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사람 풍경] 엉덩이에 굳은살, 침이 안 들어가 휜 적도 많아요

박정호 2016. 8. 27.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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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40년, 국가무형문화재 김대균
김대균 명인은 줄광대다. 줄과 바람을 벗 삼아 지난 40년 흥겨운 놀이판을 펼쳐왔다. 몸은 하늘에서 놀았지만 마음은 늘 땅 위의 관객과 함께했다. 그의 몸짓 하나, 얘기 하나는 우리를 향한 덕담이다. “줄광대는 서른이 환갑입니다. 체력이 예전 같지 못하지만 신나게 놀다 가야죠.”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는 날이 장날이다. 지난 20일 경기도 과천 야생화자연학습장에서 소담한 잔치가 열렸다. 이곳에 마련된 줄타기 훈련장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김대균(49) 명인의 외줄인생 40주년을 기리는 제자들의 노랫소리가 퍼졌다. 사설(辭說) ‘산천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울 때, 새가 한 마리 줄판에 날아드는데’에 이어 ‘새타령’이 시작됐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 가락에 스승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이날 제자 여섯은 올 여름캠프에서 갈고 닦은 기량을 자랑했다. “전체 차렷! 세상의 모든 부모님께 경례”라는 스승의 구호에 제자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실연(實演)이 시작됐다. 팽팽한 줄 위에 선 ‘인간새’ 여섯이 허공을 갈랐다. 걷고, 돌고, 치솟고, 아슬아슬 조마조마 긴장의 연속이었다. “똥꼬가 아픕니까”라는 스승의 농(弄)에 제자들은 “아니오”로 화답했고, “하얏차, 잘한다”라는 격려에 “예”를 쏟아냈다. 스승은 연신 “왔다!” “뜸들이지 마라” “명치가 무너지면 안 돼”를 외쳤다.
김대균 명인이 제자들과 함께 데뷔 40년 기념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올여름 구슬땀을 흘린 제자들의 시연도 펼쳐졌다. 옛 학동들의 ‘책거리’를 닮았다.

Q : “왔다!”라니, 신이 내렸다는 건가.
A : “광대와 줄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순간을 말한다. 명치가 가장 큰 중심이다. 두 번째가 엉덩이 타점(打點)이다. 또 동작마다 각기 세 번째 중심이 있다. 이 셋이 하나로 잡혀야 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0.01초 짧은 순간이지만 몸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뜸을 들이면 동작이 무너진다. 시간을 끌면 숯검댕 밥을 먹는 꼴이 된다.”

Q : 제자들 엉덩이가 성하지 않겠다.
A : “큰 문제가 아니다. 상처는 생겼다가 낫고, 또 아프다가 여문다. 그렇게 근육이 붙는다. 나도 어려서 속바지와 바지가 피범벅이 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굳은살이 박여야 한다. 한창 때는 몸에 쌓인 독기를 빼려고 침을 맞았는데, 굳은살 때문에 침이 들어가지 않고 휜 적도 많다.”
기자가 시험 삼아 삼줄 위에 올랐다. 작수목(줄을 고정하기 위해 X자 모양으로 세운 말뚝)을 향해 두 발도 떼기 전에 땅으로 떨어졌다. 높이 30㎝ 남짓한 낮은 줄이었건만 몸을 제대로 놀리기가 어려웠다. 훈련장에는 낮고 높은 줄이 5개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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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가장 편하게 탈 수 있는 높이라면.
A : “2.7~3m 사이다. 길이에 따라 장력(張力)이 달라지는데 25m가 적당하다. 그래야 관객이 보기에 편하고, 연행자(演行者)도 하기가 좋다. 줄의 반동을 이용해 재주를 부린다. 잔노릇·잔재비라고 한다.”

Q : 40주년 치고는 행사가 조촐하다.
A : “줄타기는 전승 취약 종목이다. 아직 전수교육관과 상설 공연장이 없다. 뙤약볕에 차일(遮日)을 치고 하루 10시간 넘게 훈련했다. 열심히 해주는 제자들이 고맙다. 정예요원 10명을 키우고 싶다. 예부터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도 성장한다. 상설 공연장이 생기면 줄타기를 사회교육으로 키워갈 수 있다. 40주년 공연은 12월 2일 과천문화회관에서 열 예정이다.”

Q : 아홉 살 때 처음 줄을 탔는데.
A :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용인 민속촌 전시가옥에서 살았다. 그때 줄타기 김영철 명인을 만났다. ‘줄을 타면 출세할 것’이라는 말에 끌렸다. 민속촌 전체가 놀이터였다. 줄 타는 게 마냥 재미있었다. 호기심도 컸고….”

Q : 중학교도 중퇴할 정도였다.
A : “1979년에 스승이 뇌일혈로 쓰러져 거동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집에 모셔와 병 수발을 드셨다. 선생님이 구술하는 대로 연습했다. 철저한 도제수업이었다. 이론 위주라 따라 할 ‘본(本)’이 없어 애로가 많았다. 재능은 없었지만 꽤 우직했던 것 같다.”

Q : 그만두고 싶은 때는 없었나.
A : “88년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가장 힘들었다. 태산 같은 기둥이 사라져 마음이 허했다. 정체성 혼란이 왔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도 겹쳤다. 술·담배도 배웠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줄을 안 타면 누가 타지’라는 생각에 미쳤다. ‘그냥 해야 하는구나,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라는 사명감이 생겼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김씨는 82년 5월 부처님오신날 용인 민속촌에서 첫 공연을 했다. 94년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두 차례 줄에 오르며 ‘민속촌 스타’로 떠올랐다. 94년 결혼과 함께 민속촌을 떠나 ‘예술가 김대균’으로 거듭났다. 이동안 명인에게 재담을, 성우향 명창에게 판소리를 사사하며 ‘기예+재담+소리’의 종합예술 줄타기를 복원했다. 2000년 스승에 이어 줄타기 예능보유자에 올랐고, 2011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됐다. 전 세계에서 한 명밖에 없는, 이 시대 마지막 줄광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김대균씨의 공연 가방. 초립·부채 등 대부분 20년 넘게 사용했다. 왼쪽 원 안 각반은 스승 김영철 명인에게 물려받았다.

Q : 지금까지 몇 번 줄 위에 섰을까.
A : “어떻게 다 세겠나. 지금도 해마다 60~70차례 공연을 한다. 민속촌 시절까지 합하면 정식 무대만 1만 회가 넘는다. 묘한 건 똑같은 공연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관객이 다르고, 장소가 다르니 내용도 달라진다. 현장성·가변성·즉흥성, 우리 줄타기만의 매력이다.”

Q :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줄을 탔는데.
A : “어려선 차비가 없어 늘 걸어다녔다. 줄을 타면 최소 쌀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가계에 보탬이 됐다. 83년 민속촌 초봉이 21만원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6만원 조금 넘는 때였다. 아버지가 쌀 30가마 정도 빚을 졌는데 다 갚아 드렸다.”(웃음)

Q : 사람들은 보통 묘기에 감탄한다.
A : “전승돼 온 줄타기 기예는 모두 45가지다. 그것을 35가지로 정리했다. 기예 못지않게 중요한 게 관객과의 호흡이다. 어릿광대와 말을 섞고, 삼현육각(三絃六角·6가지 전통악기) 반주에 맞춰 우리네 희로애락을 풀어낸다. 이를 줄다스림이라 한다. 판소리처럼 판줄이라고도 부른다. 곡예 중심의 서양 서커스와 확연히 다르다.”

Q : 이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A : “97년 경남 부곡 하와이 공연 때 줄이 끊어져 발뒤꿈치뼈가 나갔다. 재활에 1년 가까이 걸렸다. 1300년 내려온 줄타기 역사와 체계를 정리하자는 책임감이 생겼다.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고 안동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Q : 줄타기에서 배운 것 하나를 꼽자면.

A : “줄타기는 감히 말해 인생 자체다. 과욕을 부리면 떨어진다. ‘줄에 맞는다’고 표현한다. 일단 줄에 오르면 모든 사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잘하겠다는 마음도 금물이다. 중도·중용의 원리라고 할까, 까불다가는 다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나.”

Q : 줄 위에선 세상이 작아 보이겠다.
A : “우쭐할 때도 있다. 그런데 줄타기는 소통이다. 대화다. 맺힌 데를 풀어줘야 한다. 지방이든 외국이든 5~6시간 먼저 공연 현장에 도착해 사는 모습을 살펴본다. 시장·유적지 등을 둘러본다. 그때 보고 느낀 걸 재담에 담는다. 사다리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듯 관객과 교감이 절정에 이르면 부부의 합일 순간보다 더 짜릿할 때도 있다.”
[S BOX] “김영철 명인에게 기예, 이동안 명인에게 품격 배워”
어린 김대균씨를 지도했던 김영철 명인(왼쪽 사진)과 제자 김씨와 함께 공연하고 있는 이동안 명인.
세상에 스승 없는 제자 없다. 김대균씨는 김영철(1920~88) 명인의 무릎제자다. 스승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줄타기를 배웠다. 이를테면 구전심수(口傳心授)다.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이다.

김영철씨는 76년 줄타기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됐다. 그 역시 9세 때 줄타기를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릿광대 없이 혼자 줄을 타는 ‘도막줄’에 능했다. 그는 제자에게 “줄을 스승으로 모셔라”라고 당부했다. 제자는 그 가르침을 평생 간직해 왔다.

“선생님이 한창 활동하던 때의 얘기를 정리해 놓았어요. 그때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낼 계획입니다. 지난 한 세기 전통 기예의 맥을 잇는 일이죠. 몸이 불편했던 선생님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했어요.”

김씨에게는 또 한 명의 스승이 있다. 이동안(1906~95) 명인으로, 김영철 명인과 동문수학했다. 8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한쪽 발에 탈을 씌워서 재담을 늘어놓는 전통 연희) 예능보유자가 됐다. 김 명인이 타계하자 대균씨는 이 명인에게 재담을 익히며 줄타기 원형 복원에 나섰다.

“김영철 스승으로부터 기예를 물려받았다면 이동안 스승으로부터는 품격을 배웠습니다. 이 명인은 예인이라면 무릇 옷 하나, 음식 하나에도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했죠. 제 어릿광대 역할도 해주셨고요. 당대 최고수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신 것, 저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제 제자들에게 그 유산을 오롯이 전해줘야겠죠.”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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