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재판한 판사' 한기택의 삶

입력 2006. 7. 20. 09:56 수정 2006. 7. 2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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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가장 판사다운 판사,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 매사에 철저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불렸던 고 한기택 판사.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했던 그는 2005년 7월 가족과 함께 한 휴가여행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나이는 46세. 그리 길지 않은 그의 삶을 아쉬워하며 '한기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후 1주기를 맞아 추모집 '판사 한기택'을 엮어 펴냈다.

판사로서 그는 인권을 강조한 판결을 내렸다. 사회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권익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는 평가다.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육군 부대 이등병에 대해 직무수행과 관련이 깊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배우자가 중국에 두고 온 성인 자녀를 한국에 초청하는 것을 법무부가 막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반면 고위공무원 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판결했다. 고위공직자 재산등록 때 직계 존비속이 재산등록을 거부할 경우 거부 사유와 거부자의 이름을 공개하라고 판결했으며 재벌가 자녀의 결혼축의금에 증여세가 부과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해 화제가 됐다.

그는 중견 법관이 된 뒤 "목숨 걸고 재판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다른 사람에 대한 재판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1988년 '2차 사법 파동' 당시에는 사법부 수뇌부의 개편을 촉구하는 성명과 서명을 주도하는 등 재직 중 줄곧 사법개혁에 앞장서 주목을 받았다.

사법 파동에 뜻을 함께 했던 판사들은 이후 '우리법연구회'를 만들었다. 고인은 연구회에 "나는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남들이 나를 죽었다고 보건 말건 진정한 판사로서의 나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습니다"는 글을 남겼다.

화 한번 내지 않는 남편이자 성실한 아빠였지만 가정에서도 일과 관련해서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아내 이상연씨는, 남편이 얼떨결에 법원상담 몇마디 해준 동사무소 직원이 주스 2병을 들고 오자 안받겠다며 싸우다 시피 해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추모집에는 고인이 중학교 시절부터 써 왔다는 일기,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와 함께 박시환 대법관과 이광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 등의 추모글이 실렸다.

궁리. 244쪽. 1만원.

js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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