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계신 동포 여러분, 늦기 전에 뵙고 싶었습니다

정상혁 기자 입력 2016. 9. 6. 03:04 수정 2016. 9. 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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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송해, 日 군함도서 백두산까지 3국 6개 도시 누비다] KBS 세계 한인 다큐멘터리 촬영차 역사적 현장 찾아.. 두만강 앞에선 대성통곡도 "구봉서 선배 부고 듣곤 울컥.. 이젠 내 앞에 아무도 없네.."

희비애락(喜悲哀樂). 웃음이 슬픔 앞에 온다. "희극을 하려면 비극을 알아야 돼. 슬픔을 이해해야 즐거움도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7월부터 지난달 17일까지 일본 군함도와 중국 두만강, 러시아 사할린까지 3국 6개 도시를 누빈 구순(九旬)의 코미디언 송해가 말했다. 세계 한인의 날 10주년을 맞아 추석 특집으로 기획한 KBS 다큐멘터리 '송해, 군함도에서 백두산까지 아리랑' 촬영차 역사의 상흔이 깊은 현장을 찾았다. "30년 가까이 '전국노래자랑'에서 '멀리 계신 해외 동포 여러분, 해외 근로자 여러분. 지난 한 주 안녕하셨습니까' 인사해왔는데, 더 늦기 전에 직접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조선 청년이 강제 징용돼 혹사당한 군함도에선 피가 끓었다. "관광안내사가 일절 과거사 얘기를 안 해요. 그래서 손 번쩍 들고 물었습니다. 어린애까지 동원해 지하 벙커 지은 게 사실이냐고." 사할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국에 못 와 화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많대요. '술도깨비'가 붙어서. 고향 땅 못 밟고 그 추운 데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두만강 앞에 섰을 때, 그는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노랫말에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지만 흙탕물이 내려오데요. 초목도 무성하고, 무슨 도랑 같더만. 그 좁은 물길을 눈앞에 두고도 못 건너는 현실이 참…." 그날 송해를 알아본 한 조선족 동포가 음식을 내왔다. "황태 노랗게 말린 걸 세 마리 가져와 두들겨 주면서 그러더라고요. 북한산 황태, 조선족 막걸리, 순창 고추장, 이걸 같이 먹으면 입에서라도 통일이 되는 거라고."

곳곳을 방문할 때마다 송해는 노래를 불렀다. 군함도에선 '나그네 설움', 사할린에선 '고향설', 백두산에선 '아리랑'이 퍼져나갔다. "옛 가요를 두고 '흘러간 노래'라고 하는데, 잘못된 얘기죠. 이건 역사요. 조용할 뿐이지 존재하는 겁니다. '불러보고 싶은 노래'라고 해야죠." 그 불러보고 싶은 노래를 타지에서 흥얼거려야 했던 11국 해외 동포 21명이 지난 4일 서울에 모여 '전국노래자랑―세계대회 편' 본심 녹화를 마쳤다. "문화도 언어도 다른데 우리 노래를 하면 반드시 우리 소리와 억양이 튀어나와요. 참 신기해요."

송해의 희극인 인생도 노래에서 시작됐다. 1955년 악극단 가수로 데뷔한 그는 "노래, 연기, 사회 다 할 줄 알아야 했다. 뜨내기 생활을 오래 하느라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지만, 그 경험이 제 인생의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60년 세월이 흘렀다. 그는 지난달 27일 세상을 뜬 선배 고(故) 구봉서 얘기를 꺼냈다. "나보고 '곰팡이'라고 놀리곤 했어. 얼굴 삭았다고. 내가 노역(老役)을 많이 맡았거든. 그랬던 선배인데, 이젠 내 앞에 아무도 없네." 다큐멘터리 녹화를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고를 들었다. "코미디언 중 최고의 별이라고 그랬는데. 지금도 그 얘기만 나오면 울컥하고 허전해요." 배삼룡·백남봉·남철·남성남 등 원로 코미디언이 줄줄이 세상을 등졌다. "3년 동안 내 밑으로만 열두 명이 하늘로 갔어요. 지금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 엄용수가 예순셋이니, 세월 야속해."

세월이 가도 명절만 다가오면 아직 가슴이 저린다. 고향 황해도 재령은 여전히 멀다. "고향 못 가는 한(恨)은 뭐로도 못 풀겠지만, 사정 있는 사람끼리라도 자주 만나야지요." 그가 모임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서울 낙원동 사무실로 출근한다. 원로 코미디언의 사랑방이다. 지난달엔 이 동네에 그의 이름을 딴 '송해 길'도 생겼다. 그는 "낙원동이야말로 세계에서 제일 멋진 동네 이름"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낙원이지. 여기만 오면 사람 냄새 나고 참 좋아요. 웃고 떠들고, 술도 먹고." 4일 녹화를 마친 뒤에도 그는 새벽 1시까지 소주잔을 부딪쳤다. "지금도 술 먹기 시작하면 젊은이들 다 도망간다"며 껄껄 웃는다. "건강해야죠. 매주 웃기러 돌아다녀야 하니까." 송해는 이날도 '낙원'을 향해 지하철 5호선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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