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항일항쟁을 아시나요

입력 2008. 2. 29. 15:45 수정 2008. 2. 2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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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1932년 1월 12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5일장. 호미와 창을 들고 허리에는 메밀떡 전대를 찬 흰저고리 검은 치마의 해녀 1000여명이 모여들었다. 이날은 제주도사인 다구치가 순시차 구좌읍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장터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도사가 도착하자 해녀들은 차를 가로막고 호미와 창을 휘두르며 "일본은 물러가라" "조합 재정을 공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도사가 탄 차량은 해녀들이 던진 돌로 망가졌고 다구치는 세화주재소로 도망쳤다.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구좌읍, 성산읍, 우도면 일대에서 펼쳐진 제주 해녀 항일항쟁은 연인원 1만7000여명이 238회의 집회 및 시위를 전개한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이자 여성운동이다.

해녀들은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맡고 있는 어업조합이 전복과 미역 등 해산물을 헐값에 강탈하고 각종 세금을 부과하며 착취하자 이에 대항해 생존권을 외치며 일어섰다.

일본 경찰은 여수·목포 경찰까지 동원해 해녀시위를 진압했고 야학을 통해 해녀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준 청년 수십명도 함께 체포했다. 일경은 체포한 해녀 100여명중 부춘화, 부덕량, 김옥련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줬으나 청년 40명을 재판에 회부, 23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제주해녀 항쟁은 그후 역사속에 묻혀버렸다. 투쟁 해녀의 유족들은 70여년 가슴아픈 시간을 보내야 했다. 2003년에야 정부는 김옥련, 부춘화 등 해녀 2명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배후에서 항일운동을 지도했던 문도배, 한원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10여년전부터는 매년 3·1절날 기념대회도 치르고 있다.

29일 제주도에 따르면 향토사학계를 중심으로 해녀 항일운동을 제주해녀의 자산으로 인정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제주대 고창훈 교수는 "해녀항쟁은 193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투쟁이었으나 고립된 지리적 환경 등으로 학계에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부춘화 여사의 장녀 고영자씨는 "여자들이 했던 일이라 역사속에 영영 묻히는 줄 았았는데 뒤늦게나마 훈장도 받고 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된다니 고맙다"는 말로 그동안의 서러움을 대신했다.

70여년동안 해녀항쟁 바로세우기에 몸바쳐온 김전근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은 "정부에 신청한 인사들 가운데 일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아쉽다"며 "이제라도 정당한 평가를 통한 계승과 발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경실 도 문화관광국장은 "해녀항쟁은 여성·사회운동사는 물론 대한민국 존립의 정신적 지주"라며 "제주해녀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절차를 밟아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제주= 국민일보 쿠키뉴스 주미령 기자 lalij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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