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딛고 명중한 '퍼펙트 골드'..신화를 쏜 궁사 김경욱

2008. 7. 2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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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의 신념, 84년 7월 4일 (수)'

초등학교 5학년 꼬마 숙녀의 일기장 머리에는 여느 친구들의 일기처럼 웃고 있는 해님도,찌푸린 구름도 없었다.

내용은 제목만큼이나 건조했다. '1 최종선발을 위해 열심, 2 시합 전까지 최선을, 3 훌륭한 신인 선수, 4 기록 향상, 5 체력 향상, 6 굳은 신념과 긍지, 7 정신 똑바로 차리기'.

"오늘 하루는 참 즐거웠다"는 흔하디흔한 맺음말은커녕 "파이팅"이라는 세 글자만 공책 한 페이지 끝자락에서 옅은 미소를 띨 뿐이었다.

양궁을 갓 시작한 소녀의 꿈은 '올림픽 국가 대표'. 그는 일찍이 올림픽을 위해서는 감성과 이성의 싸움에서 후자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경욱은 초등학교 시절, 올림픽의 꿈이 확실해지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일기장을 넘겨보면, '참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운동 밖에 생각을 안 했다"고 말한다.

여주여종고 2학년이었던 87년, 김경욱은 양궁에 발을 들여놓은 지 7년 만에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양궁 샛별'로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올림픽 국내 선발전의 벽은 높았다. '국가 대표 선발전이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렵다'는 한국 양궁계의 속담은 고금을 막론했다.

평소 차분하기로 유명했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김경욱은 심판이 채점을 하기 전 표적지에서 화살을 뽑아버리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꿈에 그리던 올림픽 진출이 코앞에서 떠나간 상황에서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88년의 악몽을 잊고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위해 훈련에 매진했지만, 어깨 부상을 입어 다시 한 번 대표 팀 선발에서 고배를 마신다. 실패는 있었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5학년 때부터 '나의 신념'을 가지고 다져온 뚝심, 든든한 지원자 아버지와 양궁 은사 이왕우 감독의 믿음, 그리고 '꿈'을 향한 설렘이 있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부터 딸을 차에 태우고 태능으로 출퇴근했던 아버지의 남다른 정성과 응원은 김경욱을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두 번의 쓴 잔은 결국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위한 '보약'이 됐다. 김경욱은 여자 개인전 16강 전에서 후배인 윤혜영을 만나 165:164, 1점 차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아직 절정은 아니었다. 8강과 준결승의 언덕을 숨가쁘게 넘어 결승에 이르렀다.

결승 상대는 중국의 헤잉. 김경욱은 양궁사에 길이 남을 활시위를 겨눈다. 48:43으로 김경욱이 앞서가던 상황에서 6번째 활을 당길 차례였다. 활을 놓는 순간 '아차' 싶었다. 운전자가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채 차를 급발진한 셈. 당시 대표 팀을 지휘했던 이왕우 감독도 화살이 날아가는 1초 남짓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아차' 했던 활은 정확히 표적지의 정 중앙에 꽂히며 카메라를 깨뜨렸다. '퍼펙트 골드'였다.

김경욱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요동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10번째 화살을 쏠 차례였다. 5학년 때부터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건조한' 십대 시절을 보내며 꿈꿔왔던 그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숨을 고르고 주저함 없이 활을 당겼다.

활은 다시 한 번 과녁의 정중앙을 맞추면서 2천만 원 상당의 카메라를 장난감 부수듯 으깼다. 한 경기에서 두 번째 '퍼펙트 골드'가 나오면서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실수로 따낸 퍼펙트 골드보다 더 값진 포인트였다. 이왕우 감독은 "정말 잘 됐다고 생각했다. 쓰라린 경험이 있는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정말 기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경욱은 이어 치러진 여자 단체전에서도 '큰 언니'로서의 제몫을 해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대회 2관왕이었다.

꿈을 이뤘지만, 레이스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경욱은 올림픽을 정점으로 10여 년간 프로 선수로 활동하며 열정적이고 원숙한 '궁사'로서 양궁 계에 또 다른 기록을 새겨나갔다. 임신 9개월 째였던 때에도 대회에 나갈 만큼 궁사로서의 집념은 각별했다.

30년 간, '활'과 함께 인생의 굴곡을 넘어온 김경욱에게 올림픽은 이제 '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양궁을 만나서 도전을 해봤고, 세 번의 도전 끝에 성공을 이루어냈기 때문에 나는 성공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삶을 살면서 어떤 분야에서든지 한 번쯤은 도전과 성공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 자체가 의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올림픽의 영웅들' 전체 영상은 SBS미디어넷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제작=SBS미디어넷, 글·편집=SBSi 박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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