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모 돌리면 외국관객도 따라 해, 우리가 헤드뱅잉 원조"

허윤희 기자 입력 2016. 10.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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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방일영국악상' 김덕수 사물놀이 名人] '사물놀이' 장르 탄생의 주역, 세계로 확산시킨 일등 공신 "장구채 놓는 날이 숟가락 놓는 날"

"장구에 있어서 그는 거의 신접(神接)한 경지다."

올해 방일영국악상 수상자 김덕수(64·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명인에 대한 황병기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장의 평이다. 사물(四物)놀이라는 장르를 탄생케 했고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시킨 주인공. 스스로 '글로벌 광대'라 칭하는 그에게 수상 소식을 전하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김덕수가 방일영국악상을 받은 건 이변이에요. 남사당이나 풍물, 탈춤 같은 연희는 민초들의 삶과 함께해 왔지만 국악 내에서도 아직 찬밥 신세거든요. 전통 연희에 인생을 바친 모든 분을 대표해 받는 기분입니다."

그는 "장구 하나 들고 살아온 인생"이라고 했다. 9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난 그의 운명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결정됐다. 남사당의 벅구놀이로 유명했던 아버지 김문학씨는 "이번에 아들 낳으면 내 뒤를 잇게 만들겠다"고 했다. 1957년 만 다섯 살에 충남 조치원의 난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어른 어깨를 타고 맨 꼭대기에서 노는 '새미' 역할이었다. "한마디로 싹수가 있었지요. 그날로 저는 어머님 곁을 떠납니다. 유랑의 길을 떠난 거지요. 광대의 길이라고 할까."

남사당패들은 횃불이 꺼질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공연을 했다. 그에겐 "무대이자 교실이고 놀이터"였다. "최고 예인들에게서 배웠지요. 정식으로 일 대 일로 배운 건 아니지만 온종일 보고 듣고 따라 했어요." 2년 만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장구 신동(神童)으로 주목받았다. 그가 속한 남사당패가 1964년 해체되면서 유랑 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때 국악예술학교 교장이었던 기산 박헌봉 선생이 아버지를 만나 입학을 권유했다. 그는 중고 재학 시절 내내 학교 현악실에서 밥해 먹으며 자취했다고 했다.

"국악계에서 지진이 날 정도의 강력한 사건(황병기)"인 사물놀이는 1978년 탄생했다. 건축가 고 김수근 선생이 만든 소극장 '공간 사랑'에서 제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이 열렸다. "이광수·최종실·김용배(작고)와 함께 장구·꽹과리·북·징을 신들린 듯 두드렸어요. 좁은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네 악기로 연주를 해보자고 아이디어를 짰지요."

김덕수는 1982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 타악인 대회' 무대를 잊지 못한다. 사물놀이가 세계 음악계에 첫선을 보인 날이다. 김덕수 팀은 12번의 커튼콜을 받았다. 그는 "대박이 났다. 사물놀이는 워낙 비트가 강해 어떤 타악기와 같이 공연해도 압도해버린다"고 했다. 그날 이후 세계 무대에서 수없이 초청을 받았고 세계 백과사전에 '사물놀이'가 보통 명사로 등재됐다.

"해외에서 공연하면 환호가 말도 못해요. 우리가 상모를 돌리면 관객들이 전부 일어서서 머리를 돌리고 있어요. 요즘 록 페스티벌에서 헤드뱅잉 하잖아요? 우리가 원조라니까요(웃음)."

그의 말에도 손짓에도 리듬이 실려 있었다. 김덕수는 "사람들은 타악을 '장단'이라고 하지만 나는 '가락'이라고 한다. 실제로 장구에도 높낮이가 있다"고 했다. "장구의 한가운데 면을 칠 때와 옆으로 비켜 칠 때가 음이 다릅니다. 다섯 음 정도를 낼 수 있어요. 1989년 50분짜리 '장구 산조'를 발표한 것도 독주 악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내년은 그가 데뷔한 지 60주년 되는 해. 교수로서는 정년을 맞는다. "전통은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가 다르고, 우리 세대와 학생들 세대가 다릅니다. 스승들이 제게 물려줬듯이 세계 속으로 나갈 우리 소리의 근본이 학생들에게 있다는 사명감을 갖고 가르치죠. 수업을 하고 나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기 때문에 하루 세 번씩 러닝셔츠를 갈아입어요."

지금도 김덕수는 매년 100회가량 국내외 무대에 오른다. 언제까지 현역으로 장구채를 잡을 거냐고 물었다. 그는 "그날이 내 숟가락 놓는 날"이라며 껄껄 웃었다.

☞'국악계 노벨상' 방일영국악상은

1994년 출범한 방일영국악상은 방일영 선생과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이 설립한 방일영문화재단이 국악 전승과 보급에 공헌한 명인 명창에게 수여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국악상이다.

첫 회 수상자인 만정 김소희 선생을 비롯, 이혜구(2회) 박동진(3회) 김천흥(4회) 성경린(5회) 오복녀(6회) 정광수(7회) 정경태(8회) 이은관(9회) 황병기(10회) 묵계월(11회) 이생강(12회) 이은주(13회) 오정숙(14회) 정철호(15회) 이보형(16회) 박송희(17회) 정재국(18회) 성우향(19회) 안숙선(20회) 이춘희(21회)에 이어 작년 김영재 명인까지 최고의 국악계 스타들이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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