 제기하는 것들

고모리 교수는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지난 3월 13일 거론한 '도호쿠 부흥 뉴딜정책'에 대해 '뉴딜'의 뜻이 '새로운 분배'라는 점을 꼭 유념했으면 한다고 했다. 원전 사태에 대해서도 자칫 자연재해로만 인식돼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말 지진·쓰나미 사태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동일본 대지진은 지금 일본사회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인식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농·어촌에 비해 도시가 중시되고 지방에 비해 중앙이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세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된 셈이다. 상호 대립·갈등적 존재와, 그 이중구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붙여서 생각해 본다면 기존의 에너지 과소비형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과 동시에 한편 자연친화적인 삶을 환기(喚起)하는 문명사적 전환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근세 이후 일본은 두 번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첫 번째가 19세기 중반 구로후네(黑船) 도래라고 하는 서구세력의 등장, 두 번째는 1945년의 패전이다. 구로후네의 도래를 경험하면서 일본은 개항과 더불어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맞았고, 패전 후엔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민주국가의 탄생을 맛보았다. 그 다음에 맞는 세 번째 변화를 그간 많은 일본의 전문가들은 냉전체제가 끝난 1990년 이후라고 지적하고 있다. 간 나오토 총리조차도 최근 들어 제3의 개국 운운 하는 발언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세 번째 변화의 계기는 지금까지 분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이번 대지진은 실질적인 일본의 세 번째 대변화를 알리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앞만 보고 달려온 일본사회가 지진 이후 새로운 비전을 찾아나간다면 세 번째 변화는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은 재난극복 그 자체에만 매몰된 채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철저하게 일본인들에게 달렸다. 그 선택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고 보면 우리 사회도 일본의 향후 대응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겠다.(20110328)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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