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악바리' 박정태가 간다, 투아웃 몰린 아이들 살리러..

전현석 기자 2016. 8.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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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석 기자의 觸 <촉> ] 청소년들에 야구 가르치는 롯데 자이언츠의 '전설'

현역 시절 '악바리'로 불렸던 박정태(47)의 두 주먹에는 10원짜리 동전 크기의 굳은살이 선명했다. "제가 어릴 때 격투기, 권투, 태권도, 상당히 오래 했습니다. 선수 때는 (아웃됐을 때 분을 못 참아서 주먹으로) 벽을 쳐가 이게 다 까져가꼬, 뼈가 다 이렇게 밀려가꼬요." 그는 흉터투성이 손등보다 말끔한 손바닥을 부끄러워했다. "야구 선수가 손바닥이 이래 반질반질하니까요. 옛날에는 손바닥이 더했는데."

박정태는 인터뷰 약속 장소인 부산의 한 호텔에 1시간 40분 늦게 도착했다. 그는 죄송하다면서 "우리 아아들 때문"이라고 했다. 박정태가 말한 '아아들'은 그가 작년 10월부터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비행 청소년 아이들을 뜻하는 부산 사투리였다.

"우리 아아들이 부산역에 노숙하시는 분들을 위해 도시락 준비를 하는데, 제가 쌀하고 오뎅하고 과일을 좀 전달했거든요. 그런데 오뎅이 늦게 배달돼서 그걸 제가 좀 받고. 또 오늘 새로 들어온 아아들도 있어서 얘기 좀 하다가요. 제가 또 손도 이렇지만 어릴 때 꿈이 조직의 보스였어요. 너희들도 지금 상황이 이렇지만 한순간이다. 늘 깨어 있고 좋은 것만 생각하고 이러다 보면 박정태 같은 야구 선수도 될 수 있고 더 훌륭한 사람도 될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조직이라니, 조폭이요?" 다시 물었다. "네. 저는 집이 가난하다 보니까 좀 불량스러운 친구들이 많았고, 나도 어렸을 때 가출 많이 했어요. 함께 가출한 아아들이 가게 가서 막 훔치고, 돈 없고 배고프니 빵 한두 개로 될 일이 아니고 왕창왕창 갖고 오기도 했죠. 그럴 때 어떤 아저씨는 '이번에는 조금만 갖고 가라. 나중에 더 줄게' 하면서 봐주기도 했어요. 우리 아아들도 편의점에서 3000원짜리 빵 훔치다가 소년원에서 몇 개월 살고 이랬는 모양이라. 저도 그랬으면 어땠겠어요? 어른들이 그런 거 용서해주고 관심 가져주고 그랬으니까 박정태라는 이름을 달고 야구를 했지."

"어릴 때 꿈은 조직의 보스"

박정태는 부산 야구팬들에게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로 통한다. 1991년 롯데에 입단해 2005년 4월 은퇴할 때까지 롯데에서만 뛰었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96, 85홈런, 1141안타, 638타점, 531득점. 전설이라고 부를 만큼 압도적인 기록은 아니었지만 야구팬들은 그를 사랑했다. 키 173㎝에 덩치도 크지 않았지만 '탱크'라는 별명이 붙었다. 평범한 내야 땅볼을 치고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하고, 포수를 부숴버릴 것처럼 홈으로 쇄도하는 근성 때문이었다.

"얌전하게 전준호(전 롯데 선수)같이 슬라이딩하면 좋은데 순간적으로 살아야겠다 생각을 하니까 그냥 막 나는 거죠. 슬라이딩하면 막 나니까 허리에 데미지(충격)가 굉장히 큽니다. 나는 마 있는 대로 날고뛰고, 살라고 달라들고 하니까."

그는 은퇴 후 롯데에서만 2군 타격코치, 2군 감독, 1군 타격코치를 지냈다. 2012년 말 롯데 감독이 교체되면서 1군 타격코치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른 프로야구팀에서 코치직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박정태는 부산 야구를 떠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롯데 자이언츠 홈인 사직구장 대신 기장군의 한 아마추어 야구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야구를 가르친다.

박정태는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을 하던 2009년 리틀야구단을 창단하면서 유소년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팬들한테 받은 사랑을 이렇게라도 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평범한 초등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쳤지만 이후 다문화 가정과 저소득층 자녀, 고아원 아이들, 장애인, 소년·소녀 가장, 비행 청소년 등 대상을 점점 늘려갔다. 작년 12월엔 탈북 청소년 야구단도 창단했다. 현재까지 300명으로 구성된 8팀을 만들었는데 이를 35팀 1000명으로 늘려서 야구 대회를 여는 게 박정태의 목표다.

8팀 이름은 모두 '레인보우 카운트 야구단'으로, 유니폼 색깔별로 팀을 구분한다. 레인보우는 아이들의 꿈을 상징하고, 카운트는 야구에서 '3볼 2스트라이크' 상황을 뜻하는 '풀카운트'에서 따왔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아아들은 풀카운트하고 똑같아요. 벼랑 끝에 서 있어요. 여기서 아웃될 수도 있지만 볼넷으로 살아나갈 수도 있고, 안타나 홈런을 칠 수도 있어요. 아아들이 살고 못 살고는 우리 어른들에게 달렸어요."

탈북 청소년 야구단도 만들어

박정태는 레인보우 카운트 야구단 운영을 위해 작년 12월 '레인보우 희망재단'을 만들고 올 3월 출범식을 가졌다. 재단이 생기기 전까지 야구단 경비는 대부분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얼마를 썼냐"고 묻자 그는 "재단이 생겨서 다행"이라고만 답했다.

"우리 아아들이 야구를 하고 싶어도 형편이 어려우니까요. 한 달에 10만원 정도 회비 내는 일반 학생 10여 명 빼고는 돈을 안 받았습니다. 6년간 참 힘들었습니다. 아아들이 많이 먹더라고(웃음). 장비도 그렇고. 아아들이 움직이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버스 부르는 게 비쌌어요. 한 달에 200만원씩 들어갔는데, 나중에 '길따라고속관광'에서 소문 듣고 후원해 줬어요. 그런데 아아들이 야구 하면서 변한다고 소문 듣고 여기저기서 '우리 불쌍한 아아들도 좀' 이렇게 부탁해서 좀 힘들었어요. 주위 어르신들께서 '이렇게 가면 안 된다. 힘든 아이들이 많은데 이제 혼자 고민하지 말고 재단을 만드는 게 안 좋겠나' 하셔서 재단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이 몇 억씩 내는 건 원치 않습니다. 부담 없이 10년, 20년 장기적으로,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불쌍한 아아들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야구 교습법은 특별할 게 없다. 아이들이 간단하게 몸을 풀게 한 뒤 10여 명씩 편을 갈라 경기를 시키는 게 전부다. 투수와 심판은 그의 몫이다. 그를 도와줄 코치가 없고 경기 시간을 단축해 좀 더 많은 아이가 야구를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아이들은 박정태 야구를 통해 변했다. 소심했던 아이들이 적극적이 되고, 자기만 알던 아이들이 남을 배려하고, 사고나 치던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치겠다며 책상 앞에 앉는다고 했다. 박정태는 비결을 소개했다. "3주 정도 그냥 야구 하게 둡니다. 그럼 아아들이 야구에 미쳐요. 그때부터 교육에 들어갑니다. 말을 안 들으면 '나오지 마' 합니다. 그러면 아아들이 더 미쳐요. 말을 듣게 돼 있습니다. 저는 아아들이 서로 배려 안 하고 고집을 부리면 가차 없이 뭐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엘리트로 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사회성부터 배워야 하거든요. 우리 아아들이 점점 이기적이고 배려가 부족해지는 게, 학교에서 체육을 덜해서 그런 겁니다."

"어머니 위해 악바리처럼 연습"

박정태는 타석에 섰을 때 상대 투수를 쏘아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와 상대해 본 투수들은 "박정태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박정태는 "어릴 때부터 눈빛이 그랬다"고 했다.

박정태는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3남 5녀 중 막내였다. 유복한 집이었지만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가 투병 생활을 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석포초 3학년 때 대연초 아이들과 내기 야구를 하다가 대연초 야구 감독 눈에 띄어 스카우트됐다. "우리 팀에는 가난한 아아들만 있고 상대팀은 집에 돈이 많은 것 같았어요. 용돈을 벌려고 했는데 시비가 붙어서 패싸움까지 했습니다. 이를 우연히 본 대연초등학교 야구 감독이 우리 집까지 따라와서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싸우는 거 보니까 깡다구도 있고 야구도 잘할 것 같다고. 정태를 야구로 성공시키겠다고요."

박정태가 초량중학교(현 부산중학교)에 다닐 때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다. 어머니가 아들 야구 뒷바라지를 했다. 월세를 못 내 계속 이사를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들 야구 회비 낼 엄두가 안 났던 박정태 어머니는 야구단 숙소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선수들이 먹은 밥그릇 치우는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다. 박정태는 그래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연습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추신수(34)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추신수는 박정태를 동경하며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박정태는 추신수를 말렸다고 한다. "야구 배울 때 고생했던 게 생각나서"였다. "신수는 순하고 착했어요. 착한 선수가 야구에서 성공하려면 그만큼 더 혹독하게 변신을 해야 했거든요. 남들이 성공할 때 고통을 10번 받으면 추신수는 300번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아프게 그런 거 하지 말고 선생님처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거 해라' 그랬는데, 신수가 끝까지 하겠다고 했어요. 신수가 참 대견하게 버텨서 성공했습니다."

흔들타법으로 3할 타자

박정태는 일명 '흔들타법'으로 유명했다.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왼손을 배트에 붙였다 떼었다 하는 흔들타법은 한국 프로야구 35년사(史)에 가장 독특한 타격 자세로 꼽힌다. 박정태는 "키가 작고 힘이 없다 보니까 체중 이동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나도 모르게 점점 폼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이 흔들타법으로 전성기 때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다. 한때 올스타전에 출전한 선수들이 재미로 박정태 타격폼을 흉내 내는 게 유행이었다. 박정태는 올스타전에서도 진지했다. 1루까지 전력 질주하고 슬라이딩을 했다. 2년 연속(1998·1999년) 올스타전 MVP에 뽑힌 건 프로야구 사상 박정태가 유일하다.

1999년 한·일 프로야구 대표 선수들이 겨루는 수퍼게임이 열렸다. 일본 선수들은 박정태의 타격 자세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저도 사실 창피하니까 완전히 내 폼으로 안 했어요. 그래도 손을 너무 안 떼면 답답하니까 뗀 듯 안 뗀 듯했는데도 웃더라고요. 만일 이래 다 뗐으면 기절했을끼야." 박정태가 연속 안타를 치자 일본 선수들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박정태의 흔들타법이 부산 지역 초등학교 야구부에서도 유행한 적이 있었다. "부산 야구협회에서 '우짤래, 지금 저래 해쌌는데' 하면서 제 타법 흉내를 걱정하더라고요. 저더러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말리라고 했지요. 사실 이게 체중 이동은 좋을지 몰라도 타이밍 잡기가 힘듭니다. 경기 전날부터 상대 투수에게 맞춰서 비디오 보면서 한 시간 이상씩 맞춰봐야 합니다. 투수들은 이렇게 던져도 안 맥히고 저렇게 해도 안 맥히니까 저를 야구 천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이게 수없이 반복을 해서 맞춰 나간 거거든요. 지금은 하라 해도 못 하겠습니다."

롯데는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한화의 전신)를 이기고 우승했다. 그해 프로 2년 차였던 박정태는 타율 0.335에 14홈런을 기록했다. 이듬해 5월, 박정태는 타율 0.349로 돌풍을 이어가다 왼쪽 발목뼈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복합 골절 부상을 당했다. 후속 타자 땅볼 때 1루 주자였던 박정태가 병살되지 않으려고 2루로 전력 질주하다 수비수와 부딪쳐 생긴 일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회복이 되기도 전에 운동을 시작한 게 화가 됐다. 부상 부위에 염증이 생기고 말았다. 뼈의 3분의 1을 깎아낸 뒤 골반뼈를 이식하는 수술까지 했다. 총 5번의 수술 후 의사는 박정태가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다. "사직구장에서 경기 끝나면 제가 입원한 병원에 와서 격려하는 팬들이 많았어요. 팬을 위해서라도 빨리 일어나야지 하다가 그리됐죠." 박정태는 약 2년간 치료와 재활을 마치고 1995년 5월 사직구장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재활한 지 얼마 안 돼 양쪽 다리 근육이 짝짝이인 상태에서 4타수 3안타를 기록해 부산 야구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는 선수 시절 부상을 달고 살았다. 그는 "모든 일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타자가 친 땅볼을 투수가 잡아서 슬슬 던진다고 해도 1루까지 100% 정확하게 송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는 심판이 아웃 판정할 때까지 열심히 뜁니다. 만약 그게 빠지면 2루까지 뛸 수 있습니다. 그게 팬들하고 약속 아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는 거요."

"오늘은 무조건 이긴다"

박정태 은퇴 이후 롯데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사직구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린 적이 있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根性(근성) #16. 근성마저 없다면 거인 유니폼 입을 자격도 없다!'

16은 박정태의 등번호였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박정태가 1999년 10월 20일 대구에서 치러진 롯데와 삼성의 플레이오프 7차전 때 선수들에게 한 말이다. 박정태는 이 경기를 "죽어도 잊지 못할, 야구 인생 최고의 경기"라고 했다.

롯데는 삼성 이승엽과 김기태의 연속 홈런으로 0대2로 지고 있다가 6회초 외국인 타자 호세의 홈런으로 1점을 따라붙었다. 이때 일부 대구 관중이 호세를 향해 오물을 던졌고, 흥분한 호세가 관중석을 향해 야구방망이를 날렸다. 호세 퇴장이 선언되자 당시 주장이었던 박정태는 "이런 상황에선 경기를 할 수 없다"며 롯데 선수들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몰수패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 박정태는 코치진의 만류로 선수들과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경기 재개에 앞서 박정태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알긋나? 안 그러면 다 지기삔다."

롯데는 기적처럼 경기를 뒤집었다. 9회초 3대5로 지고 있다가 대타 임수혁이 동점 2점 홈런을 쳤고, 연장 11회초 김민재가 결승 2루타를 쳐서 6대5로 승리했다. "사실 그 경기는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겼어요. 그 싸움을 통해서 저 자신만의 철학이 생겼습니다. 스포츠에서 기술, 힘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이 꼭 이겨야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팀이 강력해진다고. 감독은 선수 하나하나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주고, 그런 기를 팬들에게 전해서 감동을 줘야 한다고요."

"감독한테는 소통이 제일 중요"

박정태는 롯데 자이언츠 감독 후보로 계속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는 "언론 플레이한다고 오해받기 싫다"면서 감독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박정태는 대신 "야구장 밖에서 야구에 대해 더 많이 배웠다"고 했다. "아아들한테 야구를 가르치면서 야구장 밖 사람들 마이 만나서 마이 배웠습니다. 비행 청소년 보살피는 판사님, 어려운 이웃 돕는 부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분들, 탈북민 지원하는 교회 목사님. 이분들한테서 프로야구 감독에게 제일 중요한 게 소통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선수하고 심판하고 팬하고 제대로 소통해야, 선수 장단점과 컨디션도 파악하고 심판 성향도 알고 팬이 원하는 야구를 할 수 있겠지요."

박정태는 사직구장에서 '조직의 보스'라는 어릴 적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박정태의 아아들'은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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