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꼭대기에서 바람과 함께 춤을

입력 2006. 8. 23. 10:08 수정 2006. 8. 2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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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은주 기자]

▲ 선자령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2006 김은주

때로, 산을 오르는 일은 굉장히 외롭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을 만나기 힘든 적막한 산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등산객들로 북적대는 산에서라도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 나 대신 길을 걸어줄 수 없다. 힘들어도 내 두 발만 꾹 믿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뿐이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땀줄기가 목을 지나 가슴까지 굴러도 하소연할 곳 없이 그저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뒤돌아 내려가 버릴 마음이 없는 한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산을 오르는 일은 또한 굉장히 평화롭다. 그리고 풍요롭다.

바람 한 자락이 간절할 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산바람이 사무치게 고맙고, 보는 이 없는 한적한 산길에서 사랑을 나누는 곤충들의 애정 행각이 반갑다. 온갖 색깔로 부시게 피어난 꽃무리를 어루만질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도 있다. 번잡하고 시끄러웠던 마음밭에 좋은 거름 뿌려 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시간이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선자령까지 왕복 10㎞를 다섯 시간이나 걸려 다녀온 내 마음은, 그래서 아주 쾌청하다.

바람이 고맙고 곤충들이 반가운 산길

▲ 싸리나무꽃에 붙어 애정 행각을 벌이는 녀석들
ⓒ2006 김은주
▲ 흰꽃바디나물에 붙어 사랑을 나누는 곤충
ⓒ2006 김은주
▲ 짚신나물과 참콩풍뎅이
ⓒ2006 김은주

선자령은 강원도 평창군과 강릉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이 빼놓을 수 없는 구간이고, 정상에 있는 너른 평원 덕에 눈꽃 산행을 즐기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인제에 있는 곰배령과 더불어 바람에 흔들리는 봄날의 들꽃을 실컷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높이 1157m 정도에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조금은 만만하게 봤던 것이 사실이다. 덕분에 내 시작은 호기로웠으나 그 끝은 참으로 비참했다. 산 앞에 겸손하지 못했던 탓에 꽤 고생을 해야 했으니, 생각해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황태해장국 한 그릇도 다 비우지 않고 달랑 생수 한 병만 들고 올라갔으니 더위에 진이 빠지고, 속이 허해서 내내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안고 걸어야 했다. 가방에 챙겨 넣는다고 초콜렛바를 냉장고에 얼려두었다가 깜빡 잊은 내 머리를 탓할 밖에.

그래도 선자령 오르는 산길은 참으로 다정하다. 급경사를 찾기 힘든 평탄한 산길을 오르는 동안 얼굴로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두 팔은 연신 길가 나뭇가지들을 쳐내야 했다.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높다는 말이 실감나는 것은 KT중계소도 지나고 강원항공무선지표까지 지난 뒤 선자령 2.5㎞ 지점에 섰을 때부터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내가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가는 소리와 간간이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멧비둘기 날갯짓 소리뿐이다. 한없이 고요한, 그래서 더 충만한 산행이다.

온몸에 풀물이 들었다, 그래도 좋다

▲ 저만치 강릉 시내와 동해가 내려다 보인다.
ⓒ2006 김은주

선자령 2.5㎞ 지점에서는 저 멀리 강릉 시내와 동해 바다가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차를 타고 대관령 터널을 지날 때 잠시 내려 구경했던 풍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또렷한 전망이다.

눈만 좋다면 동해 바다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 몇 척이라도 보일 것만 같다. 대관령 옛길이 지나가는 자리도 한 눈에 들어오고, 사람들이 뚫어놓은 고속도로 풍경도 환히 보인다. 직선으로 더 빠른 길로만 한없이 분주한 사람들의 조급함까지 환하게 드러난다.

산길을 한참 걷다가 풍력 발전기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나무가 사라지고 평원이 나타난다.

너른 초지에 반짝이는 풀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 장관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바람보다 먼저 누워버리는, 여리지만 강한 풀들이 그 곳에 있었다. 바람을 찍어 보겠다고, 풀잎 사이에 맺힌 햇살을 찍어 보겠다고 풀밭에 한참 누워있었더니 온몸에 풀물이 들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좋다, 바람 속에 누워있는 일은.

▲ 선자령의 키 낮은 풀들
ⓒ2006 김은주

대관령 풍력 발전기는 거대한 몸통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느릿느릿, 잊었다는 듯이 한 번씩 3개의 날개를 돌린다. 거인이 하품하는 것 같다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나는.

모두 49기가 있다는데, 연간 19만㎿를 생산할 수 있단다. 숫자에도 약하고, 전기·전자에도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대체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도무지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만, 바람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핵발전소가 필요없을 만큼 대단한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커다란 날개로 느리게 돌아가는 모습은, 꽤 볼만 하다.

어디가 바다의 끝인지, 어디가 하늘의 시작인지

▲ 대관령 풍력발전기
ⓒ2006 김은주
ⓒ2006 김은주

몇 개의 풍력발전기 옆을 지나 드디어 선자령 꼭대기에 섰다. 세운 지 얼마 안 되는 빗돌을 중심으로 오대산 가는 길이, 발왕산(남)·황병산(북)·계방산(서)이 보인다.

동쪽으로는 동해 바다 수평선이 어렴풋하게 보이는데, 어디가 바다의 끝인지 어디서부터가 하늘의 시작인지 알 수가 없다. 머리 위에 쨍한 해만 아니었다면, 내 한 몸 기댈 그늘 한 자락만 찾을 수 있었다면, 그 위에 누워 곤하게 낮잠 한 숨 자고 싶은 곳이었다.

싸리꽃·산딸기꽃·송이풀에다 동자꽃·달개비꽃·벌개미취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산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꽃을 들여다볼 때마다 사랑을 나누는 곤충들 역시 부록처럼 따라붙었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이다. 먼 옛날 유리왕이 그랬던 것처럼 부질없이 황조가나 불러야 할 참이었다. 녀석들은 오락가락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워라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쩝쩝.

ⓒ2006 김은주

대관령 휴게소 바로 옆에는 양떼목장이 있다. 양들은 꼬질꼬질하지만, 퍽 이국적인 풍경이다.

너른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녀석들은 사람들이 목책에 매달려 있으면 먹이주는 줄 알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다들 어찌나 통통한지. 새끼양 한 마리는 내 무릎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사코 빨아대서 아주 축축해질 때까지 대주고 있었다. 애정 결핍 징후가 농후해 보였다.

여기 들어가려면 양 먹이를 사야하는데, 한 사람에 3천 원이다. 양먹이 안 주고 그냥 들어갔다 와도 될 것 같은데, 그건 안 된단다. 그래놓고 3천원이 입장료가 아니라고 우기는 까닭이 뭔지 의아했다.

ⓒ2006 김은주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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