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문화人-②] 장사익 "15개 직업 전전하다 46살에 데뷔했어유"

이재훈 2016. 9. 1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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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올 초 성대 수술 후 다시 무대로 돌아온 소리꾼 장사익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11. park7691@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올 초 성대 수술 후 다시 무대로 돌아온 소리꾼 장사익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11. park7691@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올 초 성대 수술 후 다시 무대로 돌아온 소리꾼 장사익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11. park7691@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올 초 성대 수술 후 다시 무대로 돌아온 소리꾼 장사익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11. park7691@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올 초 성대 수술 후 다시 무대로 돌아온 소리꾼 장사익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9.11. park7691@newsis.com

■보험맨~카센터도 근무…'늦깎이 가수 전설'
고교때 가수 꿈…일하면서도 노래 포기 안해
인생 2막 23년차 소리꾼 "내 노래 현대 민요"
올초 성대 수술후 회복 10월 5~7일 콘서트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소리꾼 장사익(67)은 눈물바람으로 올 한해를 시작했다.

성대에 손가락 한 마디만한 혹이 발견됐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노래를 부르던 하루하루는 꽃이었고 노래를 못하는 날들은 눈물이었다”고 했다. 그 말은 구슬픈 노래 이상으로 비수처럼 듣는이의 마음에 꽂혔다.

가을이 오고 있는 날, 서울 세검정 자택에서 장사익을 만났다. “노래하는 사람은 목을 잃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유. 당시에는 정말 충격적이었쥬.” 특유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더 구슬프게 들렸다.

전조 현상은 몇 년 전 부터 있었다. 목 안에서 모래알이 서걱거리는 듯했다. 호흡이 짧아지고 물을 마시는 횟수도 늘었다. 지난해 연말 잇따른 공연 뒤 신년음악회 등 다시 1월에 노래를 소화하는데 벅찼다. “너무 힘들어 노래를 못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유.”

◇가수 인생, 이제는 2막 시작

깊은 곳에서 한을 끌어내 슬픔을 달래주는, 장사익의 ‘긍정의 힘’은 여전했다. 올해 2월에 그의 목에 칼을 댔다는 소리는 끔찍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의 순간이었다”고 주름살 가득히 웃는 그를 보며 마음 한켠의 막혔던 곳이 조금이나마 뚫렸다.

“끝과 끝은 맞닿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유. 혹시나 혹을 그 때 발견 못 했으면 어쩔 뻔했어유? 수술 후 한동안 ‘묵언 수행’을 한 뒤 목소리를 슬슬 내며 다듬었쥬. 앞만 보고 가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은 거예유. 올해 상반기는 소중한 순간이에요. 돈을 주고도 못사는 시간이쥬.”

올해 6월 KBS 1TV ‘가요무대’의 브라질 상파울루 현지 공연 녹화에서 소리의 판을 다시 열었다. 현재 기존 성대 상태의 80~90%까지 끌어올렸다. 10월 5~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치는 ‘장사익 소리판 - 꽃인듯 눈물인듯’이 문제없는 이유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적한 세검정 주택가, 한켠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장사익의 자택 곳곳에는 시집이 가득하다. 화장실 변기와 벽 틈 사이에도 책들이 빼곡하다.

이번 공연 시작 역시 시(詩)다. 김춘수 ‘서풍부’, 허영자 ‘감’, 마종기 ‘상처’에 곡을 붙인 노래들이 서곡처럼 이어진다. 후반부에는 ‘동백아가씨’, ‘님은 먼 곳에’, ‘봄날은 간다’ 등 그를 대표하는 곡들이 물론 울려퍼진다.

“시는 인생을 단순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만들쥬. 제 공연에서 잘 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만큼 가슴 속에 감성, 무엇 하나 담고 가셨으면 하는 마음에 시들을 골랐어유.”

데뷔 20주년이던 2년 전 콘서트의 주제는 초심이었다. 이번 콘서트는 앞으로 20년 후까지 노래를 더 하고자 마음을 다지는 콘서트다. “가수 인생 2막을 여는 거예유. 목소리에 다시 의지하기 시작하는 공연이 되지 않을까 해유.”

◇1인 종합 예술

장사익은 목소리만으로도 공연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고려장 설화가 바탕인 시인 김형영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꽃구경’이 예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고 아들등에 업혔네. (…) 꽃구경 봄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웅큼씩 한 웅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즉석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그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전기수(조선 후기의 직업적인 낭독가)의 이야기 또는 소리꾼의 판소리를 연상케 하는 그의 노래와 몸짓은 그 자체로 팝업책 같다. 실제로 어머니와 아들은 물론 길까지 눈앞에 현현하는 듯하다. 장사익은 “제가 지금 부르는 노래는 ‘현대민요’라 부르고 싶어유”라고 말했다.

대표곡 ‘찔레꽃’으로 ‘국악 대상’을 받았지만 장사익이 부르는 노래 장르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대중가요는 물론 클래식, 재즈, 퓨전 등을 모두 아우른다. 한 때 태평소 연주자로 통한 그는 그룹 ‘서태지와아이들’의 ‘하여가’ 라이브 무대에서 태평소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점들이 똘똘 뭉쳐 장사익은 무엇보다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씨는 청중을 후려치는 그의 목소리에 대해 ‘세기말의 위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제 목은 가요 목도 아니고, 판소리 목도 아니고, 아무 목도 아니에유. 허허. 웅변을 하고,
국악 악기도 하고, 인생에서 여러 세파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합해져 나오는 소리유. 저는 제 지금 목소리가 ‘2016년 한국 사람들의 보편적인 목소리’라고 생각해유. 이 목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몰라유. 허허.“

천천히 생각을 더 하더니 아마 “몸 전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라고 웃었다. “노래를 끝날 때마다 다리까지 저리거든유. 참기름 짜듯이 온 정성을 다해 부르니, 농도가 좀 진하게 나온다고 할까유.”

장사익의 노래는 특유의 악센트가 있다. 그는 이를 ‘한국에는 산이 많다’고 에둘러 비유했다. “산의 굴곡이 제 노래의 악센트에유. 마늘, 고추를 먹어서도 그렇쥬. 맵잖아요. 된장이라는 토양에 그런 걸 먹으니 종종 톡 쏘는 거고유. 그런 부분을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유. 허허.”

◇ 직업 15개 전전한 늦깎이 가수

“넘어졌어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는 이유유? 못 배우고 부족해서 그렇쥬. 하하.” 상고 출신인 장사익은 늦깍이 가수의 전설로 통한다. 1995년 우리나이로 마흔 여섯 살이 되던 해 데뷔 앨범 ‘하늘 가는 길’을 냈다. 그 전에는 15개 직업을 전전했다. 보험회사 직원을 시작으로 전자회사, 가구점 등을 거쳐 앨범을 내기 직전까지 매제의 카센터에서 일했다.

“직장 열다섯 군데를 돌아다는 건 창피한 거유. 근데 돌아보면 인생은 길을 찾는 과정이었쥬. 이 길을 가다, 넘어지면 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상처 나거나 막히거나 해도 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노래는 23년째 접어들었으니 제 길인 거쥬. 허허.”

직장을 어렵게 얻었더라도 바로 옮길 생각을 하고, 꿈을 여전히 못 잡은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 많을 법하다. “산악인 박영석 씨가 말씀하셨유. 안나푸르나 정상을 목표로 하지만 오를 때는 그 정상을 보지 않는다고유. 바로 내 앞 1미터를 본다는 거예유. 바로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거쥬. 요즘 금방 승부를 보려고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멀리 보고 최선을 다하다보면 어느 날 자신이 목표한 곳에 있을 거예유.”

◇장사익, 장나신에서 소리꾼 장사익이 되기까지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사익이 첫 곡을 발표한 건 1970년이다. 당시 여러 가수들의 곡이 담긴 컴필레이션 LP B면에 ‘대답이 없네’를 녹음했다. “목청이 좋다고 생각해 고등학교 때 가수가 되볼까 생각했어유. 상고 출신이니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쥬. 1967년 첫 직장을 다니면서 동시에 낙원동에서 노래를 배웠어유.”

당시 예명은 장나신(張裸身).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린다’는 뜻이었다. 노래로 세상에 나가겠다는 뜻을 담았다. 결국 본명 사익(思翼)으로 귀결 될 길이었다. ‘생각이 날아다닌다’라는 뜻이다. 장사익의 집 2층 거실에 앉으면 인왕산 뒷모습이 환하게 보였다. 뫼 산(山)자를 그대로 빼닮았다. 광활한 자연을 보고 있으면, 그의 생각이 절로 날아다닐 수밖에.

100년 이상 된 가옥에서 버려질 위기에 처했던 대청마루를 탁자로 사용하고 있는 그는 그 위에 놓인 컵에 연신 녹차를 따르며 말했다. “요즘 더 자연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유. 특히 올해 삶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죽음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들었죠. 깜깜할 때 불빛의 고마움을 알잖아유.” 장사익의 목소리는 한껏 단단해져 있었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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