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빈민 곁 지킨' 정일우 신부 선종

2014. 6. 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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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천주교 예수회 정일우(사진·미국이름 존 데일리) 신부가 2일 오후 7시50분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향년 79.

고인은 한국 천주교의 양심적 신부들이 가장 존경하는 빛과 같은 존재다. 판자촌에서 산 빈민사목의 대부이자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 지도신부이기도 했다.

1935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 신부는 18살 때 예수회에 입회했다. 세인트루이스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고인은 25살이던 60년 9월부터 3년간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한 뒤 사제 서품을 받고 66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고인은 예수회 수련장으로 영성신학을 지도했지만 복음을 입으로만 전하고 있다는 강한 회의 속에 73년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미 69년 홀로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할 만큼 약자들과 함께해 왔다. 그로 인해 몇 번이나 강제추방될 뻔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정든 한국과 벗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 같았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에 눌러앉게 된 고인은 정부의 철거정책에 내몰리는 철거민들과 함께 청계천, 양평동, 상계동 등에서 늘 함께했다.

철거민 공동체 식구들은 아무런 가식 없이 청년들과 술을 함께 마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대해주는 정 신부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대하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내공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를 '우리 곁에 온 예수'처럼 반겼다. 양평동 판자촌에서 철거당한 빈민 170가구와 함께 경기도 시흥 소래면 신천리로 옮겨간 그는 빈민운동가 고 제정구씨 등과 함께 복음자리 공동체를 꾸려 20여명과 함께 먹고 자며 살았다.

그는 70살 생일을 앞두고 무려 63일간 지속한 단식으로 죽음 직전에 이를 정도로 몸이 상하는 바람에 그동안 서울 평창동 성이냐시오집에서 요양해왔다.

고인의 빈소는 여의도성모병원, 장례미사는 예수회장으로 4일 오전 8시30분 서울 신촌 예수회센터 3층 성당에서 거행된다. (02)3779-1526.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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