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사랑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한명희 2002. 11. 10.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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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5월 이탈리아의 난니 모레티 감독은 칸 영화제에서 <아들의 방>으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다. 조용한 드라마의 형식에다 신파적 성격까지 가미된 <아들의 방>은 일찌감치 최고 영예작으로 예견된 것이었고, 영화제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였다.

<피아니스트>는 그렇게 심심하게 막을 내릴 것 같던 지난 해 칸에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다. 한 피아니스트의 변태적 욕망과 사랑을 충격적으로 그린 영화 내용과 더불어, 주인공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의 몸서리쳐질 듯 정확한 연기도 주목의 대상이었다 한다. 결국, 우리 식으로 하자면 2등이라 할 그랑프리(심사위원 대상)와 남녀 주연상이 모두 <피아니스트>에 돌아갔고, 너무 많은 상이 아닌가 하는 질투와 의혹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는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좌파 페미니즘 작가이자 신화 파괴적 글쓰기로 유명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때로 포르노그래피라는 오인과 공격을 받을 만큼 노골적인 성 묘사로 이름 높은 옐리네크 소설이 원작이니, 지난 해 칸에서의 소란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작 소설에 근접하려고 애쓴 <피아니스트>가 단순히 "야한 소란"만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일으켰던 화제를 염두에 두고선 아랫도리의 흥분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는다면, 잔혹할 만큼 차가운 주인공 피아니스트의 "엽기적" 욕망에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욱이 포르노그래피의 외피를 어느 정도 덧입고 있는 이 영화가, 실상은 지극한 형이상학의 뼈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면 헛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물론 1973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당대에 던진 충격에 비하면 <피아니스트>의 충격은 아주 미미할 뿐이지만 말이다. 이런, 서설이 너무 길어졌다.)오스트리아 빈 음악 학교의 피아노 교수인 에리카는 이성과 냉정을 추구하는 독신 여성이다. 슈베르트와 슈만을 전공한 그녀는 레슨을 받는 학생에게까지 "음악은 감정이 필요 없다"며 냉정할 것을 주문한다. 음표 하나, 페달의 강약 하나 실수를 허용치 않는 그녀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이지만, 차갑고 도도한 외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면모들로 뭉쳐져 있다. 중년의 나이에도 엄마와 여전히 한 침대를 쓰며 끊임없는 지배와 간섭에 묶여 있는 것이다.

얼음장같은 이 피아니스트의 일과 후는 가히 충격적이다. 홀로 섹스샵에 들러 다른 남자가 사정하고 버린 휴지의 냄새를 맡거나, 자동차 안에서 정사를 나누는 젊은 남녀를 훔쳐보며 소변을 보는 것으로 욕망을 표현하고 해소한다. 심지어 자신의 성기에 면도날을 대어 피를 흘리기까지 한다.

@IMG1@억압과 변태적 욕망으로 가득한 에리카에게 학생 클레메가 다가온다. 슈베르트를 독창적으로 해석한 클레메의 연주를 들으며 에리카는 사랑을 예감하는 미세한 떨림을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녀의 어두운 내면에 잔뜩 비틀린 채로 숨겨져 있을 뿐이다.

오직 자기 방식대로의 사랑에만 집착하는 에리카는 클레메와의 관계도 마치 레슨을 하듯 철저히 지배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날 사랑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하라"며 사도마조히스틱한 관계를 명령하던 그녀의 뜻을 월터가 수행하자, 강고한 권력자와 피지배자인 듯 보이던 둘의 관계는 한순간에 뒤바뀌고 만다. 권력자 에리카는 비참한 강간의 대상이, 명령을 수행한 클레메는 폭력적 지배자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에리카는 스스로의 명령으로 자신이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모순된 상황에 빠진다. 그러나 에리카와 클레메, 두 사람의 사랑에 내재한 지배-복종의 관계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전복된다.

@IMG2@이 영화에서 지배-복종의 관계는 에리카와 클레메만의 것이 아니다. 변태적이고 일탈된 욕구, 사랑조차 불가능한 에리카의 정신적 불구는 그녀 엄마에게서 최초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머리채 휘어잡으며 중년의 딸을 여전히 지배하려드는 엄마의 모습은 에리카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좋은 열쇠다. 이 모녀 관계에 내재한 지배와 복종의 드라마,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도 클레메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전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피아니스트>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한편으로 복종하고 구속당하는 인물들을 통해 "거룩한 모성"이라는 신화를 해체하며, 사랑이라는 낭만 속에 감추어진 계급의 구도를 분석하고 사랑의 신화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감독 미하엘 하네케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는 우체국에나 가서 부쳐라, 그저 문제 제기를 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영화를 보면서 어떤 이는 에리카를 동정하거나, 어떤 이는 분석하거나, 어떤 이는 침을 뱉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억압된 인간에게 거룩한 것과 비천한 것, 모순된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 가능한지를 날 것 그대로 보는 것도 의미는 있다.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화해도 낙관도 없이, 흔한 음악도 없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마치 백지 같은 그 침묵 속에 저마다의 다양한 메시지가 새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는 계급주의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의 내용이 꽤나 새겨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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