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내가 한국의 인디애나 존스라고? 고고학자가 보물 사냥꾼인 줄 아나"

전현석 기자 입력 2016. 10.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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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10년 마친 정영호 前단국대 박물관장 인디애나 존스는 엉터리 고고학자.. 고고학은 옛것을 연구하는 학문 古書에도 숨겨진 자료 무궁무진.. 무덤 파헤쳐서 보물 찾는게 고고학의 전부 아니다

호불(豪佛) 정영호(82) 전 단국대 박물관장 겸 석좌교수는 한국 고고미술학계의 원로다. 교과서에 나오는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198호),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를 찾아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유적·유물 수백여 점을 발굴·조사한 공로로 1979년 대한민국문화상 대통령상, 2001년 만해학술상을 수상했다. 정 교수는 2006년부터 작년까지 10년간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확인시켜주고 역사를 가르치는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강사로 활동했다. 그가 그동안 가르친 교사는 5200여명, 일반인은 1900여명에 이른다. 그는 올해 '한민족사 탐방' 강사에서 은퇴했으나 학자로서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교수님은 한국의 인디애나 존스 같은 분이시군요"라고 했더니 정영호 교수가 '버럭' 했다. "어디서 그런 영화에나 나오는 엉터리 고고학자 얘기를 해? 그런 식의 발굴은 파괴 행위예요. 번쩍거리는 유물만 빼내고 무덤이나 다른 건 다 망가뜨리잖아. 고고학(考古學)이란 건 글자 그대로 옛것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고서(古書)에도 무궁무진한 자료가 숨어 있는데, 땅 파고 무덤 파헤쳐서 보물 찾는 게 고고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안타까워."

지난달 25일 정 교수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던 경주에 막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문화재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고고학은 보물찾기가 아니야"

―경주 문화재는 괜찮던가요?

"제가 1950년대부터 경주 답사를 해왔던 사람이에요. 불국사, 다보탑, 석굴암 다 끄떡없었어요. 첨성대는 상부 모서리가 5㎝ 더 벌어졌다고 하는데, 괜찮겠더라고."

―기왓장은 많이 떨어졌던데요.

"수리하려고 예비로 지붕에 올려놨던 기와가 미끄러진 경우가 많았지요. 기와는 태풍 올 때가 더 많이 떨어져요."

― 지진 대비책은 필요하지 않나요?

"맞아요. 그런데 당장 무너질 것처럼 얘기하면 안 되잖아요."

―경주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는데요.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나는 끝까지 반대했는데."

―왜요?

"경주에 공업단지가 있어요? 산업단지가 있어요? 관광으로 먹고사는 곳인데 재난 지역을 선포하니까 관광객 발길이 뚝 끊겼어. 방금 전화가 왔는데 호텔이고 식당이고 다 해약 천지래. 우리나라 국민이야 호들갑 떨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찾겠지만, 일본과 중국에서는 재난 지역이라고 하면 진짜 큰일 난 줄 알아요. 지진 대비는 장기적으로 해야지, 당장 재난 지역 선포해서 국가에서 공짜로 돈 좀 얻어낼 생각만 한 거지요."

―경주시와 문화재청이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25년까지 9450억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요.

"욕심부리는 거지요."

―가치 있는 유물을 발굴해서 사람들에게 선보이면 좋은 것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거하고 똑같거나 비슷한 게 잔뜩 전시돼 있는데? 경주에선 고분 성격들이 다 비슷하거든요. 중국 진시황제 무덤을 보세요. 돈 벌려고 개발은 했지만, 진짜 무덤은 그대로 놔두고 그 앞에 병마용(兵馬俑)만 발굴했어요. 일본은 나라에 있는 평성궁을 50년 넘게 발굴하고 있어요. 그리고 땅을 파야만 관광 자원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지금 발굴해 놓은 문화재를 잘 관리해서 어떻게 활용할지 연구해야지. 문화재는 관광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학술적 차원에서 연구하고 어떻게 잘 보존할 것인지도 생각을 해야지요."

별명은 칼, 쌍권총

정 교수는 1952년 서울대 사범대학 역사과에 입학하면서 고고미술학 길에 들어섰다. "한 고고학 강의를 들었어요. 해방 직후인 1946년 경주에서 호우총 고분을 발굴할 때 우리 기술과 경험이 부족해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일했던 일본인 주임을 불러다가 그 사람 지휘를 받았다고 해요. '참 부끄러운 얘기구나. 우리 문화재를 우리 손으로 조사해서 발표해야겠다' 생각을 했지요."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숙명여고 역사 교사가 됐고 스승이자 미술사학의 거목인 초우(蕉雨) 황수영 선생 등이 주축이 된 고고미술동인회에서 활동했다.

―고고미술동인회 간사였다면서요.

"당시 아버지가 국민은행 종로지점장으로 있었는데 집에 전화기가 있었어요. 연락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간사가 됐죠. 10년 동안 고고미술동인회 본부 주소가 우리 집이었습니다."

―고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어떻게 답사를 다녔나요?

"사진반과 사생반 지도 교사를 맡으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죠. 뭐든지 보고 싶은 문화재는 가서 사진을 찍고 그날 밤 밤새워가면서 현상을 했습니다."

―간송(澗松)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도 자주 뵈셨죠.

"황수영 선생님을 따라 전형필 선생 댁에 자주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소설가이신 월탄(月灘) 박종화 선생, 역사학자 동빈(東濱) 김상기 선생, 사회학자 상백(想白) 이상백 선생, 미술사학자 수묵(樹默)진홍섭 선생 등을 뵈었죠. 그분들께 많이 배웠습니다."

―1967년 단국대 사학과 교수 겸 박물관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셨죠.

"1년이면 절반 가까이 현장에 있었죠."

―별명이 칼, 쌍권총이었다면서요.

"저는 모르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고희(古稀) 잔치를 열어주면서 얘기하더군요. 답사나 발굴 작업을 하면 아침 6시에 기상하자마자 시간표에 있는 대로 칼같이 하고, 양손 검지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꼼꼼하게 지적을 하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대요. 고고학은 절터 기와 한 장이라도 놓치면 안 되니까요."

―당시 평소 신고 다니는 신발에 철판을 깔았다고요.

"문화재 답사를 할 때 꼭 군화를 신고 다니는데, 평소에도 답사 다니는 기분으로 다니려고 무게를 같게 한 겁니다. 그 덕분인지 답사를 가면 제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습니다."

"요즘도 답사복만 입으면 힘이 나"

정 교수는 1976년 상처(喪妻)했다. "새벽에 지방 답사를 갔다가 그날 저녁 서울역에 도착했어요.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아내 대신 제 누이동생이 전화를 받더니 울어요. 심장마비였대요.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는데…."

―당시 딸들이 어렸겠네요.

"아버지·어머니께서 저를 부르셔서 '아범은 앞으로 어쩌겠나' 그러시더군요. '저는 공부에만 전념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모님께서 '딸 더 낳았다고 생각하고 손녀들을 키워줄 테니 염려 말고 공부해라'하시더라고요. 제가 8남매 중 맏이인데, 부모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죠."

―이후에 1978년 단양 신라 적성비, 1979년 중원 고구려비를 발굴했죠.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형님께서 애를 쓰고 있으니까 지하에 계신 형수님께서 보살펴주시는 것 같다'고요."

현재 정 교수 곁에는 그가 '수석연구원'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부인이 있다. 그는 "제가 손이 아파서 보고서나 글을 오래 쓰지 못하는데, 내가 불러주면 아내가 대신 타이핑을 해 준다"면서 "30년쯤 저와 함께 지내니까 웬만한 박사보다 낫지요" 했다. 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아내가 고생 참 많이 했지요. 딸들 뒷바라지 다 해주고.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했다.

―2014년 은퇴하셨는데, 여전히 답사를 다니시죠.

"그럼요. 몸이 좀 찌뿌둥하다가도 답사복 입고 군화를 딱 신으면 힘이 납니다."

―대마도를 자주 찾으신다고요.

"지금까지 195회 방문했는데, 내년이면 200회 될 겁니다."

―대마도에 비석도 10개 세우셨다던데.

"조선 말기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 발자취를 찾으려고 1977년 처음 갔죠. 그런데 처음에는 대마도 사람 아무도 협조를 안 해요. 몇 년 후에 겨우 친해져서 1986년 최익현 순국비를 세웠어요. 그때 이후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조선통신사비, 덕혜옹주비 등을 세웠죠."

―그것 때문에 연구실로 쓰던 오피스텔도 팔았다면서요.

"고고미술학자가 입에 풀칠하고 살 정도면 됐지요."

정 교수는 1974~79년 불교 조계종의 종조(宗祖)라 할 수 있는 강원 양양군 진전사지의 도의국사 사적도 발굴했다. 당시 발굴 작업을 위해 주변 땅 1만909㎡(약 3300평)을 사비로 매입했었다. 그는 이 땅을 10여년 전 진전사에 무상 기증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묻자 그가 답했다. "세상에 절터 팔아먹는 놈이 어디 있소? 진전사 복원한다길래 그대로 등기 이전 시켜줬지요."

―앞으로 또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현재 3층만 남아 있는데 원래 9층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해요. 주변에 석탑에서 깨진 벽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걸 가지고 제대로 작업하면 5층까지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또 10년 동안 중국을 다니면서 요나라 시절 불탑을 연구했는데 관련 책도 내야 하고 아직도 할 게 많아요. 아유, 내가 정말 10년만 젊었어도. 그래서 제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는 거 아닙니까."

정 교수는 문화재 답사 도중 비구니 5명과 한방에서 잔 이야기, 배우 윤정희가 영화 '무녀도' 촬영 도중 금강에서 벌거벗고 춤추는 모습을 본 이야기, 발굴하다가 간첩으로 몰린 이야기, 함께 발굴하던 교수와 둘이 맥주 102병을 마신 일화 등을 쉼없이 이야기했다. 6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의 집에는 60년간 국내외를 답사하며 찍은 사진 100만장과 슬라이드 20만장이 보관돼 있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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