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가난한 환자 절망까지 씻기는 '비누천사'

입력 2016. 9. 2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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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의료원 간병인 이인순씨월급 90만원 쪼개 목욕용품 구입.. 병실 홀몸노인 등에 10년째 봉사"깨끗한 몸으로 떠나게해줘 감사".. 70대, 비누세트 선물뒤 마지막 길로
[동아일보]
10년째 병원에서 간병 일을 하는 이인순 씨가 6.6㎡(2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겨 주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2일 오전 2시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한 노인이 쓸쓸히 숨을 거뒀다. 7월 낙상으로 입원한 임모 씨(78)였다. 임 씨의 임종을 간병인 이인순 씨(63·여)가 지켰다. 임 씨는 숨을 거두기 전 밀린 병원비를 갚고 남은 전 재산 5만 원과 비누 한 세트를 이 씨에게 건넸다. “깨끗한 몸으로 저세상에 갈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나지막한 말과 함께.

임 씨는 기초생활수급비로 다달이 받는 30만 원을 치료비로 내야 해 필요한 기초 생활용품을 살 여력이 없었다. 몇 주째 씻지 못하고 속옷을 갈아입지 못해 그의 몸에선 고약한 냄새가 났다. 어느 순간 병실 환자는 물론이고 의료진도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런 임 씨를 본 이 씨가 수중에 있던 2만 원으로 새 속옷과 목욕용품을 사서 그를 찾아갔다. “머리 감겨줄게요.” 이 씨가 건넨 첫인사였다.

이 씨는 10년째 이 병원에서 간병을 하고 있다. 병원 내에 그의 유일한 휴식공간에는 비누와 수건 등 각종 목욕용품이 가득하다. 국립중앙의료원에는 빈민과 홀몸노인, 노숙인들이 몰린다. 간병해줄 가족이 없어 병원에서 사람을 고용해 무상간병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이 씨는 기본 생활용품조차 살 형편이 안 되는 환자들을 자비를 털어서 돌보고 있다.

이 씨가 환자들을 정성껏 씻기는 배경에는 10년 전 위암 말기로 사별한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 병원비를 벌기 위해 밤낮없이 공장에서 봉제 일을 하다 간병도 제대로 못 하고 남편을 떠나보냈다. 남편을 잃은 충격과 미안함 속에 한쪽 시력마저 잃었다.

간병은 생각보다 고되면서도 수입은 넉넉하지 않았다. 하루 12시간 한 달을 꼬박 일해 90만 원을 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오랜 투병으로 몸이 나뭇가지처럼 변한 환자들과 비누를 살 돈조차 없어 씻기를 포기한 환자들, 이 때문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버릴 수 없었다. 주위에선 “돈 벌려고 남들은 피하는 궂은일을 하는데 이마저도 환자들 목욕용품 사는 데 쓰면 뭐가 남느냐”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때면 이 씨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는 이유로 죽는 순간까지 더러운 몸으로 죽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 씨는 21일에도 6.6m²(약 2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환자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었다. 보통 간병인 1명이 5명의 환자를 간병하지만 이 씨는 다른 간병인들이 힘들다고 거부한 환자들까지 찾아가 씻겨주고 있다. 그는 목욕용품이 담긴 바구니를 가리키며 “보물”이라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는 “새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듯 환자들도 씻고 나면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며 “일반 사람들이 쓰다 버리는 비누나 샴푸가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다시 살고 싶게 만드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이 씨가 일하는 병동에선 1년 새 일을 그만둔 간병인이 줄을 이었지만 그는 10년째 환자들 곁을 지키고 있다. 환자 목욕을 끝낸 이 씨는 몽땅해진 비누를 다시 보물 바구니에 챙겨 넣고 부족한 목욕용품을 사러 병실을 나섰다. 그의 양말에는 구멍이 나 있었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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