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북핵 중재 다시 시도"

2006. 9. 2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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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20일(현지시각)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방안과 관련해 "다시 한번 중재 노력을 시도해 보겠다"고 말했다. 카다피 원수는 이날 저녁 트리폴리 시내 지도자궁에서 한명숙 총리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한 총리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평화적 해결을 통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설 수 있도록 카다피 지도자가 노력해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김석환 총리실 공보수석이 밝혔다.

카다피는 이날 "북한 핵문제에 대해 이미 (내가) 북한에 중재 노력을 시도했고, 여전히 (북핵 해결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과는 없었다"며 자신이 최근까지 남북한에 북핵 관련 중재안을 내놨던 경험을 한 총리에게 소개했다.

그는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해 북한의 핵포기를 설득한 데 이어 같은해 12월 주한 리비아 대사를 통해 한국에도 북한의 핵포기와 주한미군 철수안을 뼈대로 하는 한반도 평화 관련 중재안을 전달했던 사실을 밝혔다.

카다피는 특히 "우리가 핵을 포기한 것은 국제사회 평화에 기여하기 위한 것인데, 국제사회로부터의 지원과 보상이 아직 미흡하다"고 털어놔, 리비아가 2003년 12월 대량학살무기(WMD) 포기 선언 뒤 미국과 영국 쪽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지원 등을 요청했다가 묵살당한 데 대한 '섭섭함'도 간접적으로 표명했다고 배석자들이 전했다.

카다피는 이어 한 총리가 "한국기업이 리비아의 유전개발사업에 여러 번 응찰했다 한번도 낙찰이 안되고 외국 메이저사에 모두 밀렸다"며 한국기업의 원유채굴사업 참여지원을 당부한 데 대해 "한국기업이 리비아에서 사업하는 데 어떤 장애도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동아시아로 가는 리비아산 원유의 운송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리비아에서 이웃국가 수단을 경유해 에티오피아 바벨만뎁 해협 쪽 아라비아해로 연결되는 원유 파이프라인 설치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최근 일본이 긍정적 입장을 표명한 만큼 한·중·일 등 동아시아 나라들이 함께 협력하길 기대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한 총리는 "한국으로 돌아가 일본 등과 협력하는 부분에 대해 실무적 논의를 하겠다"며 "특히 새롭게 변화된 리비아의 발전과 원유·철도·항만과 관련된 질높은 신규 합작투자 등 양국 관계에 새 지평이 열리길 바란다"고 답했다.

그는 이날 면담 내내 한 총리에게 호의를 표시했으며,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우리의 친구'로 표현하며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카다피는 이날 한 총리로부터 방한초청 내용을 담은 노 대통령 친서를 건네받자마자 바로 개봉해 꼼꼼히 읽은 뒤 "적절한 시점에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화답했다.

지난 19일부터 2박3일 동안 리비아 공식방문 일정을 모두 마친 한 총리는 21일 오전 다음 순방국인 카자흐스탄으로 출발했다.

트리폴리/최익림 기자 choi21@hani.co.kr

카다피는 누구인가?

무하마르 알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20일 만난 한명숙 총리는 두 나라가 지난 80년 대사급 국교를 맺은 지 26년 만에 만난 한국의 최고위급 정치 지도자다. 지난 5월 아프리카를 순방한 노무현 대통령도 이집트와 알제리를 방문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리비아는 비켜갔다. 그만큼 카다피는 외신을 통해서만 소개될 정도로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오랫동안 반서방·반제국주의 기치를 내걸고 독자노선을 유지한 탓에 국내 정치권을 비롯한 서방 쪽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03년 대량학살무기(WMD) 포기를 선언하면서 서방과 관계가 복원됐다고 하지만, 서방에 '투항'한 이후에도 아직까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지금도 수도 트리폴리의 관저보다는 미군 폭격을 피해다니면서 지냈던 사막 막사에서 외빈을 접견한다. 지금까지 미군 폭격 등 20여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암살 위협에 직면했던 경험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그는 지난 1969년 9월 만27살 때 대위 신분으로 자신을 포함한 12명의 청년장교 그룹을 이끌고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정국을 장악한 뒤 지금까지 37년동안 리비아를 장기 집권하고 있다.

집권하자마자 곧바로 혁명평의회를 구성하고 왕정을 폐지했으며,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전격 선포했다. 영국군과 미군 철수를 시작으로 △셸 등 외국자본이 갖고있던 석유산업 등 주요산업 국유화 △외국인 재산몰수 등을 연이어 단행하는 등 '혁명공약'을 강력히 추진했다.

1973년 4월 코란에 입각한 이슬람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문화혁명'을 제창했다. 한달 뒤에는 이슬람 주도아래 인민혁명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제3세계 이론'을 내놨다. 이 두가지는 오늘날까지 그가 리비아 정국을 장악해 온 통치 이데올로그로 구실해왔다.

서방과의 관계단절은 지난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 사건을 이유로 미국은 80년 리비아와 외교관계를 끊었으며, 이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리는 등 오랜기간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85년 12월 로마와 비엔나에서 발생한 동시 폭탄 테러사건과 88년 270명의 희생자를 낸 팬암기 폭파사건 개입 의혹으로 서방과의 관계악화는 끝간데 없이 치닫는다. 결국 카다피는 86년 3월부터 미국과 영국 연합군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대규모 보복 공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지난 2003년 12월 전격적으로 대량학살무기(WMD) 포기를 선언하고 2006년 5월 국교단절 25년만에 미국과 외교 관계를 복원하는데 성공하면서 국제사회에 이른바 '리비아식 모델'이란 새로운 핵문제 해결방식의 전범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서방에 투항한 데 대해 국내적으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부터 '배반자'로 공격받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그의 정치적 입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트리폴리/최익림 기자 choi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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