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공시족에서 '아가씨 농부'로.. 주희씨가 참기름을 짠다

화천/김수경 기자 입력 2016. 9.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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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학원가 생활 접고 歸鄕.. '20代 농부' 송주희씨 다친 엄마 돌보려 고향에 조금씩 농사 돕다 보니 공부보다 적성에 맞아 '아, 이거구나' 귀농 결심 동네 이름 '너래안' 을 상표로 깨 수확해 기름 짜서 판매 SNS 타고 소문 퍼져 이번 달엔 800병 팔아 농부 아빠 어깨 너머로 배워 여기선 할 수 있는 게 많아.. 서울서 공시족 하면서 떨어졌던 자존감 되찾아

깨 볶는 공장이 가까워지자 참기름 냄새가 물씬 났다. 공장 사무실에서 머리카락을 바짝 묶은 송주희(27)씨가 참기름과 들기름을 담은 갈색 유리병을 상자에 넣고 포장하고 있었다. 동그랗고 큰 눈에 오똑한 코, 핫팬츠를 입은 그녀는 주말 서울 강남역에 놀러 나온 여느 20대와 다름없었다. 다만 얼굴만큼은 화장기 없이 까무잡잡하게 그을려 있었다. 3년 전 고향이자 부모님 삶터로 귀농한 청년 농부 주희씨는 "추석 앞두고 있어서 너무 바쁘다. 죄송하다"며 기름 짜는 기계 쪽으로 달려갔다.

강원 화천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차로 40분가량 떨어진 간동면에 660㎡(약 200평) 크기의 공장이 있다. '화천 토종잡곡 유통센터'라고 이름 붙은 이곳이 주희씨가 참깨와 들깨로 기름을 짜는 곳이다. 공장 설비는 깨 볶는 기계와 기름 짜는 기계 두 대뿐이다.

들기름 병 10여개를 포장하느라 정신없는 주희씨와 어머니(김순자·62) 옆에 앉아 '너래안'이라고 쓰인 상표 스티커를 기름병에 붙이기 시작했다. 일을 함께 하지 않고는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너래안'은 이 동네 이름이자 주희씨의 기름 상표다. 기름을 갓 짜넣은 병은 따뜻했다. "따끈하죠? 지금 막 짜 내린 거예요." 주희씨가 말했다.

농촌으로 간 경찰 지망생

―추석 땐 항상 바쁜가요?

"지금처럼 주문이 많이 들어온 건 처음이에요. 추석 선물로 참기름 세트를 찾는 고객들이 많아졌는데 자동화가 안 돼 있으니 모든 공정을 이렇게 손으로 해야 돼요. 서울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던 때보다 더 바빠요."

주희씨가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2013년 고향으로 돌아온 건 어머니 김순자씨를 위해서였다. 그해 1월 밭에서 거둬들인 콩으로 메주를 쑤던 어머니의 오른쪽 둘째 손가락이 절단기에 말려 들어갔다. 접합수술을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화천을 떠나 서울로 유학 갔던 네 자매 중 막내 주희씨가 어머니 곁에 있겠다고 자처했다. 서울 노량진에서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내려온 건가요?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어요. 엄마 대신 살림을 해야 했고 또 엄마가 우울증에 빠지실까 봐 걱정돼 머물렀던 거죠. 그때가 겨울이라 농사일이 없는데도 엄마가 매일 새벽 쑥을 뜯고 나물 캐러 다니시는 거예요. '쉬어야 하는데 왜 자꾸 돌아다니느냐, 가만히 집에 좀 계시라'고 잔소리를 했는데, 엄마가 '가만히 있으면 더 병이 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평생 밭에서 일한 농사꾼이시니까요. 그런 엄마를 그냥 따라다녔어요. 새벽 4시든 5시든 말이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농사를 돕게 됐고, 해보니까 공부보다 더 재미있고 적성에 맞더라고요. '아, 이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꿈은 포기했나요?

"축구가 너무 좋아 호날두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포르투갈어과에 가고 싶었는데… 수능을 세 번이나 봤거든요. 그러고도 원하는 대학에 못 가서 편입시험 준비도 했었고요. 그러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꿨어요. 그때는 원하는 게 있었다기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남들이 좋다는 대로 살았던 거죠."

마을의 유일한 20대 농부

주희씨 아버지 송임수(71)씨는 4대째 간동면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넓은 평야와 바위'라는 강원도 사투리 '너래안' 근처 밭 2만6000㎡(약 8000평)에서 깨와 벼, 옥수수 등 작물을 키운다. 주희씨는 2014년 '너래안'을 농작물 상표로 쓰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그렇게 송씨 가족은 처음으로 자기 브랜드를 갖게 됐다.

―젊은 농부라고 칭찬을 많이 하던데요.

"아빠가 평생 일구신 밭에서 하나씩 배우고 있는 단계니까 아직 농부라고 하긴 부끄러워요. 수확하고 기름 짜고 판매까지 하니까 농부이자 판매자인 건 맞죠. 아빠가 무뚝뚝하셔서 농사를 잘 가르쳐 주시지는 않고, 제가 어깨너머로 보면서 익히는 식이에요. 처음에 혼자 660㎡(약 200평) 정도 땅에 작물 20여 가지를 키웠어요. 농사일을 하겠다고 작정하니까 이것저것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잘 자라던가요?

"농사책을 보면서 끙끙댔는데도 심는 족족 줄기가 꼬부라지고 제대로 자라지 않았어요. 농사에 소질이 없나 싶어서 낙담도 했어요. 아빠가 한번 쓱 훑어보고 가시더니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그거 원래 잘 안된다.' 아빠가 트랙터 운전 같은 건 절대로 시키지 않으세요. 트랙터가 험한 길에서 옆으로 넘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올해에만 동네 어르신 두 분이 그런 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위험한 건 아직 전부 당신이 직접 하세요."

중학교 때까지 이곳에서 아버지의 트랙터를 타며 자란 주희씨에게 농사는 일보다 놀이였다. 그때 함께 밭에서 뛰어놀던 친구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마을에 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요.

"제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마을 어르신들이 고맙다고 하세요. 동네가 활기차고 밝아졌다고요. 도시에 있는 어릴 적 친구들도 가끔 연락해요. 고향을 지켜줘서 고맙다고요. 다들 저한테 기특하다고 해요. 저희 엄마만 빼고요. 엄마는 제가 대학 졸업장 없는 걸 지금도 당신 탓이라고 하세요. 언니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서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를 잡았거든요. 제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인 거죠." 어머니 김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픈 손가락이 아니라 예쁜 손가락이지. 요즘 젊은 애들이 부모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하나요."

―서울 생활과 무엇이 가장 다른가요?

"서울서 뚝뚝 떨어졌던 자존감이 여기서 많이 회복됐어요. 공시족 22만명 시대라고 하잖아요. 노량진에서 수백명이 한꺼번에 학원 강의를 듣고 있다 보면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하는 자괴감이 들었거든요. 여기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아요. 가끔은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서울에서는 나를 보여줄 기회조차 없었는데 여기선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아주 많이 주거든요."

"여기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주희씨가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은 기름 짜는 기계를 고치는 것이었다. 고장난 기계는 기름때에 찌들어 굳어 있었고, 부모님은 깨를 재배해 그대로 도매상에게 넘겨왔다. 기름으로 만들어 파는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돈만 쥘 수 있었다. 주희씨는 기계를 전부 뜯어서 부품을 하나하나 닦고 다시 조립했다.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주희씨는 참깨와 들깨를 수확해 기름을 직접 짜서 팔기 시작했다. SNS에 깨와 기름, 깨밭 사진을 올렸다. '유기농으로 재배해 갓 짜낸 기름'이라는 광고 문구도 만들었다. 젊은 여자 농부를 신기하고 기특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주희씨 사진과 이야기를 퍼 날랐다. 첫 달에 기름 30병이 팔렸다. 그 이후 마을 농가 27가구가 재배하는 콩, 깨, 고추, 옥수수 등의 농작물 대부분을 주희씨가 인터넷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추석 특수가 낀 이번 달에는 무려 800병 이상 팔려나갔다.

―농사가 쉽지 않지요.

"해 뜰 때 눈떠야 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봄에 한창 바쁠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밭으로 나가요. 11시쯤 햇볕이 강해지면 일하기 어렵거든요. 그 사이에 씨 뿌리고 밭 매려면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요. 깨는 심고 키울 때 사람 손이 필요해요. 심지어 낫으로 하나하나 베 줘야 해요. 깨를 세워서 말리는 것까지 손으로 하고 그다음에야 탈곡기로 깨를 거르죠. 온종일 허리 굽히거나 쭈그려 앉아있는 일이에요."

―어른들과 일하는 건 어때요?

"기름을 짜서 판매한 이유는 농사 못 지으시는 70~80대 어르신들을 위해서였어요. 이렇게 앉아서 기름을 병에 담고, 상표 스티커를 붙이고, 상자에 담는 일을 하시면서 용돈 버실 수 있게 한 거죠. 그런데 평생 농사만 지은 분들이어서 이런 작업을 잘 못하세요. 처음엔 화가 났어요. 종이 상자를 조립해야 하는데 엉터리로 막 구겨놓고, 스티커도 비뚤어지게 붙이시니까요. 그런데 그분들 손을 보고 엉엉 울었어요. 손가락이 다 굽고 손바닥은 굳은살투성이예요. 화를 냈던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죠. 요즘은 어떻게 어르신들이 더 편하게 효율적으로 일하실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시골 생활이 답답하진 않아요?

"또래가 없는 게 조금 아쉽긴 해요. 그런데 농업기술 교육을 받으러 가면 저같이 귀농한 청년들이 아주 많아요. 그 친구들과 통화하고 농사법도 이야기하면 그런 아쉬움이 해소돼요. 무엇보다 제가 기른 농작물이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가서 행복감을 준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한 일이에요."

오후 5시쯤 되자 기름 상자를 실으려는 택배 트럭이 도착했다. 주희씨는 물건을 트럭에 실으며 "안 깨지게 잘 부탁드려요" 하고 택배 기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는 "아직 어엿한 농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데 조금 부끄럽다"고 말했다. 마당에는 주희씨가 키우고 있는 햇고추가 빨갛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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