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J의 NBA 이야기] 매력 만점의 1979년 우승팀, 수퍼소닉스

한준희 NBA 칼럼니스트 2008. 10. 30.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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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76년부터 NBA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농구라는 것이 무엇이고, NBA 리그의 구조가 어떠한 지를 제대로 알고 보기 시작한 것은 1977~78 시즌이었습니다. 당시 70년대 말에 NBA에서 최강팀이라는 소리를 듣던 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시애틀 수퍼소닉스였지요. 사실 1970년대는 NBA 역사상 전무후무한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한 팀이 없었던 유일한 시대였지요. 하지만 1977년부터 1980년까지 NBA에서 가장 강력한 팀이 시애틀이었다는 점에 토를 달 올드 팬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그 매력적인 소닉스 팀을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앞서 시애틀 구단의 역사를 짧게나마 정리해 보겠습니다.

시애틀 수퍼소닉스는 1967년에 창단했습니다. 첫 6~7 년 동안은 리그의 바닥에서 놀던 팀이었지만, 70년대 중반에 빌 러셀을 감독으로 데려 오면서 조금씩 패배자로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요. 1977년에 빌 러셀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은 레니 윌킨스 (선수와 감독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신 분입니다) 감독 체제 아래 거듭난 이 팀은 78년과 79년 백투백 NBA 파이널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레이커스의 활약에 가려 그다지 뛰어난 성적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플레이오프에는 꾸준히 진출하는 저력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90년대 중반 들어서는 숀 캠프, 게리 페이튼을 주축으로 다시 한 번 리그의 정상을 노렸던 팀입니다.

시애틀 수퍼소닉스는 총 6회에 걸쳐 디비젼 타이틀을 따냈고 (79, 94, 96, 97, 98, 05), NBA 파이널에도 3회나 출전하며 (78, 79, 96)총 38시즌 동안 winning 시즌이 25시즌이나 되었던 명문 구단이라 하겠습니다. 이 긴 세월동안 무수히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해 냈습니다. 구단에서 영구결번을 시켜준 선수들로는 거스 윌리암스 (#1), 네이트 맥밀란 (#10), 레니 윌킨스 (#19), 스펜서 헤이우드 (#24), 프렛 브라운 (#32), 잭 시크마 (#43) 등 6명이 있습니다. 이 중에 네이트 맥밀란만 네임벨류에서 좀 밀리고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당대를 주름잡던 수퍼스타들이었습니다.

1974~75 시즌은 수퍼소닉스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의미가 있는 시즌이었습니다. 빌 러셀을 감독으로 모셔온 이 팀이 창단 이후 8년 만에 43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것이죠. 당시에 시애틀에는 1972년 미국 올림픽 대표팀의 최고 스타였던 빅 맨 스펜서 헤이우드 (22.4점, 9.4리바운드, 1.6블락샷)와 역사상 가장 긴 슈팅레인지를 갖고 있었다는 올스타 가드 프렛 브라운 (21.0점, 4.2리바운드, 3.5어시스트, 2.3스틸)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구단의 포스트시즌 여정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1976년에 드래프트한 수퍼 루키 데니스 존슨의 맹활약과 함께 NBA 최강팀의 대열에 올라선 시애틀은 1977~78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레니 윌킨스 감독이 지휘봉을 맡으면서 NBA 우승을 가시권에 두게 되는 팀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1978년 시즌에 NBA 파이널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수퍼소닉스는 두 명의 '명예의 전당' 빅 맨, 엘빈 헤이스 (19.7점, 13.3리바운드, 2.0블락샷)와 웨스 언셀드 (7.6점, 11.9리바운드, 4.1어시스트) 트윈타워스가 팀을 이끌던 위싱턴 불렛츠 (지금의 위저즈)에게 우승을 내주게 됩니다. 마지막 7차전에서 무득점으로 묶이면서 팀의 패배를 눈물과 함께 받아들여야만 했던 수퍼스타 데니스 존슨은 반드시 자신의 소닉스가 다음 시즌에 우승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예언(?)했고, 다음 시즌에 그는 디펜딩 챔피언 위싱턴을 4 대 1로 누르고 우승하면서 자신의 공언을 지킵니다. 물론 파이널 MVP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자, 이제 이 1979년 우승팀을 소개해 드립니다.

Center: Jack Sikma(6-11, 1955년 11월 14일 생, 1977년 NBA 입문)

아마도 NBA에서 가장 과소평가 받은 센터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1977년 시애틀에 드래프트된 시크마는 그야말로 몸싸움을 즐겨하던 정통 센터로서, 프로 2년차였던 1979 시즌에 이미 15.6점, 12.4리바운드, 3.2어시스트를 기록, 올스타에 뽑혔던 유능한 선수였습니다. 총 7회에 걸쳐 올스타에 선정됐던 시크마의 커리어 평균은 14.3점, 9.3리바운드, 2.4어시시트입니다. 정확한 턴어라운드 점퍼와 미드레인지 점퍼가 주무기였던 시크마는 슈팅이 나가던 지점이 자신의 머리 뒤였기에 도저히 블락이 불가능했던 희한한 슛 폼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선수와 보스턴의 로버트 패리쉬가 일대일로 붙으면 정말 웃기지도 않았습니다. 이 선수는 머리 뒤에서 슈팅이 나가고, 패리쉬의 슛은 높은 하늘로 솟아 올라가고…. 하지만 두 선수 다 적중률이 대단했었지요. 운동능력은 별로였지만 수비가 뛰어났고, 거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강한 힘의 소유자였으며, 빅 맨이 갖기 힘든 피봇에서의 패싱력 또한 우수했던 시크마. 그가 있었기에 시애틀은 센터들의 춘추전국시대였던 70년대에 리그의 정상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Power Forward: Lonnie Shelton(6-8, 1955년 10월 19일 생, 1976년 NBA 입문)

개인적으로 제가 참 좋아했던 파워포워드였습니다. 1976년에 뉴욕 닉스에 의해 드래프트 된 셸튼은 1978년 워싱턴의 트윈타워스에게 인사이드를 점령당하며 우승을 내줬던 시애틀로서는 반드시 영입해야만 했던 진정한 블루-칼라-워커 스타일의 빅맨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1979년 시즌을 앞두고 시애틀에 영입됐고, 그의 영입은 잭 시크마를 이미 보유하고 있던 소닉스로 하여금 NBA에서 가장 몸싸움을 잘하는 인사이더진을 구축하게 했습니다. 이 우승하던 해에 13.5점, 6.2리바운드를 기록했던 셸튼은 대학 때 미식축구 디펜시브백이였기도 했고, 투포환, 원반던지기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전성기때의 몸무게가 무려 130kg까지 나가기도 했었지요. 셸튼은 플레이오프와 같은 큰 경기에서 훨씬 더 잘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는 또한 타고난 전사요, 싸움꾼이었습니다. 저는 NBA 역사상 싸움에 필요한 기술과 배짱 면에서 이 선수와 찰스 바클리를 따라올 선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70년대 말에 이 선수가 한 술집에서 무기를 든 조폭 6명에게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깨끗이 정리된 후였습니다. 5명은 실신을 했고, 셸튼은 나머지 한 명의 몸 위에 유유히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옆에는 전리품인 네 자루의 단검만이 쓸쓸히 놓여 있었지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1986년에 발행된 「Basketball Digest」 지에 실린 내용이니 과장이 섞인 얘기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상대방 모든 인사이더들이 두려워 했던 이 선수는 많은 팬들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982년 올스타게임에서는 기라성같은 서부 컨퍼런스의 포워드들 중에서 최다득표를 하며 선발진에 등용되기도 했습니다.

Small Forward: John Johnson(6-7, 1947년 10월 18일 생, 1970년 NBA 입문)

1970년 클리블랜드에 의해 드래프트 된 존 존슨은 1977년에 시애틀로 트레이드 됐습니다. 전성기때 16~17점을 오가는 꾸준한 득점력을 자랑하던 존슨은 수퍼스타급은 아니었지만 두 번의 올스타 선정 기록이 보여주듯 결코 무시할 수 없는 70년대의 명 스몰포워드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영입된 해에 시애틀이 첫 파이널 진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이즈나 운동능력 등이 동포지션에서 모두 준수한 편이었던 존슨은 타점 높고 정확한 점퍼를 구사했으며, 기동력까지 좋았던 에이스 스타퍼였습니다. 이미 전성기가 지나가던 시점에 시애틀에 합류한 그의 우승시즌 스탯은 11점, 5.0리바운드, 4.4어시스트였습니다.

Shooting Guard: Gus Williams(6-2, 1953년 10월 10일 생, 1975년 NBA 입문)

1975년 골든스테이트에 의해 드래프트 된 거스 윌리암스도 레니 윌킨스 감독에 의해 1977년에 시애틀로 영입된 트위너 스타일의 공격력이 좋은 가드였습니다. 우승시즌에 18.1점, 3.7어시스트, 2.3스틸을 평균으로 기록했던 거스 윌리암스는 정규시즌에는 팀내 두 번째 공격 옵션이었으나, 파이널 시리즈에서는 평균 28.6점을 득점하며 팀의 공격을 최전방에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20대 초반에 머리가 다 벗겨지는 바람에 항상 베테랑 선수라고 놀림을 받았던 거스 윌리암스는 이후 1987년에 은퇴할 때까지 매시즌 꾸준히 20점에 7~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해 주던 선수였지요.

프로 초창기에는 슈팅가드로 뛰었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는 포인트가드로서 뛴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1982년에 올스타게임 MVP와 All-NBA First Team에 선정되기도 했던 윌리암스는 별명이 "Wizard"였을 정도로 볼핸들링이나 체공력에 의한 현란한 슛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습니다. 아이재야 토마스의 스타일과 닮았었다고나 할까요? 운동능력도 막강했던 선수였습니다.

Point Guard: Dennis Johnson(6-4, 1954년 9월 18일 생, 1976년 NBA 입문)

얼마 전에 심장마비로 작고한 데니스 존슨은 한국의 농구 팬들에게도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지요. 래리 버드와 함께 80년대 보스턴 셀틱스 왕조를 이끌던 선수요 유능한 에이스 스타퍼였으니까요. 80년대 셀틱스 팀을 논할 때마다, 래리 버드가 맥헤일이나 패리쉬보다도 더 높게 평가를 하던 선수가 바로 이 선수였습니다. 1983년에 보스턴에 영입되기 전까지의 데니스 존슨은 리그 최고의 가드 중 한 명이자 소속팀의 'The Man'이었습니다. All-Defensive First Team에 6회나 선정된 데니스 존슨은 올스타 게임에도 5회 출전했고, NBA 우승도 3회나 경험한 NBA 레전드 가드 중 하나입니다.

단점이 없었던 존슨은 77년에 시애틀에 의해 2라운드 29번 픽으로 드래프트가 됐고,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슛이면 슛, 패스면 패스, 리바운드면 리바운드, 수비면 수비, 못하는 것 없이 모두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던 운동능력 극강의 올라운더가 데니스 존슨이었습니다.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 슛 블락까지도 가능했던 선수로서 체구에 비해 힘이 워낙 좋아 몸싸움도 잘했고, 힘이 좋은 상대팀 포워드까지 커버가 가능했던 '론 아테스트' 스타일의 경기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14.1점, 3.9리바운드, 5,0어시스트에 불과했지만, 플레이옵에서는 클럿치 슈터로서 명성을 날렸고, 모든 스탯, 특히 득점이 17.3점으로 향상됐던, 포스트시즌에 더 강한 사나이였기도 합니다. 우승시즌인 1979년에는 15.9점, 4.7리바운드, 3.5어시스트, 1.3스틸, 1.2블락샷을 기록했지요. 플레이오프에서는 20.9점, 6.1리바운드, 4.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파이널 MVP가 됐습니다.

Sixth Man: Fred "Downtown" Brown(6-3, 1948년 7월 7일 생, 1971년 NBA 입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롱슛의 황제"라 합니다. 그의 별명은 "Downtown"입니다. 'Downtown'은 미국에서 큰 정원이나 넓은 지역 등을 재고 설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의 슛 거리가 워낙에 길어서, Feet가 아닌 Yard로만 잴 수가 있다 하여 붙여진 별명입니다. 당시에 아나운서들은 Fred라는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선수는 그냥 "다운타운 브라운"으로 불려 졌었습니다. 시애틀 소닉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거기서 커리어를 마친 프랜차이져로서 13시즌을 뛰며 커리어 평균득점 14.6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성기였던 70년대 초중반에는 아주 쉽게 20점 이상을 득점해주던 선수였고, 특히 그의 장거리 슛의 정확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슛 폼이 너무도 완벽하고 매끄러워서 NBA의 많은 후배선수들이 비디오를 보며 흉내내게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같은 팀의 거스 윌리암스, 후대의 아이재야 토마스, 비니 존슨, 그리고 레이 앨런 등이 이 브라운 선수의 슛 폼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브라운 선수가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에 3점 라인이 있었다면 이 선수의 커리어 평균은 20점을 훌쩍 뛰어 넘었을 겁니다. 전성기가 지나던 1980년 시즌에 도입된 3점 라인. 이 때가 되서야 이 선수의 사정거리가 얼마나 길었는지가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3점 라인에서 한 두 스텝이 떨어진 거리에서 그냥 쏴댔습니다. 그리고 45%라는 놀라운 적중률과 함께 최초의 3점슛 타이틀의 주인공이 됩니다. 1976년 시즌에 23.1점을 득점하며 올스타게임에도 출전했던 브라운의 우승시즌 스탯은 14.0점이었습니다.

Enforcer: Paul Silas(6-7, 1943년 7월 12일 생, 1964년 NBA 입문)

1970년대의 골 밑은 그야말로 전쟁터였습니다. 빅 맨들의 몸싸움의 수준이 90년대 중후반쯤에 농구에 입문한 팬들께서는 상상도 못하실 정도로 거칠었습니다. 서로 간에 주먹질은 물론 밀치고 가격하고 하는 수준이 거의 뒷골목 주먹들의 양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승을 노리는 팀들은 진정으로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리바운드와 박스아웃, 골 밑 수비를 담당해주고 팀내 에이스들의 보디가드 역할까지 해줄 수 있는 선수를 반드시 보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선수들 중 베스트가 바로 '블루 칼라 워커의 효시' 폴 사일러스였지요.

사일러스는 레전드 파워포워드 밥 페팃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선수로서, 74년과 76년 보스턴 셀틱스 우승팀의 주전 포워드였으며, 올스타에도 2회 선정되고,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도 뽑힌 스타 플레이어였습니다. NBA 우승은 도합 3회를 경험했네요. 이 선수가 같은 팀의 어린 빅 맨들인 잭 시크마, 로니 쉘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훈련시켜 놓았던 팀이 바로 1978~79 시즌 수퍼소닉스입니다. 가뜩이나 무서운 인사이더진인데 이들을 벤치에서 백업하던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사일러스였으니…. 상대팀으로서는 이 대결을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을 겁니다.

Head Coach: Lenny Wilkins(6-1, 1937년 10월 28일 생, 1960년 NBA 입문)

1992년 오리지날 드림팀의 코치 중 한 사람이었기도 한 레니 윌킨스는, 프로 첫 8시즌을 스타 가드로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서 보낸 후, 1968년에 시애틀 수퍼소닉스에 입성해 선수와 감독으로서 두 번이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분입니다. 선수 시절에는 9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됐었고, 엄청나게 빠른 드리블에서 반 박자 빠르게 터져 나오던 어시스트와 다양한 슈팅동작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였습니다. 런닝 훅 슛이 일품이었던 분이지요. 1969~70 시즌에는 팀의 에이스로서, 또 에이스 스타퍼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 1인 3역을 해내기도 했던 분입니다. 윌킨스는 빌 러셀 이후 흑인으로서는 역사상 두 번째로 NBA 팀의 감독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70년대 말에 빌 러셀 감독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은 후, 센스 있는 드래프트와 트레이드로 자신만의 팀 칼라를 구성, 두 번 연속 파이널 진출과 1회 NBA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와 같이 70년대 말의 시애틀 수퍼소닉스는 당시로서는 타 팀들의 모든 선수들과 팬들이 두려워했던 막강한 팀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팀은 매력이 넘치며 인기도 높았던 팀이었죠. 이 팀이 인기가 높았던 이유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가 되겠습니다.

(1) 일단 이 팀은 하프코트 오펜스와 런-앤-건 농구 모두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한 팀이었습니다.

(2) 리바운드와 수비가 철통같이 강한 팀이면서 동시에 공격에서도 막강한 화력을 자랑한 팀이었습니다. 여섯 명의 선수가 두자릿수 평균득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3) 클럿치 상황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Killer Instinct'를 자랑하던 세 명의 올스타 슈터가 있었습니다.

(4) 리그 역사상 어디다 내놓아도 밀리지 않을 막강한 골 밑 자원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저 세 명의 선수들 외에도 올스타급이었던 7-1의 블라킹 귀재 마빈 웹스터까지 벤치에 있었던 팀입니다.

(5) 선발진 다섯 명을 비롯, 다운타운 브라운과 폴 사일러스, 감독인 레니 윌킨스까지, 전원이 올스타 출신인 호화군단이었습니다.

(6) 그리고 대부분의 주전 선수들이 리그 2년~4년 차인 젊은 팀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짜임새 있고 빈틈없는 팀은 이 이후에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제가 NBA에 입문한 지 얼마 안지나 봤던 팀이라서 실제보다 더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이들의 족적을 더듬어 살펴보고, 이들이 남겨놓은 유산들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헤아려 봐도, 이 1979년 시애틀 팀은 정말로 훌륭한 팀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승 다음 시즌인 1979~80 시즌에도 이 팀은 승승장구하며 정규시즌 56승을 거두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포틀랜드와 밀워키를 꺾으며 파죽지세로 백-투-백을 향해 전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서부 파이널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흥강호가 있었으니 바로 루키 매직 존슨을 영입해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레이커스였지요. 80년대의 왕조 레이커스에게 일격을 당한 이 디펜딩 챔피언은 결국 서부에서 이 매직과 자바의 조합을 넘지 못하고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 빼어난 루키 케빈 듀란트를 중심으로 확실한 리빌딩에 들어간 시애틀 수퍼소닉스(오클라호마 썬더). 이 팀의 팬들께 이 구단이 이렇게 명문이며 과거에 이러한 찬란한 역사가 있었음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이 글을 썼습니다.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08-10-30 한준희 NBA 칼럼니스트( mosesjhah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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