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월트디즈니의 공주들

2010. 1. 28. 14:1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ㆍ인종·성·계급문제 '올바름' 향해 진화

월트디즈니사는 지금까지 9명의 공주를 탄생시켰다. 1937년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 등장한 백설공주를 시작으로 <신데렐라>(1950)의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1959)의 오로라, <인어공주>(1989)의 에리엘, <미녀와 야수>(1991)의 벨, <알라딘>의 자스민(1992), <포카혼타스>(1995)의 포카혼타스, <뮬란>(1998)의 뮬란, <공주와 개구리>(2009)의 티아나다.

'공주'는 신분만을 뜻하지 않는다. 백설공주, 오로라, 에리엘, 자스민은 원래 공주로 태어났지만 나머지는 왕자 또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후천적으로 공주가 되거나 공주처럼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아름다운 그녀들은 각자 다른 종류의 고난을 겪고 다양한 방법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착하고 친절한 마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앞에 '짠~'하고 왕자가 나타나면 행복은 눈앞에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맏언니 백설공주서 막내 티아나까지

디즈니사는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외에도 40편의 애니메이션을 더 만들었으나 이 회사 수입의 많은 부분은 공주들이 벌어들였다. 영화 상영으로 인한 수입뿐만 아니라 다양한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져 어린 소녀로부터 그 소녀의 어머니까지 전 세계 많은 여성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가 직접 설계한 올랜도 디즈니랜드의 폐장 행사에서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하는 공주들의 퍼레이드는 디즈니가 얼마나 공주들을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런데 맏언니인 백설공주와 막내 티아나 사이에는 72년의 세월만큼이나 큰 세대 차이가 있다. 디즈니가 만든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는 <전함 포템킨>을 통해 몽타주 기법을 확립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마저 "영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치켜세운 걸작이다. 그럼에도 계모의 미움을 받고 숲으로 쫓겨나 난장이들의 집안일을 보살펴 주고, 변장한 계모가 건네주는 독사과를 세 번씩이나 받아먹을 만큼 순진무구한 백설공주는 현대 여성 관객의 시각으로 볼 때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에 비해 티아나는 인종·젠더·계급 등 문제에 걸쳐 20세기 인권운동이 추구해 온 '정치적 올바름'을 축약해 놓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공주와 개구리>의 배경은 1920년대 미국 뉴올리언스다. 흑인 요리사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티아나는 어릴 때부터 요리하기를 좋아한다. 아버지는 흑인 전통음식인 '검보'를 만들어 동네 사람들을 초대한다. 항상 열심히 일한 아버지의 꿈은 자신의 식당을 차리는 것이었으나 아무리 일해도 그는 식당을 갖지 못한다.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은 티아나는 식당의 여종업원이 되어 열심히 일한다. 그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샬롯이란 부자 백인 친구가 있다. 티아나가 사는 도시에 말도니아의 왕자 나딘이 나타나자 샬롯은 그와 결혼하기 위해 안달한다.

아무리 돈을 모아도 식당을 차릴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날 티아나 앞에 개구리가 나타나 키스를 요구한다. 이미 '공주와 개구리' 이야기를 알고 있는 티아나는 왕자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키스를 한다. 그러나 개구리가 왕자로 바뀌기는커녕 티아나가 개구리로 변한다. 샬롯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싶었던 부두 마법사 닥터 파실리에가 왕자의 시종을 왕자로 만들고, 왕자를 개구리로 만든 것이었다. 더욱이 개구리로 변한 왕자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만 좋아할 뿐 무일푼이어서 샬롯과의 결혼으로 한몫 잡기를 노리고 있다. 개구리가 된 나딘과 티아나는 할 수 없이 착한 부두 마법사인 마마 오디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디즈니가 '최초의 흑인공주'로 내세운 티아나는 1920년대 뉴올리언스보다는 21세기 분위기에 걸맞은 여성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그의 꿈을 승계한 티아나는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알파걸'이다. 그는 성실하고 씩씩하고 총명하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 치의 타협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더욱이 때는 세계 대공황이 닥치기 전, 경제적인 번영과 쾌락에의 탐닉이 공존한 재즈 시대였다. 뉴올리언스에 흑인 밴드가 결성되고, 금주법 시대의 밀주가 범람하면서 흥청망청하던 시절이다.

나딘 왕자 역시 기존의 왕자가 아니다. 그는 왕자라는 신분만 있을 뿐 돈이 없다. 열심히 연애하고 놀다 보니 파산 직전이다. 연약하고 위험에 처한 여성을 구해 주는 구원자이기는커녕 샬롯이란 대자본가 딸과의 결혼을 통해 한몫 잡아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결국 그는 돈을 노린 정략결혼을 포기하는 대신 티아나와의 결혼에 이르지만 티아나가 사장인 레스토랑에서 재즈 밴드를 이끄는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왕자이면서도 아내의 능력에 기대어 살아가는 '셔터맨'이다.

이처럼 <공주와 개구리>는 인종·젠더·계급 등 민감한 정치적 의제를 적절히 버무려 놓았다. 인종적으로는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 남성과 대척점에 있는 흑인 여성을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젠더 문제에서는 남녀의 역할을 뒤바꿈으로써 능동적인 여성, 수동적인 남성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냈다. 계급문제 또한 두드러진다. 흑인노동 계급인 티아나의 아버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식당주인이라는 프티 부르주아지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다.

티아나 역시 마법이 아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꿈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했다. 한편 자본가인 샬롯의 아버지는 왕자가 사위 되기를 청할 만큼 우위에 있다. 샬롯과 티아나의 우정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관념을 뒤엎는다. 샬롯은 식당종업원인 티아나를 어릴 때처럼 격의없이 대하며, 나딘이 티아나와 결혼하는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도무지 정치적 잣대를 들어 비판할 구석이 없어 보인다.

강박에 가까운 티아나의 인물 설정은 디즈니 공주들이 겪은 '굴욕'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디즈니 공주들은 매력적이지만 늘 신랄한 비판에 노출돼 왔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오로라) 등 1세대에 속하는 디즈니 공주들은 당대 소녀들의 로망이었을 망정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그들의 좋은 시절은 1950년대에 끝이 났다. 페미니즘과 흑인인권운동이 활발해진 1960년대에 오면서 이들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왜 백인인가, 왜 예쁘고 착하고 순진한가, 왜 수동적으로 왕자가 오기를 기다리는가, 왜 결혼이 모든 이야기의 결말인가. 이런 질문들이 디즈니를 괴롭혔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월트 디즈니 자신이 노동조합의 결성을 막고 매카시즘적 분위기를 주동했다는 원죄도 작용했을 것이다.

1세대 공주들 두고두고 비판받아

디즈니 공주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드림웍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슈렉>(2001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록괴물 슈렉의 파트너인 피오나 공주는 스스로 첨탑에서 내려온다. 그녀는 밥을 짓기 위해 나뭇가지를 분지르고, 뱀을 입으로 불어 풍선으로 만든다. 슈렉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화처럼 야수가 미남으로 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녀는 기꺼이 야수와 결혼하는 미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결과적으로 자신도 미녀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슈렉과 피오나 공주의 결혼식에서 디즈니 공주들이 미인대회 장면을 연출하고, 신데렐라와 백설공주가 서로 싸우는 장면은 기존 공주들에 대한 시니컬한 시선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디즈니가 정치적 비판에 대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후 30년만에 만들어진 <인어공주>는 침체된 디즈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한스 안데르센의 원작이 지닌 처연하면서 비관적인 분위기를 벗어버린 주인공 에리엘은 쾌활하고 적극적이며 귀염성 있는 소녀로 자신이 좋아하는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에리엘의 주변에는 가재 세바스찬을 비롯한 많은 바다친구가 있다. 이들이 왕자를 찾아 뭍으로 가려는 공주를 붙잡기 위해 부르는 <바다 속에서(Under the Sea)>나 왕자와 키스를 시키기 위해 부르는 <그녀에게 키스해(Kiss the Girl)> 등의 멜로디는 애니메이션 뮤지컬의 강력한 매력을 발산했다.

에리엘의 경쾌한 모습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2007)에 영감을 준 게 분명하다. 인어공주의 모티브를 도입한 이 작품에서 포뇨는 에리엘보다 훨씬 어린 6살 무렵의 순진한 여자 아이다. 포뇨의 아버지는 엉뚱한 과학자로, 인간의 탐욕이 오염시킨 바다에서 순수한 물을 추출해 포뇨와 자매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육지의 삶이 궁금했던 포뇨는 소스케란 남자 아이를 만나게 되고, 벼랑 위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친다. 미야자키는 바다를 떠나려는 포뇨와 포뇨를 잡으려는 아버지 간의 갈등을 마을에 들이닥친 해일로 표현해 일본 특유의 물활론적 사고를 선보였다. 포뇨가 소스케와의 뽀뽀에 성공한 것은 물론이다.

1990년대 들어 유색인 공주 탄생

디즈니가 1990년대에 유색인으로 탄생시킨 자스민이나 포카혼타스, 뮬란은 전통적인 백인 미녀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새로운 획을 긋는다. 알라딘과 결혼하는 자스민은 아랍의 공주, 포카혼타스는 17세기 신대륙에 착륙한 선한 백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인디언 추장의 딸, 뮬란은 아버지 대신 전장에 나가서 용의 도움을 받아 적을 물리치는 전사다. 주인공 알라딘의 파트너인 자스민에 대해서는 아랍 전통에 비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다는 등 비판이 가해졌다. 이에 비해 포카혼타스나 뮬란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하는 용기있는 유색 여성이라는 아우라가 씌워졌다. 그러나 세계의 전통문화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는 다문화주의 시대에 맞춘 기획상품이란 비판도 제기됐다. 무엇보다 포카혼타스나 뮬란은 충분히 비판받을 만큼 주목받지도 못했다.

기존의 8공주에 이어 새로운 멤버로 영입된 9번째 공주 티아나는 과연 연착륙할 수 있을까. 스크린 속의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티아나의 아버지는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연상시키고, 그녀의 어머니는 명백하게 오프라 윈프리다. 윈프리는 작품 전반의 자문역을 맡았으며 티아나의 어머니 유도라의 목소리 연기로 직접 참여해 흑인 소녀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좌고우면하면서 인종 문제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 <공주와 개구리>에 대해서도 악담은 끊이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등을 보면 개봉 이전의 트레일러만 공개된 상태에서부터 수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왜 티아나는 대부분 상영시간을 개구리로 지내고 흑인 여성으로 나오는 시간은 짧은가, 왜 나딘 왕자의 피부는 완전히 까맣지 않은가, 왜 흑인문화를 부두교·재즈·검보로 전형화시키는가, 흑인문화를 존중한다면서 이런 전형을 퍼트리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험하지 않은가.

대개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세계 애니메이션에서 차지하는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항상 방어적 입장에 놓인 디즈니로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요?" 70년에 걸친 디즈니 공주의 역사는 만만찮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